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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의 업적은 관 뚜껑이 덮인 뒤에야

▲ 몽양 여운형 선생
ⓒ 몽양 선생 기념사업회
두보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가 백년 뒤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百年死樹中琴瑟) 장부의 업적은 관 뚜껑이 덮인 뒤에야 비로소 바른 평가를 할 수 있다(丈夫蓋棺事始定).

한 인물의 정당한 평가는 그 인물이 돌아간 지 백년은 지나야 바른 평가를 내릴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가 해방된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1950년까지는 대혼란의 해방정국으로 기라성 같은 많은 인물이 명멸한 대각축의 군웅할거시대였다.

그리고 숱한 인물이 괴한의 흉탄으로 비명에 가셨다. 항일독립운동가요, 교육자요, 언론인이요, 정치가요, 체육인인 몽양 여운형 선생도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떨리는 항복 목소리로
제 2차 세계대전은 끝나
식민지 억압 36년 만에
조선독립의 활화산은 터졌다.

몽양은, 15일 저녁
안재홍,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정백, 최근우 등과 협의
역사적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
삼천만 민족의 열망
건국준비에 우렁찬 첫발을 내디뎠다.

16일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해방과 독립에 대한 감격적 명연설을 해
삼천리강산을 들끓게 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광적으로 호응
단시일 내에 146개의 각급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어
건국질서는 착착 잡혀갔다.

하건만
9월 8일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그새 찍소리 한 마디 못하던
친일도배와 친일잔재경찰은
미군을 등에 업고
건준을 공산당으로 몰아
야수적 탄압을 가했다.

찬탁 반탁의 회오리 대혼란 속에서
십여 차례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몽양은 오직 건국 일념에 불타
조선인민당, 민족통일전선, 근로인민당 등을 창설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에 헌신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오호(嗚呼)라!

조선민족의 대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은
반역의 백색테러의 흉탄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큰 별은 떨어졌다.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조선' '조선'이었다.

- <거성의 광휘> '몽양 순국 50주년을 맞아' 이기형의 서사시에서 발췌.


"몽양의 노선이 옳았다"

▲ 해방 다음날 휘문학교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몽양.
ⓒ 몽양 선생 기념사업회
올해는 몽양이 가신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몇 해 전 이기형 시인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여 몽양기념사업회로 초대를 받고서 미적거리다가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다. 서거 60주기 추모제 초대장을 펼치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몽양의 노선이 옳았다."

어릴 때부터 그 말씀을 여러 번 들었다. 이 참에 왜 몽양의 노선이 옳은지, 유족을 만나 확인하고 싶었다.

몽양기념사업회로 연락하자 여인호씨를 소개해 주었는데, 아버님 여명구(몽양의 조카)씨가 위독하여 중환자실에 있어 시간을 낼 여유가 없다기에 강준식 상무이사와 평소 몽양을 가까이서 뵌 이기형 선생을 한 자리에 모셔서 말씀을 듣기로 하였다.

두 분에게 연락드리자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지난 7월 12일 오후 1시 마포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올해 91세인 노구임에도 몽양 선생 일이라면 마다않고 달려오신 이기형 선생의 열정에 고개 숙였다. 먼저 이 선생에게 몽양 선생을 만났던 일화부터 들었다.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지도자를 찾다

"내가 처음 몽양을 본 것은 함흥고보를 졸업한 1938년 가을이었다. 그 때 나는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듯 지도자를 찾고 있었다.

경성부 계동 140번지 8호를 찾았을 때 몽양은 집에 없었다. 곧 돌아오실 거라는 말에 그 부근을 돌아다니며 기다렸다. 해가 서천에 떨어지기 직전쯤에 곤색 레인코트에 밤색 중절모를 쓴 풍채 좋고 훤한 분이 골목을 돌라 올라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사진도 본 일이 없건만 직감적으로 대번에 여운형 선생임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여 선생님이시지요?'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예, 그렇소마는….'

반가워하며 걸음을 멈춘다. 빛나는 눈과 반백 콧수염과 다정한 눈웃음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분은 나에게 문간방(응접실)에 들어가 기다리라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찾아온 뜻을 다 듣고 난 선생은 선생의 지도자론을 펴는 것이었다. '오늘날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남더러 이리 가라 저리 가라 손가락질만 하구 있어. 그나마 그릇된 방향으로 마치 수탉이 세차게 싸우노라 돌진해 나가다가 서로 방향감각을 잃고 저만치 빗나가버리는 것과 같거든.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 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 몽양이 암살 당시 타고 있었던 1938년형 스튜드베키 검은색 리무진
ⓒ 몽양 선생 기념사업회
첫 눈에 반하다

몽양 선생과 이야기가 한창일 때 쨍그랑거리며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야구공 하나가 마룻바닥에 날아 떨어지는 게 아닌가. 담 저쪽은 휘문고보 운동장이었다.

몽양은 빙긋이 눈웃음을 치며 공을 집었다. 공을 들고 마당에 내려가더니 낮은 벽돌담위로 '학생들!'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어떻게 야단치나?'하고 나는 속으로 퍽 궁금했다.

'공 예 있어. 씩씩하구먼. 맘껏 뛰놀아!'

전혀 뜻밖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몽양의 용모를 살펴보면, 빛나는 두 눈, 넓고 번듯한 두드러진 이마, 우뚝한 코, 복스럽고 큰 두 귀, 처지지도 빠지지도 않은 아래턱 윤곽 등 어느 하나 빠지는 데 없고 빈틈없는, 원로 언론인 김을한의 표현을 빌면 그야말로 '미스터 코리아' 였다.

▲ 시인 이기형 선생
ⓒ 박도
그의 조부가 '왕재(王材)' 라고 탄성을 올린 것도 과찬만은 아니었다고 수긍이 갔다. 키는 보통이 훨씬 넘고 골격은 굻고 운동으로 다져진 짜임새 있는 몸매에 더할 데 없이 당당한 체격이었다. 누구는 그 얼굴, 그 체격을 한마디로 '우람하다' 고 표현하기도 했다. 몽양이 길을 걸으면 길이 꽉 차고, 연단에 오르면 단상이 꽉 차는 듯했다."

34세 때 몽양을 처음 만난 이기형 시인은 그 인물의 인격에 매료되어 일평생을 흠모의 정으로 사시고 있었다.

"흔히 나를 몽양의 비서로 소개하는데, 나는 몽양의 비서직을 맡은 적은 없어요. 그저 선생이 좋아서 쫓았을 뿐이에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회로 되었습니다.

서거 60주기 추모제·학술심포지움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

* 일시 : 2007. 7. 19(목).

[1부] 추모제 10:00~11:30  [2부] 학술심포지움 14:00~17:00
* 장소 : 1부 - 우의동 묘소, 2부 - 서울역사박물관 강당

주최: (사) 몽양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몽양선생 서거 60주기 추모제 준비위
전화: 02-554-5006
www.mongyang.org


태그:#여운형, #이기형, #몽양, #강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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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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