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아침에 눈을 뜨면 우울해진다. 며칠 남지 않은 휴가기간을 손가락으로 꼽아본다. 꼽은 손가락이 몇 개 되지 않으니 머리가 아프다. 벌써부터 돌아가서의 일들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온다. 한참을 우울해 있다가도 얼른 정신을 차린다. 남은 시간이라도 즐겁게 또 즐겁게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오후 늦게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해서 서둘렀어야 하지만 어쩌다 보니 또 늦어버렸다. 폐티예 시내에 있는 돌무쉬(터키의 미니 버스) 정류장으로 서둘러 걸었다. 사클리켄트 계곡(Saklikent Gorge)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 서 있는 버스 하나하나 체크를 하고 있으니 '사클리켄트! 사클리켄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사클리켄트 가나요?"
"조금 있으면 출발해요. 그리고 5시에 돌아올 거예요."
"그것보다 일찍 돌아올 수 있나요? 저는 일찍 이곳에 다시 돌아와야 해요."
"그럼요."
옆에 있던 다른 할아버지께서 다음 버스를 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해주었지만 운전기사는 문제가 없다며 우리를 태웠고 시간도 촉박한데 좀 더 빨리 가면 좋을 것 같아 꺼림칙한 마음을 누르고 차에 올랐다. 이미 차는 만원이었고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이 작은 미니버스는 덜덜거리며 출발했다. 어느 정도 가다가 차에 문제가 생겼는지 운전기사는 승객들에게 음료수를 사주며 기다리게 하고 차를 손본 뒤 다시 출발했다.
한 40분을 달렸을 때 미니버스는 산 속 작은 길에 섰다. 사클리켄트에 다 왔다고 생각하고 내렸는데 이곳은 내가 가고자 했던 계곡이 아니었다. 계곡을 가는 길 주변 관광지였다.
"언제 사클리켄트에 가죠?"
"여기서 50분 구경할 시간을 드리고요. 그 다음에 공원에 가서 점심을 먹고 두시 반쯤에 도착할 겁니다."
"네? 전 두시 반에 폐티예로 돌아가야 하는데요."
"문제없어요. 우린 두 시 반에 사클리켄트에 도착하고 그 때 바로 폐티예로 가면 되요."
말이 되는가! 나는 다른 곳이 아닌 사클리켄트 계곡을 보러 왔는데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돌무쉬를 타고 폐티예로 돌아가라니! 영어가 잘 안 되는 운전기사는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고 나는 내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또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와 설명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한다. 머리 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가이드북을 펴놓고 우리의 위치를 찾아보니 계곡으로 가는 길에서 옆으로 8km 나 들어와 있다. 걸어서 두 시간정도 걸리는 거리다. 시간만 있다면 걸어서라도 나가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어떻게 든 이곳에서 나가야 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하다. 천천히 몇 번이고 내 상황을 설명을 했다. 한참을 지나서야 운전기사가 내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기 차는 지금 상태가 안 좋아 열을 식히기 위해 가만히 서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계속 되풀이되는 말에 기분도 상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 없이 엉뚱한 곳에서 아까운 시간만 낭비하고 있으니 한 번 더 체크하지 않고 무작정 올라탄 나를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어떤 분이 다가왔다. 자신의 차로 큰 길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대신 운전기사에게 왕복 요금을 내라고 했다. 기분이 팍 상했다. 엄밀히 따지면 난 편도 요금을 주기에도 아까운 판이었다. 그런데 왕복 요금을 내라니!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그저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돈을 던져놓고 그곳을 떠났다.
아저씨가 세워준 큰길가에서 한참 고민을 했다. 그냥 폐티예로 돌아가 잠시 쉬었다 떠날까 아니면 고작 한 시간밖에 안 되는 시간을 사클리켄트 계곡으로 가야할까. 하지만 이런 기분으론 계곡에 간들 재미가 있을까란 생각도 들었다.
버스가 오기 전까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참았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아까와는 분위기가 다른 진짜 로컬 버스였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타고 내리는 버스였다. 나중에서야 사클리켄트에 가는 버스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는 관광객을 위한 버스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현지인들을 위한 버스인 것이다.

▲계곡 안으로 들어가려면 좁은 협로를 통과해야한다. ⓒ 김동희
드디어 계곡으로 들어갔다. 내가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아침에 계획한 세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냥 둘러보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너무 덥던 바깥과 달리 서늘했다. 갈라져있는 작은 통로를 통해 들어가니 밑에서 세찬 물소리가 들린다. 물소리가 이전의 상한 마음을 쓸어가는 듯했다. 좁은 계곡을 지나 들어가니 사람들로 가득하다. 물 위에 널빤지를 세워놓고 발을 담그고 쉬면서 음식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네와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여기까지 왔으니 물에 발은 담가야지. 그래, 한 시간이라도 즐기는 거야!'
발을 담그니 정신이 바짝 든다. 물이 얼마나 세고 차가운지 발을 금방 빼야 했다. 바로 앞에는 계곡물이 무섭게 흐르고 있고 사람들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그곳을 건너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빼거나 잘못 움직이면 바로 넘어질 것 같았다. 카메라를 방수 팩에 넣고 목에 걸고서 건너기에 도전해본다. 물에 들어가서 일분도 못 되서 다시 물 밖으로 나왔다. 발이 동상 걸릴 것처럼 시리다.

▲계곡을 건너는 사람들 ⓒ 김동희

▲물살이 세서 한발 한발 내딧는 것이 조심스럽다. ⓒ 김동희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건너기를 시도했다. 물살이 정말 세서 한발자국을 떼기가 힘들다. 몸을 앞으로 숙여서 뒤로 밀리는 것을 막으며 앞으로 한발자국씩 나아간다. 중간쯤 도착하니 물이 허벅지 위까지 차기 시작했다. 긴장되면서도 신이 나기 시작했다. 내 주변에는 손에 손을 잡고 그곳을 건너느라 신난 무리들로 가득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시원하다. 물 속에서 모르는 사람과 손을 잡고 뒤엉켜서 걸으니 힘도 덜 들고 기분도 날아갈 것 같다.

▲사클리켄트 계곡 안 ⓒ 김동희
'아까 포기하고 폐티예 갔으면 진짜 후회했겠다. 이렇게 속이 시원한 걸!'
갈등 하던 그 시간을 잘 참아준 내가 대견스럽다. 이 계곡은 마음을 잘 다스렸다고 주는 상인 것 같다. 복잡하던 머리는 시원한 바람으로 식혀주고 멍한 정신은 차가운 물로 바짝 들게 하고 상처 받은 마음은 사람들과의 한번 웃음으로 날려버렸으니 이만한 상이 어디 있겠는가!

▲시원한 물을 보며 쉬고있는 여행객 ⓒ 김동희
나는 그저 이 계곡의 초입부에서 물장구를 쳤지만, 이 물을 건넌 후에도 멋진 계곡이 계속된다고 한다. 혼자서 안으로 들어가기는 좀 위험하기도 하지만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올라가면 재미있다고 한다. 또 중간에 자연 그대로의 진흙 팩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짧으니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접고 그냥 앞에 깊은 물이나 건너며 놀기로 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나중에 또 오면 되지!'
바위에 앉아서 물 속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소리를 듣는다. 옆에 있는 작은 꼬마가 날 보며 웃는다. 그 웃음이 너무 해맑다. 사클리켄트에서 내가 받은 마지막 선물은 그 꼬마의 아름다운 미소였다.

▲아이의 미소가 사랑스럽다. ⓒ 김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