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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8.08 13:51최종 업데이트 03.08.18 10:17

일본 땅, 대마도서 만난 여수 내 고향 (I)

"영락없이 여수 안도리 포구구먼”

부산서 대마도를 왕복하는 공기부양 쾌속선 시-플라워의 모습. 약 1시간 반이 소요된다.
부산서 대마도를 왕복하는 공기부양 쾌속선 시-플라워의 모습. 약 1시간 반이 소요된다. ⓒ 김중균
지난 2일 필자는 (사)여수지역사회연구소의 부설 기구인 매영답사회의 제 52차 답사단을 따라 일본 대마도(對馬島)를 답사하였다.

매영답사회는 회가 설립된 1996년 이래 매년 약 7회 정도의 국내외 역사 탐방을 하고 있다.

이번 ‘잃어버린 우리 땅 -대마도’ 주제 하의 역사 탐방도, 대마도 지역의 역사 유적을 둘러보고, 매년 8월 첫 일요일에 행해지고 있는 아리랑 축제에 참가하는 것이 이번 답사의 목적이다.

일제는 러일 전쟁 시 발틱함대를 공격하기위하여, 폭 40~ 65m로 그리고 길이 210m로 운하를 똟고, 그 운하 위에  萬關橋 철교를 세웠다.
일제는 러일 전쟁 시 발틱함대를 공격하기위하여, 폭 40~ 65m로 그리고 길이 210m로 운하를 똟고, 그 운하 위에 萬關橋 철교를 세웠다. ⓒ 대마 관광 물산협회
나는 만관교(萬關橋) 등의 답사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군국주의)의 최첨단 병참 기지였던 대다도의 어두운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이 자연스레 가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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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관교는 일제가 러일 전쟁 임박하여, 폭 40~ 65m 길이 210m로 뚫은 운하 위에 세워진 철교이다.

일제는 1904년 2월 8일 개전 된 러일 전쟁 중 만관교 밑 운하에 수많은 군함을 숨겨두고, 영국의 수에즈 운하 통과 거부로 희망봉을 돌아오느라 지칠대로 지친, 러시아 발틱 함대를 대한 해협에서 협공하여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그로 인해 한반도에서의 정치, 군사, 경제 상의 권리를 인정받게 된 (러시아와의) 포츠머드 조약이 체결되었고(1905년 9월),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게 되었으며,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을 맺어 한반도에서의 정치, 경제, 군사 상의 특수 이익을 세계 열강으로부터 보장받았다.

그러나 나는 이번 답사를 통해 우리와 거의 다르지 않는 대마도 민초들의 소박한 인정을 남다르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마도에 온 것이 아니라 여수 내 고향에 온 것이었다.

고향 여수와 거의 다르지 않는 식생, 거의 동일한 외모, 소박한 인정, 남을 배려하는 마음 씀씀이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 환경은 내 마음 속의 향수를 잠재우기에 충분하였다. 즉 일본을 둘러보러 나갔는데 내 앞에는 고향 여수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먹고 자란 가지, 고추, 호박, 오이, 토란 그리고 도라지 등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자귀나무, 능소화 등 한국에 있는 나무들이 이곳에도 있었다.
자귀나무, 능소화 등 한국에 있는 나무들이 이곳에도 있었다. ⓒ 김중균
자귀나무, 능소화, 동백 나무, 소나무, 무궁화 나무 등 고향 여수에 널부러져 있는 나무 들도 이곳에 널부러져 있었다. 또한 나리, 달맞이 꽃, 닭의 장풀 등 여수 고향에 널부러져 있는 야생화들도 똑같이 있었다.

철썩거리는 파도소리, 동력선의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 그곳 산물인 가리비 조개, 소라, 멸치 그리고 아지 등은 영락없이 여수 남산동 시장을 연상시켰다.

세종(1419년) 때의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 8대 도주(宗貞盛)로부터 항복을 받았던 대선월(大船越)의 포구에서는 여수 안도 섬의 안도리 포구에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옆에서 이야기하는 후배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락없이 여수 안도리 포구구먼.”

그렇다. 이 곳은 고향 포구이었다.

나는 직장이 있는 천안에서 대마도를 간 것이 아니라, 여수 고향을 온 것이었다. 그러나 내 가슴 속을 한 줄기 바람이 휑하고 지나가는 느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곳의 민초는 바로 우리였다.

그곳의 야생화도 바로 우리였다.

미국 원폭이 온 세계를 초토화시킨 8월
나는
조선 해협을 건너
萬關橋(만관교) 지나
大船越(대선월), 小船越(소선월)로
나를 찾아간다.
신라인, 가야인 되어

그곳서
나는
나를 보았다.
찌그러진 양은 냄비같은
나를 보았다.
나는 나였다.
쓰시마 섬의 이웃도 보았다.
그도 나였다.
우리는 모두 선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자전거를 타는 소학교 학생도,
기노모 복장의 여학생도 모두 나였다.

쓰시마 섬을
붉게
물들인
자귀나무도
나였다.

뺨이 붉으레한
참나리도
나였다.

붉은 열정의
유두화도
나였다.

보랏빛
꿈을 잃지 않고 있는
도라지 꽃도
나였다.

그러나
萬關橋(만관교)에는
내가 없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이 없었다.

그곳에는
총칼만 있었다.
토마호크 미사일만 있었다.
이지스 함만 있었다.

大船越(대선월)에는
내가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

小船越(소선월)에는
내가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

百濟人(백제인)이 있었다.
新羅人(신라인)이 있었다.
伽倻人(가야인)이 있었다.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가라’

모두 선한 사마리아 인이었다.

[졸시 萬關橋(만관교)를 지나며(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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