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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양장이라 버스가 가기 힘들군

 

 

적상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통영-대전간 고속도로 무주 나들목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는 무주 나들목에서 30번 국도를 타고 무주읍을 우회해 727번 도로를 잠깐 탄다. 이 길은 괴목리를 지나 무주구천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적상산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내창교에서 바로 우회전한다. 이곳 내창교에서 적상산 정상 아래까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이 구불구불 구절양장이다.

 

그나마 덕유산 국립공원 적상분소까지는 길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적상분소를 지나자 길이 구불거리기 시작한다. 우리 차가 버스인지라 커브를 돌기가 쉽지 않다. 속도를 늦추고 반대 차선을 약간 침범해야 겨우 커브를 돌 수 있다. 이런 급커브에서 버스끼리 만난다면 정말 큰일이다. 이런 곳에서는 속도를 늦추고 경적을 울려 반대 차선에서 오는 차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린다.

 

 

정말 차를 타고 가면서 이렇게 긴장한 적이 없다. 반대차선으로 대형차가 오지 않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그래도 가끔 차를 만나 조금씩 양보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뒤로 조금 물러나기도 하면서 적상터널을 지나 적상호에 이를 수 있었다. 적상호에는 양수발전소가 있는데 전기를 덜 쓰는 밤에 물을 퍼올렸다 전기를 많이 쓰는 낮에 발전을 해 전기를 생산한다고 한다. 경제성보다는 비상시 전기를 확보하는 비상용 발전소이다.

 

지난번 사전 답사 때는 이곳에 내려 호수도 살펴보고 심호흡도 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적상호 건너편으로는 적상산 전망대가 보인다. 차는 안국사로 향한다. 잠시 후 우리 버스는 안국사 약 800m쯤 아래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한다. 이곳 주차장에서 안국사까지는 일차선 도로로 나 있지만 승용차만 운행할 수 있다.

 

안국사 가는 길에 만난 적상산성과 적상산성 호국사비

 

 

우리는 모두 차에서 내려 안국사를 향해 아스팔트길을 걸어 올라간다. 가다가 보니 숲으로 난 샛길이 보인다. 길이 조금은 가파르지만 오솔길이어서 운치가 더 있다. 나무 그늘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가니 길옆으로 낮게 쌓인 산성이 보인다. 적상산성이다. 산성이라고 하면 3-6m 정도의 높이로 정연하게 쌓여 있어야 하는데 적상산성은 높이가 1m는 될까? 또 돌도 자연석을 그대로 올려놓은 수준이다. 전투용이나 방어용이라기보다 피난용 산성으로 보인다.

 

적상산성은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낮게 쌓은 산성으로 그 길이가 8,143m나 된다고 한다. 동서남북으로 네 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삼국시대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 이 산성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이곳은 워낙 지대가 높아 외적이 올라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산성을 따라 조금 오르니 안국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한쪽에는 '적상산안국사'라는 현판이, 다른 한쪽에는 '국중제일정토도량(國中第一淨土道場)'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우리는 절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절 아래 있는 적상산성 호국사비를 보러간다. 안국사 남쪽 축대 아래에 있는데 인조 때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이식(李植)이 찬했다.

 

대리석으로 만든 이 호국사비는 이면비(二面碑)로 전체 높이는 1.78m이다. 전면 위에는 전서로 '적상산성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라 쓰고 그 아래에 적상산성과 관계되는 기록들, 사고지 설치, 사고지 방비의 허술함, 호국사 창건 경위 등을 담고 있다. 그러나 비면의 마모가 심해 글씨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그 내용은 <택당선생 별집(澤堂先生別集)>제7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뒷면에는 '순치2년10월일건(順治二年十月日建)'이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순치 2년 10월에 세워졌다는 뜻으로, 순치 2년이면 1645년(인조 23)이 된다.

 

안국사의 역사와 당우들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3년(1277) 월인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광해군 5년(1613) 사찰을 중수하였으며, 그 다음 해부터 창건된 적상산 사고를 지키는 승병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번졸(番卒)과 승군(僧軍)이 모두 떠나 퇴락하게 되었다고 한다. 1643년 이식이 이곳을 시찰하고 그러한 문제점을 지적하였으며 그 결과 1645년 전라감사와 무주현감의 지휘 하에 호국사라는 새로운 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 후 영조 47년(1771) 법당을 중창하고 절 이름을 안국사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국사는 1910년 경술국치로 적상산 사고가 폐지될 때까지 호국의 도량으로 역할을 했다. 안국사는 1949년 여순사건으로 당우의 대다수가 소실되었고, 1992년 양수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절이 적상호에 잠기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절은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안국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계단을 올라 청하루(淸霞樓) 밑을 지나가야 한다. 청하루는 일종의 강당인데 현재 기와불사 접수처 겸 불교용품 판매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누각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극락전이 뒷산을 배경으로 아주 단아한 모습이다. 극락전(전북 유형문화재 제42호)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안국사의 중심 법당이다.

 

 

나는 청화루를 나와 마당을 건너 극락전 법당으로 간다. 법당 안에는 목조아미타삼존불(전북 유형문화재 제201호)이 모셔져 있다.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는데, 작품의 예술성과 조형성은 그렇게 뛰어나 보이지 않는다. 이 불상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한다.

 

사실 안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재는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7호)이다. 그러나 이것은 법회나 의식 등 행사 때만 사용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다. 길이가 10.75m 폭이 7.2m나 되는 대형 걸개그림으로 석가가 설법하는 장면을 그렸다고 한다. 문화재청의 자료 사진을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다보여래, 문수보살, 보현보살이 왼쪽에는 아미타불,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이 서 있다. 건장한 모습의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강렬하다.

 

극락전 서쪽에는 천불전과 성보문화관이 있는데 이들 건축은 1992년 이전 이후에 지은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는 없다. 단지 천불전의 현판이 의미가 있는데, 현대의 대표적인 서예가인 강암 송성용 선생이 썼다. 현판 왼쪽에 보니 1995년(乙亥) 4월초파일에 쓴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1998년 개관된 성보문화관에는 중국, 티벳, 태국, 미얀마 등 여러 나라의 불상과 탱화, 도자기 등 500여점의 불교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다.     

 

적상산 사고

 

 

해발 1,000m 가까이 있는 안국사를 보고 우리는 다시 도로를 따라 적상산사고로 내려간다. 지난 번 안국사를 사전 답사했을 때는 안개가 안국사를 뒤덮었는데 오늘은 날씨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한 1㎞쯤 내려가니 왼쪽으로 적상산 사고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사고 쪽으로 가까이 가 보니 담장 안으로 두 채의 2층 누각이 눈에 띈다.

 

적상산 사고의 역사는 광해군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안에 처음 실록각을 짓고 1618년에 선조실록을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인조 12년(1634)에는 북쪽에 위치한 묘향산사고가 위험에 처하게 되자 그곳의 조선왕조실록을 이곳 적상산 실록각으로 이관하였다. 그리고 인조19년(1641) 선원각이 만들어졌고 선원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승장청, 군기고, 화약고, 수사당, 문루 등이 있었으며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 그리고 의궤 등을 보관했다고 한다. 적상산 사고는 조선시대까지는 유지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방 이후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이곳의 조선왕조실록이 규장각으로 이전된 후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상산 사고는 현재 적상호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92년 적상산에 양수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1997년 호수 위 해발 860m 지점에 선원각이 먼저 복원되었고 1998년에는 실록각이 복원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실록과 선원록 그리고 의궤의 복제본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실록 관련 기록화와 영상물, 영상과 디오라마 등이 있어 일종의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적상산성 호국사비'에 나타난 적상산과 적상산성

 

무주현(茂朱縣)의 상산(裳山)은 호남과 영남의 삼도(三道)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가장 높은 곳이 상암(裳巖)인데, 사면이 층암 절벽으로 몇 천 길이나 우뚝 솟구쳐 있다. 그 위에는 또 토산(土山)이 있어 절로 동부(洞府)를 이루고 있는데, 널찍하게 앞이 트인 가운데 주위를 빙 둘러 에워싸고 있으며, 그 사이에서 샘물들이 용솟음쳐 나와 한데 합치면서 폭포수를 드리우며 아래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이 험준한 지세(地勢)를 이용하여 성을 만든 것이 어느 시대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현재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아래에서 부여잡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은 겨우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 두세 군데밖에 되지 않고, 오직 북문(北門) 쪽으로 우회하는 잔도(棧道) 한 곳을 통해서만 속마(束馬)가 지나갈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밖으로는 또 길게 뻗은 산맥과 큰 내가 둘러싸 지켜 주고 있으니, 이 모두가 요새를 설치하고 병력을 배치할 수 있는 천혜(天惠)의 여건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감여가(堪輿家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가 방술(方術)을 가지고 살필 적에도 길지(吉地)의 조건에 들어맞는다고 극구 찬탄을 하곤 하니, 그 천험(天險)의 신비함이야말로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점이 있다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지리지(地理誌)를 살펴보더라도 전조(前朝)의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이나 아조(我朝)의 체찰사(體察使) 최윤덕(崔潤德) 모두가 진소(鎭所)를 설치해야 한다는 의논을 제기하였고, 여말(麗末)에는 또 삼도 안렴사(三道按廉使)가 왜구를 피해 이곳에 둔병(屯兵)을 했던 자취가 남아 있으니, 그러고 보면 상성(裳城)의 이름이 대체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하겠다.

 

茂朱縣之裳山。當湖嶺三道之交。最高者爲裳巖。四面層壁。特起數千仞。上有土山。自成洞府。寬敞回抱。泉澗湧出。合爲瀑簾下注。其因險爲城。不知何代始也。自下攀援以上。則僅容跟蹠者二三處。惟當北門有回棧。可通束馬。外有長嶺大川環衛。皆可設關置兵。堪輿家揆以方術。亟稱其協吉。天險神祕。有未易名言者。據地誌。前朝崔都統瑩。我朝崔體察潤德。皆有設鎭之議。麗末。又有三按廉避寇屯兵之跡。則裳城之名。蓋久矣。(한국고전번역원 자료)


태그:#적산산성, #안국사, #극락전, #영산회괘불탱, #호국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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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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