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전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84호인 벽류정은 도내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힌다.
전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84호인 벽류정은 도내에서도 절경으로 손꼽힌다. ⓒ 안인호

저녁 무렵에 봄비라도 내리려는 모양인지 동쪽 하늘이 찌뿌드드하다. 구름에 가린 태양은 쉬이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하늘아래 땅도 황사먼지를 뒤집어쓴 채 뿌옇다. 자연의 섭리가 이런걸 게다. 비오고, 눈 내리고, 어떤 날은 맑다가 흐려지고, 또 잔뜩 흐리다가도 어느새 맑은 햇살을 내놓는…. 이런 자연의 섭리 앞에선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도 순응하는 것밖엔 달리 도리가 없다.

고루한 말 같지만 삶은 어쩌면 먼저 길을 나선 선인들의 발자국을 더듬어 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마치 바닥이 닳고닳은 신발처럼 지치고 헤져간다. 모든 생명은 병들고, 늙는다는 것. 그리고 반드시 죽는다는 고정불변의 법칙을 알기에 우리는 가끔씩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위안을 찾는다.

그 위안의 장소가 자연이다. 흙에서 나서 다시 한줌 흙으로 돌아가듯, 자연만큼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최적의 대상은 없으리라.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바라보는 자연은 언제나 우리에겐 경외의 대상일 것이다.

AD
돌계단을 오르는 동안 대숲에서 들려오는 댓잎 부딪치는 소리, 쏴아하 물 흐르는 소리가 청명하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니 확 트인 시야로 들어오는 벌판이 푸른빛으로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마치 산중턱에 앉아서 세상을 굽어보는 기분이다.

절경을 자랑하는 정자문화의 명소,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벽류마을. 이름 그대로 '물빛이 푸르게 보일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른다'는 벽류정을 찾아왔다. 누정 바로 아래 영산강의 지류(支流)인 금천(錦川)이 30여m의 폭으로 흐른다. 그 위에 지난 84년 준공된 교산리 발산마을을 건너가는 벽류교가 놓여있다.

예전 금천은 강폭이 50여m에 이르고 강바닥에는 모래가 깔려 있어 메기, 잉어, 자라 등 물고기를 잡거나 첨벙거리며 물장구치던 동네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벽류정을 지나 2㎞쯤 흘러내린 금천은 오봉리와 송제리의 경계지점에서 나주지역 영산강의 대표적인 지류중 하나인 만봉천과 합류한다.

벽류정(碧流亭)은 자그마한 석산(石山)을 깎아 만든 듯 높다랗게 3층의 석대 위에 세워진 단층 팔작 골기와 건물로 정면3칸 측면3칸에 중재실(中齋室)을 갖춘 단아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뒤편에 7천여평의 대밭이 펼쳐져 있고 느티나무, 팽나무 등 즐비한 교목(喬木)들이 수백년의 수령을 자랑하며 정자를 에워싸는 형국이다. 또 오른쪽에 양달산, 앞쪽에는 성덕산이 낮지만 길게 늘어져 논밭과 맞닿아 있어 운치를 더한다.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가히 정자문화의 대표적인 명소로 꼽힐만한 절경이다.

벽류정(碧流亭)은 지난 92년 11월 30일자로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84호로 지정돼 광산 김씨(光山金氏) 문중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원래 이곳은 세종 때 호조참판이었던 청계 조주(趙注)의 동정(東亭)이라는 별서 터였는데, 그의 외손인 김운해(金運海)가 양여받아 1640년(인조 18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인(武人)의 꼿꼿한 기개

김운해(1577∼1646)는 경남(景南)의 아들이며 조주의 외손으로 32세에 무과에 급제, 김해부사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2) 이괄의 난 때 어가(御駕)를 모시고 공주에 내려갔고, 병자호란 때에는 남한산성에서 호전(戶典)에 관한 일을 맡은 공으로 전마와 갑옷 등을 하사 받았다. 특히 무인으로서 김운해의 기개는 오늘날 되새겨볼 가치가 충분하다.

예서·행서·초서에 두루 능한 황사(黃史) 민규호(閔奎鎬)의 현판글씨.
예서·행서·초서에 두루 능한 황사(黃史) 민규호(閔奎鎬)의 현판글씨. ⓒ 안인호
인조 17년 문정공(文正公)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청의 출병요구를 반대했다. 이로 인해 문정공(文正公)은 청에 끌려갔다 갖은 고초를 겪고 6년만에 풀려나 평북 의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평소 문정공(文正公)의 우국충정을 숭모하던 김운해은 60세의 고령임에도 수천리 걸어 그곳까지 찾아가 의기(義氣)와 지절(志絶)을 보여주는 시구(詩句)를 남겼다.

寧爲蘇武苦 莫作李陵之榮(영위소무고 막작이릉지영)
소무의 고통을 당할지언정 이릉의 영화는 누리지 말라

※주 - 한(漢)나라 때 흉노족에게 인질로 잡힌 소무(蘇武)는 흉노의 온갖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끝내 변절하지 않는다. 이에 흉노는 소무(蘇武)를 추운 북방의 오지로 보내 양을 치며 일생을 마치도록 연금(軟禁)하게 된다. 당시 이미 흉노에게 변절했던 이릉(李陵)은 흉노의 부탁으로 소무(蘇武)를 찾아가 전향(轉向)을 종용하나 소무(蘇武)는 단호히 거절하고 양치기로 생을 마감한다.

벽류정(碧流亭) 내에는 문정공(文正公)의 아들인 김수항(金壽恒:1629∼1689)의 벽류정 중수기(碧樓亭重修記)를 비롯해 황사(黃史) 민규호(閔奎鎬)와 위당(威堂) 신헌(申櫶)의 현판, 후손들의 시문(詩文)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벽류정- 1640년에 건립된 벽류정은 1678년(숙종 4년)과 1862년(철종 13년)에 각기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벽류정- 1640년에 건립된 벽류정은 1678년(숙종 4년)과 1862년(철종 13년)에 각기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안인호


碧水南來向北流(벽수남래향북류)
重逢壬戌續淸遊(중봉임술속청유)
聖世靑雲金海跡(성세청운김해적)
良宵皓月玉峰頭(양소호월옥봉두)
喬木生花鶯伴比(교목생화앵반비)
 篁有實鳳雙留(소황유실봉쌍유)
前代風聲所不墜(전대풍성소불추)
每從林下讀春秋(매종임하독춘추)
-八世孫 楨龍(팔세손 정용)-
푸르도록 맑은 물이 남에서 북으로 흘러가니
임술년을 다시 맞아 맑은데서 즐겼도다
어진 聖朝섬기면서 김해부사 역임하고
옥봉 아름다운 달빛 그리면서 깊은 밤을 보냈도다
꽃이 핀 교목 위에 휘파람새 짝을 찾아 날아들고
열매 맺은 대나무숲으로 봉황이 쌍으로 모여든다
지난 시절 그 바람소리 아직까지 이어지니
맑은 숲속 찾아가서 춘추책을 읽었도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