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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를 혁명적으로 공천했다는 18대 총선이 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여기자를 성추행한 파렴치범의 확고한 1위 고지 점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위장전입과 위장취업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덩치가 큰 ‘차떼기’로 곤욕을 치른 한나라당이 ‘봉투떼기’를 하다 들키자 그것도 개혁으로 인정하는지 계속 1위를 고수하고 있고요. 거기에 정당 지지율과 후보 지지율이 반대로 나타나는 기현상은 선거문화가 후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출마한 후보와 정당을 홍보하는 로고송이나 대통령의 실정을 비유해서 개사한 가요를 듣기 어려워 선거 분위기가 너무 삭막하고, 유권자들도 더욱 답답해하는 것 같습니다. 정치가 그만큼 깨끗해졌고 선거 풍토가 선진화되었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18대 총선에서도 로고송이 발표된 모양이긴 한데 유권자들의 가슴을 파고들기에는 너무 빈약한 것 같습니다. 저는 신익희 후보가 호남지방 유세에 나섰다가 기차에서 돌아가시던 1956년과 조병옥 박사가 돌아가시던 해인 1960년에 유행했던 노래 두 곡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1956년에는 ‘비 내리는 호남선’이 유행했고, 1960년에는 ‘가련다 떠나련다’로 시작되는 ‘유정천리’를 개사한 노래가 유행했는데, 50년 전 어린이들도 유행가를 개사한 정치풍자 노래를 즐겨 불렀다면 놀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손인호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

 

총선이나 대선이나 선거철이 돌아오면 떠오르는 후보와 노래가 있는데,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선거철이고 하니까 오랜만에 추억의 유행가부터 불러보고 얘기를 시작해야겠네요.

 

1.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 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2.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라 비 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1956년은 제가 7살 되던 해였습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마,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 후보가 이리(익산) 유세를 마치고 상경하다 기차에서 급서하자 국민가요가 되었던 ‘비 내리는 호남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앞집 대청에서 막걸리를 마시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주전자와 숟가락 장단에 맞춰 ‘비 내리는 호남선’을 부르며 춤을 추다 ‘신익희 선생’을 외치며 눈물을 흘리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 모습이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처럼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농림부장관을 지낸 김판술 전 의원과 어업조합 중매인이었던 앞집 아저씨가 아이들처럼 이름을 부르며 지낼 정도로 친한 친구였으니 술판이 벌어질 만도 하지요.   

 

신작로 건너에 공설운동장이 있었기 때문에 선거철이면 후보들의 유세가 끊이질 않았는데, 김판술 전 의원도 앞집에 자주 들렀습니다. 하루는 골목에서 비석 치기를 하고 노는데 김 전 의원이 골목으로 들어오면서 "어이! 오덕이 오랜만여"라고 하자 “핫따! 판술이 언제 내려왔댜!”라며 반갑게 손목을 잡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감정이 풍부해서 그런가요. 아무리 애절하게 느껴져도 추억의 유행가일 뿐인데 지금도 부를 때마다 몸에 닭살이 돋고 슬퍼지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신익희 후보 부인이 노래를 만들었다는 소문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했는지, 신익희 후보가 우리 동네 출신이고 우리 집과도 무척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망한 후 선거에서 200만에 가까운 득표는, 국민이 신익희 후보의 급서를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설명해주는 그래프라 하겠습니다. 

 

신익희 후보의 죽음은 시간이 지나서도 입에 오르내렸는데, 우리 사이에는 ‘신익희 후보도 김구 선생처럼 다른 사람에게 죽었다’라는 소문이 떠돌았지요. 그러나 훗날 알고 보니 모두가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 한때 금지곡이 됐었고, 노래를 부른 가수는 물론 작곡가와 작사가까지 당국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는 소문은 노래를 부른 손인호씨 아들의 증언으로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친구들과 즐겨 불렀던 ‘유정천리’

 

1.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천리만리 타국에서 박사죽음 웬말이냐./ 눈물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2.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의 조기선거 원망하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고 민주당에 비가 오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으로 수술을 받으러 건너갔던 조병옥 박사가 돌아가시던 1959년은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해였는데, 아랫목에서 신문을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으시던 아버지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조병옥 박사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만나는 사람마다 “조 박사가 어치께 되얐다고?”라며 안부를 묻는 등 온 동네가 상갓집 분위기였습니다. 원통해하는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을 따라 슬퍼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네요. 

 

‘눈물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대목을 "동아일보 신문 들고 종아니가 울고 있네!"로 바꿔 부르던 신작로 빵집 골목에 살던 친구가 생각나는데, 얼굴만 기억하지 이름을 잊어버려 안타깝습니다.  

 

<동아일보> 마니아였던 아버지가 신문을 큰소리로 읽으면, 방안 이곳저곳에서 한숨과 탄식 소리가 들리면서 대화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저는 내셔널 트랜지스터에서 청취한 뉴스까지 합해 동네 친구들에게 전해주는 통신원 역할을 했지요. 그래서 친구도 제 이름을 넣어 불렀던 것 같습니다.

 

누가 개사했는지 입에서 입으로 퍼져, 장면 내각이 들어선 후에도 친구들과 부르고 다녔는데요. “아뜰은 그런 노래 허는 거 아니다”라며 혼내는가 하면, “느떨 그 노래 불르믄 순사한티 잽혀간다”라고 겁주는 아저씨도 있었는데 지금도 강건하신지 안부가 궁금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필통(http://blog.hani.co.kr/chongani/)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비내리는호남선, #유정천리,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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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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