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기자는 이 공간에 '황석영,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깝다'는 기사를 올렸다. 곧바로 열화와 같은 반응이 있었다. 대부분이 비난이었다. "이런 기사가 조선일보 기사보다 나은 게 뭐냐", "우리가 노벨문학상에 환장했냐"는 등의 반응이었다. 결국 기사의 삭제를 요청했다. 사실 기교상의 문제로 말하고 싶어했던 중심 생각에 생채기를 내기 싫어서다.
그로부터 시간이 좀 흐른 지금, 기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다시 이야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황석영의 문학적 성취가 한국 소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 물론 전 기사의 삭제와 지금 사이에 작가가 대산문학상 소설 부분을 수상했다는 것이 그 한 방증이 되겠다.
기자는 평론가는 아니지만 그의 근작 '손님'을 읽고 놀랐다. 아무 것에도 거치지 않는 생각의 비상과 튼튼한 구조에 놀랐다. 그후 나는 우리가 이데올로기의 망령에서 벗어나 세계문학계에 우리 작품을 서서히 올려야 하지 않느냐는 욕심이 발동했다. 그것이 이 기사를 쓰는 동기다.
'오래된 정원'에서의 실망과...
그 전에 '오래된 정원'을 읽고 실망했던 전력이 있기에 그의 작품을 손에 드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 등 역사와 개인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자연 등 본연적인 것들과의 숨고르기, 남녀나 부모자식간의 관계 등 상당 부분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한윤희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이데올로기 시대의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그리고 오현우로 대변되는 가장 직접적인 적대세력이었던 전두환 정권과의 대결 구도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소설의 주된 흐름에서 서서히 이탈한다.
그 이탈을 이끄는 것은 오현우가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자아와의 대화들 때문이기도 하고, 독일통일이나 소련의 붕괴 등 외부적인 요소가 있기도 하다. 물론은 너무나 명확했던 군사정권이 직선제라는 이상한 터울을 통해 모양을 바꾸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또 다른 축, 한윤희가 겪는 삶을 통해 주로 구현되는 개인으로서의 자신과의 대화는 작가 자신을 성찰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를 썼다. 투쟁의 언저리는 거쳐 있지만 본질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바탕으로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 이 흐름은 후반에 이희수라는 환경공학도를 통해 형상화된다. 물론 그런 시도는 그다지 심도있거나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설적 자아에게 그런 시도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사상적 진로를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척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자신의 전반기를 정리하는 글이라는 부언을 하며 쓴 이 글에서 이전에 비해 상당히 유화된 자신을 보여준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중심이 한윤희에게 가는 것은 물론이고 오현우도 자기 사상의 거처를 찾기보다는 마음의 유토피아를 찾는 것이 뚜렷하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질문은 해석하기가 이미 타락할 때로 타락해서 천민자본주의로 세상을 놓고 던지는 탄식일 수도 있고, 꿈을 잃은 사회주의자의 절망의 탄식일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주된 흐름이 주는 느낌은 후자에 가까운 느낌이다. 그런 느낌을 확인하게 하는 것이 그가 그리는 이상향의 모델로 주로 히말라야 설산에 있는 낙원 등 무릉도원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에 대한 냉소와 불교의 윤회 등 운명론에 가까운 흐름에 대한 인정도 그런 판단을 가속시킨다. 오현우가 감옥에 있을 때, 현장을 누비던 송영태가 북한을 다녀온 후 블라디보스톡에서 실종되어 버린 것은 이런 면을 눈에 띄게 한다.
물론 그는 혁명에 대한 약간의 열정을 보이지만 책의 주조는 분명히 비관론에 가까운 유토피아 옹호로 흐른다. 또한 현체제나 자신이 직접 챙겼던 북한에 대한 의도적인 기피는 사상에 대한 자신의 혼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기자는 "결국 독자들은 70년 이후 가장 문제적인 한 작가를 잃고,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한 교도된 원로를 만나야할지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
인간의 서사로 찾아내는 이야기
하지만 이런 비관은 '손님'을 읽는 순간 대부분 씻겼다. 그것은 독자로서 작가가 넘어설 수 있는 거대한 선을 넘은 것 같다는 경탄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탄은 우리 문학이 넘어가야 할 큰 고비를 넘은 것이 아닌가 하는 감탄 때문이다.
'손님'에서 황석영은 우리 문단이 보여주지 못한 강한 힘을 느끼게 하고 있다. 그런 이유는 다른 이유보다는 그가 문학적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 감옥생활은 물론이고, 외국생활 등을 거치면서 얻어낸 삶의 영감이 문학을 통해 표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그에게 세계적인 작가로의 도약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에게는 한 줄의 글조차도 버리지 않으려는 샤먼적인 집념이 불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기자가 98년 가을 임진각 근처에서 벌어진 '한겨레 통일굿'에 참석한 그를 본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 강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고향을 그리는 이북 만신들이 이 통일기원굿에 그들이 그리는 땅을 다녀온 황석영은 박수와 같은 역할을 했다.
먼 발치에서 취재하면서 스친 그였지만 그에게 어느 정도 신이 내렸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가 하는 샤먼의 기능은 개개인의 넋을 불러내 씻김을 하는 만신으로의 기능보다는 원한에 가득찬 역사와 망향의 정에 몸부림치는 이들의 혼을 문학을 통해 달래는 기능이었다.
소설 '손님'은 박수(남자 무당)적인 그의 기질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또 한국 문학사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수 있는 소설이다. 그는 진정한 작가로 귀환했다. 그 귀환은 막연한 돌아옴이 아닌 확실한 신념속에서 소설가로 귀환했다.
신념이란 우리 안에 있는 서사의 정체를 향한 회귀다. 그 기운은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우리 민족들이 가진 보편성으로의 귀환이다. 그 보편이란 권력이 민초들을 억압할 때 맞서는 저항, 자연 등 본연적인 외부요소들과의 조화, 남녀나 부모자식간의 사랑 등은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화두였던 이데올로기 등과의 달래기다. 전자를 위한 작업은
오래된 정원에서 했다면 후자인 이데올로기와의 화해작업은
손님의 몫이었다.
그는
기독교와
막시즘이라는 두 이역 '손님'으로 인해 잔인하게 오갔던 피의 살육과 그 복수전의 씻김을 벌인다. 그가 몰두하는 것은 기독교도 사회주의도 아닌 우리 민족의 해원(解寃)과정이다. 그 해원의 방식은 12거리 구성인 황해도 지노귀굿과 같은 형식도 형식이지만 혼들과 이야기를 통해 풀어가는 샤먼의 화법이다.
그래서 소설 내내 요섭은 물론이고 요한, 성만 등은 사자들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귀신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반박하기 위해서나 위로해주기 위해서가 아닌 그들을 위로해주기 위해서다. 물론 그 위로도 귀신들 스스로가 받는 것이다.
번역돼도 그 힘이 남아있지 않을까
우리의 소중한 문학들이 세계로 나가는데 거쳐야 할 가장 큰 과제가 번역이다. 황석영의 문학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래된 정원'이나 '손님'을 그리는 세계가 외국어로 번역되었을 때, 어떤 느낌을 줄 수 있을까. 기자는 그의 작품은 지구상 어디에서 읽어도 그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름 아니라 황석영이 소설의 메인이 설정한 것은 인간이 오랫동안 준비해오던 서사이기 때문이다. 그 서사는 문학의 깊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시베리아 원주민에게서도 느낄 수 있고, 인도에서도 느낄 수 있고, 미국에 있는 원주민들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최근 방한해서 강연한 르 클레지오도 밝혔지만 문학은 사회와 끊임없는 불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긴장과 더불어 감동을 주는 예술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도 황석영의 문학세계나 삶의 역정은 벗어나 있지 않다. 그런 느낌이 기자를 어떤 기대섞인 흥분에 젖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