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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정확하게 20년 전이었다. 군사정권의 칼날 같은 획일화에 맞서 '다름'을 외치는 움직임이 있었다. '국민'이란 이름표를 달고 국가가 시키는 그대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때, "왜 그쪽으로만 가나. 이쪽으론 왜 안 가나"라고 질문하던 사람들….

조형(이화여대 사회학), 조은(동국대 사회학), 조옥라(서강대 사회학), 장필화(이화여대 대학원장), 정진경(충북대 사회학) 교수, 故 고정희 시인, 그리고 조한혜정 교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여성학의 가치를 공유하며 동인 형태로 모인 그들은 이후 출판사를 설립하고 각종 문화행사를 열면서 '여성도 함께 자유롭게 사는 세상'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왔다.

조한혜정 교수는 오는 10월 30일 신촌 아트레온갤러리에서 열리는 '또문'의 20주년 기념행사를 담담하게 준비하고 있다. '또문'이 이뤄낸 성과를 돌아볼 시기가 아닐까.

"'또문'이 없었다면 '대장금'이나 '아일랜드' 같은 드라마가 나왔을까요?(웃음) 여성주의나 다원주의를 일상적인 운동으로 이끈 게 성과겠죠. 대한민국 인구의 몇%밖에 안 되는 목소리지만, 다양하게 훈련하고 실험해왔기 때문에 미래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부장제의 문제점에 대한 학문과 이론을 일상적으로 풀어내고 익혀내 대안을 마련하는 것.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욕도 먹는다. '또문'이 중산층 엘리트 여성집단의 틀에 갇혀 '현장성'이 부족하다는 것. 조한 교수도 고개를 끄덕인다.

"예, '지식인' 운동이죠. 근데 '지식인'을 어떻게 볼 거냐. 그게 중요하죠. 학교나 학력이 '지식인'의 조건은 아니거든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언어화 할 수 있는 사람들, 그게 '지식인'이거든요. '또문'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그런 의미의 '지식인'이죠."

지식인으로서, 사회학자로서, 여성학자로서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현 정권의 국정과제가 양성평등의 사회이고 여성의원도 39명이나 나왔으니 그럭저럭 괜찮아진 걸까. 조한 교수는 "문화산업의 '억센 흐름' 때문에 욕망이 '제조'되고 있어 문제"라고 진단한다.

"억압된 욕망을 풀어주는 게 페미니즘이잖아요. '당당한 여성'이라는 기치도 그런 의미이고. 근데 요즘엔 욕망이 너무 많아요. 페미니즘조차 상업적인 문화산업에 포섭되고 있어요."

무슨 얘긴가. 조한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놀고 즐기며 배우는 대안교육의 장)'의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영화 공부하는 녀석이 있는데요. 대뜸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행복한 거냐?'라고 묻더군요. 그것만 행복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욕망이 너무 많은 거예요. 연애도 하고 싶고,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좋아하는 거 한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고. 불안한 거죠. 외로운 거죠."

문화산업은 끝없이 욕망을 생산해낸다. 그 욕망을 조금이라도 더 소비해야만 살아남는 무한경쟁사회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보수화' 되어 간다. '먹고살기 위함'이란 말 하나면 족하다. 그것처럼 확실한 명분이 없다.

"확실히 보수화됐죠. 학교에서 학생들 보면 그래요. 근데 섣부르게 판단할 문제는 아닌 거 같아요. 1970∼80년대 변혁의 분위기도 조직화된 운동의 결과였잖아요. 그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죠. 20년 동안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다양성을 외쳤건만, 글쎄요…. 개인과 구조를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열정을 품고 살아가는 젊은이가 많은 세상, 그게 좋은 세상인 것 같아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한 교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하자'를 운영하는 이유는 사람처럼 못 살고 있는 학생들이 배움의 재미와 놀이의 의미를 동시에 느끼며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함이다.

"고교등급제로 또 시끄러워요. 도대체 뭔 짓인지 모르겠어요. 거기서 거기인 교육 관련법과 규정을 바꾸면 뭐해요. 바꿔도 안 바꾼 건데. 서열중심, 획일주의 등이 존재하는 한, 무서운 교육현장은 안 변해요. '다르게 산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한, 안 변하죠."

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그것이 학생들의 보증수표가 되는 현실…. 조한 교수는 그러한 현실에 등을 돌렸다. 이게 무슨 교육자답지 않은 행동인가.

"100명의 학생들만 있는 학교를 만들어야 해요. 학교 주변에 가정이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거예요. 공동육아, 공동교육 저절로 되요. 부모도 선생님이에요. 좋은 부모처럼 좋은 스승은 없죠. 페미니즘도 교육해야죠. 엄마들이 지주보다 못된 '마름'이 되겠어요? 가부장 이데올로기를 세뇌하고 대물림하는 '마름' 같은 엄마는 자녀에게 좋은 미래를 물려주지 못하겠죠?"

당당하게 반문할 자격은 있어 보인다. 조한 교수의 자녀들이 그걸 증명하니까. 딸은 인도 유학을 마치고 요가와 디자이너 일을 하고 있고, 아들은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을 꾸준하게 계속하며 사회의 '밀알'이 되고 있다. 엄마의 능력만은 아닐 터. 아빠도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유학 갔을 때 만난 재일교포예요. 여러 면에서 일본이 우리보다 15년 정도 빠르잖아요. 그래서 저랑 페이스가 맞았어요. 연애 초기에는 많이 배웠죠. 여행에서 태극기 흔들며 사진 찍는 나의 무의식적인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꼬집어 줬으니까요(웃음). 지금은 뭐, 적당히 포기하고 살아요. 60대 교수가 저같이 급진적인 아내를 다 이해하긴 힘들겠죠?(웃음)"

'또문'이 걸어온 20년. 몇 년을 더 걸어가면, 조한혜정 교수처럼 사는 사람이 '대안'이 아닌 '일반'이 되는 세상이 될까. 그 세상을 '또문'과 '하자'가 조금씩, 천천히 만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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