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전쟁이다. 불그레하고 샛노란 꽃들이 산천을 뒤흔든다. 양지바른 개울물 속, 개구리의 알들이 부화를 꿈꾸며 한데 엉켜 있다. 그토록 차가웠던 겨울의 기운은 푸른 빛깔 속으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쩌랴! 이 따스한 봄날, 정작 중동의 모래사막은 전쟁의 폭풍이 휩쓸고 있다. TV 속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의 겁에 질린 검은 눈망울이 슬픔에 젖어 지축을 흔든다. 갑자기 얼음장같은 전율이 엄습해 대지(大地)를 뚫고 나오는 온갖 생명들을 움츠리게 한다. 정녕 이 자연의 법칙에서 힘없고 연약한 생명들은 소멸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힘의 논리가 마치 진리처럼 세상의 가치를 지배하는 현 세태에서 정한(靜閑) 이치를 깨우치며 살아가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아직 이들이 살아 있다면, 대쪽같은 정신이라도 살아 있다면 세상은 좀더 희망을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고즈넉한 금사정에서 바라본 벌판은 푸른 봄빛을 깨물고 있네. 저 벌판 사이를 흐르는 영산강 줄기에서 5백여년 전 11명의 선비들은 배를 띄어 놓고 시를 노래했으리라. ⓒ 안인호
왼편에 왕대나무, 오른편으로는 시누대숲이 누정(樓亭)을 둥그렇게 감싸고 돌계단을 오르는 중앙에는 둘레가 2미터 넘고 수령만도 450여년에 달하는 동백나무 한 그루가 수호신처럼 턱하니 버티고 서 있다. 나주시 왕곡면 송죽1리. 금사정(錦社亭)의 전경이다.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 하여 '거북바깥'이라는 뜻으로 한때 외구(外龜)마을로도 불렸던 송죽리. 마을 산들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절묘하게 어울려 있다. 누가 굳이 나서서 마을어원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아도 금방 알아차릴 만하다. 예전에 '대나무 팔아 자식농사 다 지었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난다.
세상의 불의를 거부하고

▲금사정 ⓒ 안인호
현재 금사정은 사료가 부실해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세마(洗馬) 김만영(金萬英)이 1665년에 쓴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契序)의 기록에 의하면 그해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869년 재중수를 거쳤으며 현재 금사정의 모습은 1973년 옛 모습을 찾아 다시 한번 중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十載經營屋數椽(십재경영옥수연)
錦江之上月峰前(금강지상월봉전)
桃花浥露紅浮水(도화읍로홍부수)
柳絮飄風白滿船(유서표풍백만선)
石逕歸僧山影外(석경귀승산영외)
烟沙眠鷺雨聲邊(연사면로우성변)
若令摩詰遊於此(약령마힐유어차)
不必當年畵輞川(불필당년화망천)
십년을 공들여 얽어놓은 집이
금강에 달이 뜨는 봉우리 아래 있네
복사꽃 이슬에 젖어 물위 분홍빛으로 아롱이고
버들강아지 바람에 날려 배 안에 가득 하네
산그림자 드리워진 험한 길 스님이 절을 찾아가고
안개 자욱한 모래톱에 해오라기 졸고 있구나
만약 摩詰로 하여금 이곳에서 노닐게 하였더라면
당년에 輞川圖를 그릴 필요 없었을 것을
〈금강정(錦江亭)-정문손 鄭文孫)
■주-摩詰은 唐대 명시인 王維(왕유)의 字이고, 그가 그렸다고 하는 輞川圖(망천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금사정은 조선 중종14년(1519년)에 남곤, 홍경주, 심정 등 훈구파의 모함으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사림파 신진세력 70여명이 화를 당한 기묘사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시 조광조(조광조)를 따르던 임붕, 정문손, 김두, 김식, 나일손, 진이손, 진삼손, 정호, 김구, 김안복, 진세공 등 나주출신 태학관(太學館)유생 11명은 이들의 구명을 위해 태학관 유생 200여명의 호응을 얻어 집단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중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즉시 귀향해 영산강가에 아옥(芽屋)을 짓고 금강계(錦江契)를 조직했다.
희미하게 남은 선비정신

▲나주시가 지난 87년 5월 보호수로 지정한 이 동백나무는 나무둘레가 2미터가 넘고 수령만도 450여년에 달한다. ⓒ 안인호
귀향한 11명 가운데 한 사람인 정문손이 기묘사화 이전의 태학관 유생 시절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詩)에 나타나 있듯 금사정은 이들이 낙향하고 10여년이 지난 1520년대말, 또는 1530년대초쯤 건립됐으며 1869년 중수전까지는 '금강정'(錦江亭)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존심양성 강의명리 (存心養性 講義明理)
스스로 자기수양을 갈고 닦으며 세상의 이치를 논한다
이 여덟 글자는 성리학의 사림파였던 이들이 계를 조직한 후 함께 학문을 익히는 동안 금사정 벽면에 걸어두었던 문구이다. 성리학은 심성의 수양을 과거 어느 유학보다도 철저히 하면서 규범, 법칙 등 자연법칙으로서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며 완전하게 실현하려는 학문이라고 할 것이다.
정한 이치를 제쳐두고 변질되고 그릇된 이치가 진리인양 거기에 맞춰 세상이 돌아갈 때, 단호히 '이것은 아니다'라며 거부하고 바로 잡으려 하는 자(者). 무릇 선비란 이런 게 아닐까. 500여년전 금사정에 머문 금강계 11인은 그렇게 행동으로 실천했다.
아쉽게도 현재 금사정은 창건 당시의 정기(亭記), 상량문(上樑文), 제영(題詠) 등이 전해지지 않다. 잦은 병란(兵亂)으로 소실된 것이다. 다만 김만영이 지은 '강중수계서'와 1869년 중건 당시 생원 나동륜(羅東綸)이 쓴 '금사정중수상량문'(錦社亭重修上樑文), 정문손의 '금강정'이라는 시 한수가 전해져 올뿐이다. 또 금강계도 오랜 기간 중단되거나 근근히 유지해오다 현재는 나주(羅州) 나씨와 당악(唐岳) 김씨의 후손들만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꼿꼿했던 선비들의 기개가 후손들의 기억 저편에서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