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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발활동에 참여하는 학생들. 요즘 '가르치는 것은 또한 배우는 것이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 김연옥

나는 지금 중학교 영어 선생이다. 올해 오랜만에 3학년 담임도 맡게 되었다. '스승의 날' 전날인 지난 14일에 학급 조례를 하러 교생 선생님과 같이 우리 반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우리 반 교실에 이르자 왠지 여느 때와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를 위한 '깜짝파티'가 준비되었다는 생각이 한순간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모르는 척하고 문을 드르륵 열었다.

내가 교실 안으로 들어서자 학생들의 입가에 엷은 웃음이 번지면서 '스승의 은혜' 노래가 우렁차게 교실에 울려 퍼졌다. 칠판 가득 '스승의 날'을 맞는 나를 축하하는 글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고 날아갈 듯한 색색의 풍선들도 예쁘게 달려 있었다. 교탁 위에는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케이크와 화사한 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익살꾸러기 급장이 앞으로 나와 교탁 위에 있는 케이크에 촛불을 켜더니 내게 촛불을 훅 불어서 끄라고 주문을 했다. 또 앙증맞게 생긴 고깔모자도 내 머리에 씌웠다. 우리 반 혜윤이는 중학생이 되고서 처음 급장으로 뽑혔다. 평소 익살을 잘 떠는 그 아이는 전형적인 급장과는 거리가 좀 멀다. 그래서 내게서 왕초보 급장이라고 더러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나와 반 친구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는 남다른 재주가 있다.

갑자기 몇몇 학생들이 종이비행기들을 내게 날렸다. 그 종이비행기들에 그들의 예쁜 마음까지 실어 편지를 썼다. 마침 그날 우리 반 첫째 수업이 원어민 선생님 케빈(Kevin)이 가르치는 영어 수업이었다. 그의 수업에 나도 참석해서 돕고 있는데, 벌써 우리 교실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친절한 케빈도 나와 같이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우리 반 학생들과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케빈은 얼굴 표정이 풍부하고 순수하다. 그래서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케빈에게 우리 학생들은 귀엽다는 표현마저 쓰기도 한다. 요즘 중학생들은 딱딱하고 근엄한 선생님보다는 친절하고 유머가 있는 선생님을 좋아해서 그럴까. 영어를 싫어하던 학생들도 케빈을 피하지 않고 선뜻 인사를 나누고 싶어한다.

▲ 원어민 선생님 케빈(Kevin)은 이따금 기타를 치며 노래를 가르치기도 한다.
ⓒ 김연옥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는 이번 스승의 날에 수업을 하지 않고 하루 쉬기로 했다. 해마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지면 귀를 틀어막고 싶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때리는 말들이 많아 힘들다. 더욱이 그동안 잘못 살아왔는지 내 개인적으로도 스승의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찾아뵙는 선생님이 없다.

우리 학교로 교육 실습을 나와 있는 교생 선생님에게 얼마 전 '가르치는 것은 곧 배우는 것이다(Teaching is learning)'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린 학생들은 내게서 영어에 관한 지식을 얻고 삶의 지혜 또한 배워 나가겠지만, 나도 그들만의 톡톡 튀는 신선한 아이디어를 배우고 그들을 통해서 교사의 참다운 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립학교에서 근무하다 보니 오랜 세월을 함께하는 동료 선생님들에게서도 배우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진정한 스승은 늘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 15일 스승의 날에 마산시 학원연합회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는 영희(가명)와 같이 마산공설운동장으로 갔다. 내가 그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따라간 셈이다. 조개를 캐서 집안을 겨우 꾸려 나가는 할머니와 살고 있는 영희. 가끔 환하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는 그 아이를 보면 늘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래서 장학금을 받을 기회가 생기면 꼭 챙겨 주고 싶었다.

장학금을 받고서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영희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마침 집에 계시던 할머니에게 힘드셔도 마음만은 즐겁게 가지시라는 말밖에 해 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삶에 지친 듯한 그 할머니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이나 부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늘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남들에 대한 배려가 없고 점점 이기적으로 변해 가는 학생들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조금만 더워도 창문을 열지 않고 선풍기나 에어컨에 손이 먼저 가는 요즘 학생들의 모습에서 불안한 미래도 보인다. 그래서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점점 더 한계가 느껴지는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역설적으로 그만큼 더 요구되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번 꼭 쓰고 싶었던 빨간 고깔모자, 그리고 학생들의 마음을 싣고 날아온 종이비행기들이 내 마음속에 소중한 선물로 남아 있다. 친구처럼, 어머니처럼 다가서려는 내 노력이 학생들의 눈에도 그대로 비치기를 바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특별한 5월> 응모글.

학생의 개인 사정으로 '영희'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태그:#스승의날, #고깔모자, #종이비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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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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