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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05 20:30최종 업데이트 01.11.12 16:04

바위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님

<문화유적답사 5> '백제의 얼굴' 서산 마애삼존불

답사를 좋아하는 역마살 낀 이들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마음먹는 곳, 그곳 중 하나가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 깊숙이 자리잡은 '서산 마애삼존불'이 아닐까.

마애삼존불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바위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님'이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는 여느 마애불들과는 달리 그 미소가 하도 신비하고, 다른 데서는 느끼기 어려운 친근함과 천진함이 느껴지기에 내포땅을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애삼존불로 가기 위해서는 근처 보원사터가 있는 쪽으로부터 흘러오는 개울을 건너야 한다. 작은 다리를 건너 산 비탈을 따라 난 계단을 오르면 잠시 후 암자가 하나 보이며 길은 왼쪽으로 꺾이게 된다. 다시 길을 재촉해 산을 오르다 보면 오솔길 왼쪽으로 작은 비로자나불을 볼 수 있는데, 마침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이들이 불상 앞에 과일 몇 개와 떡을 발상 앞에 조촐하게 차려놓고 무엇을 비는지 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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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걸 뒷켠에서 잠시 지켜보다가 다시 계단을 오르니 가파른 계단 위로 이내 전각이 보이는데, '서산 마애삼존불'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옳게 찾아온 모양이구나 하며 땀을 훔친다.

그런데 전각 안에서 웅성웅성하는 사람 소리가 들린다. 살짝 다가가 들여다보니 관리인으로 보이는 이가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긴 장대에 매단 전구를 이리저리 비춰가며 굵은 음성으로 삼존불의 내력과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빛을 어느 방향에서 비추는가에 따라 미소가 천진하게도 혹은 너그럽게도 어쩔 땐 다소 무섭게도 보임을 강조하면서.

물론 1965년 8월 지금의 전각이 세워지기 전까지 서산 마애불을 세상과 차단한 구조물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국보 유지를 위해 전각을 세웠다고 하며, 따라서 삼존불을 보기 위해서는 부득불 전구를 이용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전구 불빛이 아니라 자연광에 의한 시간에 따른 미소의 변화를 직접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에서는 그 신비한 미소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미처 볼 수 없었던 특이한 불상 배치도 볼 수 있다. 가운데 본존불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보주(寶珠)를 든 불상이, 그 반대쪽 왼쪽으로는 한 다리를 다른 다리에 포개어 앉은 반가상이 있어, 마치 동시대에 한 번에 조각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보통 6세기 말엽의 백제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에서도 삼존불 형식은 자주 만들어지는 형식이었으나, 대개 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고려할 때, 서산 마애삼존불의 불상 배치에는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미소와 함께 답사자의 눈에 들어오는 것 중 하나가 가운데 본존불의 광배와 수인일 것이다. 불상의 머리나 몸통 뒤쪽에 있는 원형이나 배 모양의 구조물이 있는데 이 같은 구조물을 광배라 부른다.

특히 일반 원형 광배와는 달리 서산 마애불의 그것처럼 위로 솟아오르는 불꽃 형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보주형 광배라 부른다. 이는 부처에서 발산되는 빛을 상징형으로 나타낸 것으로, 부처가 발산하는 빛은 그 자체로서 진리와 지혜, 그리고 깨달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존불의 수인은 시무외 여원인(施無畏 與願印)으로, 수인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부처나 보살이 수행할 때 스스로의 이루고자 하는 뜻을 손 모양으로 나타낸 것을 뜻하는데, 시무외인과 여원인, 항마촉지인, 선정인 등 그 종류가 무수히 많다.

특히 서산 마애불이 취하고 있는 수인 중 오른손에서 나타나는 시무외인은 부처가 중생들로 하여금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고 고난을 해소시키는 자비의 인이며, 왼손의 여원인은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덕을 표현한 인이다. 이들 시무외인과 여원인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불상들이 그 종류에 상관없이 대부분 취하고 있는 수인으로 둘을 합쳐 통인(通印)이라고 한다.

물론 불상 답사시 이러한 형식들을 하나하나 따지기보다는 그 당시 사람들이 왜 이런 불상을 가파른 바위 벽에 새겨 넣게 되었고,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보고 경외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일 것이다.

예컨대 6세기 말엽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과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로 인해 중국과 통하는 바닷길을 찾을 수 없었던 백제가 태안반도를 통해 중국과 교역했다고 가정할 수 있을 테고, 따라서 웅진이나 사비에서 태안반도로 통하는 길목에 서산이 놓이게 되어 이 길의 중요성이 커졌을 테니 부처님을 모실 만한 구실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목수현)

특히 중국 돈황이나 저 멀리 인도와는 달리 화강암이 많은 탓에 굴을 파고 불상을 모실 수 없던 처지인지라 이처럼 딱딱한 화강암에 불상을 새겨 넣음으로써 불심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959년 4월에 이르러서야 유물 조사차 보원사터를 조사하러 왔던 홍사준 선생에 의해 세상에 알려진, 이 시대로의 환생이 다소 늦은감이 없지 않은 '백제의 얼굴' 서산 마애불은, 내포 땅에서 지난 번의 개심사와 함께 답사하기 좋아 당일치기 코스로도 매력적이랄 수 있겠다.

특히 이제 점점 아침 저녁으로 추운 날씨가 계속되면서 몸도 마음도 차츰 굳어가고 있는데, 여유를 조금 부려 내포 땅을 찾아 '백제의 미소'를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옷깃 사이로 들어오는 한기를 잠시나마 떨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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