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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1.03 18:06최종 업데이트 01.11.05 12:01

11번째 보름달 뜨는날 소원 빌면

태국의 11월 한가위 '로이 크라통 축제'

▲ 이 아름다운 크라통에는 만든 이의 삶의 고통과 희망이 함께 스며들어 있을 것이다. ⓒ 정나원


매년 열 한번 째 보름달이 뜨는 날, 태국에서는 잠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이날 태국 사람들은 이른 저녁부터 식구대로 웬 동그란 통을 들고 강가로 몰려간다. 꼭 강가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집 근처를 흐르는 개울이나 조그만 공원의 연못,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괜찮다.

정 사정이 여의치 못하면 동네 수영장에라도 간다. 물가에 도착하면 잠깐 기도를 하고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조심조심 물 위에 띄워 보낸다. 그러는 사이 여기저기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죽이 터지고 하늘에서는 달빛이 무색할 정도의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 왕궁 건너편에 있는 아룬사원, 우리말로는 새벽사원이라고 한다. 17세기 톰부리 왕조 때 지어졌으며 사원 이름은 힌두교의 새벽의 신 아루나에서 따 온 것이다. ⓒ 정나원
한 쪽에선 강에 배를 띄우고 한판 술잔치가 벌어지고, 다른 무대에서는 미인 선발대회가 열린다. 도시고 시골이고 할 것 없이 이 날은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시끌법적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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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에서는 이 축제를 즐기러 이웃나라 사람들까지 몰려 오는 통에 차오프라야 강가의 호텔과 레스토랑들은 이미 수 개월 전부터 예약이 돼 있다. 일반 주택가에서도 밤새 폭죽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대체 이 날이 뭔 날이길래 그 해 처음 뜨는 보름달도 아니고 열한 번째 달을 보고 저리 법석을 떠는 걸까? 또 대체 뭘 띄워 보내는 걸까?

▲ 크라통을 띄우기 전에 소원을 빈다. 강가에 나온 이들의 절반 이상이 젊은이들이었다. ⓒ 정나원
크라통이다. 나무밑둥처럼 생긴 동그란 판 가장자리를 먼저 바나나 나뭇잎으로 두른 다음 그 위에 조그만 촛불 하나 향불 하나를 꽂고 그 사이사이에 난꽃 이파리를 얹어 마무리한 일종의 꽃꽂이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모양새도 가지가지지만 원래의 생김새는 활짝 피기 전의 연꽃을 닮았다.

여기에 그 간에 지은 죄와 어쩔 수 없이 당한 불운을 함께 실어 ‘물에 띄워 보내며’ 새 해에는 행운이 오기를 기원한다. 이를 태국말로는 로이 크라통(Loy Krathong)이라 하며, 음력으로 매 년 11월에 열리는 이 축제는 태국의 설날인 4월의 송크란 다음으로 가장 성대한 축제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8월 한가위쯤 될 터이다.

올 해의 로이 크라통 축제는 10월의 마지막 밤에 열렸다. 이 독특한 볼거리를 놓칠세라 저녁도 거르고 차오프라야 강가로 서둘러 나가 보았다. 휘엉청한 달빛 아래 떠다니고 있을 은은한 크라통 불빛들을 떠 올리며 강가에 도착해 보니 크라통은 커녕 바나나 잎사귀 한 장도 보이질 않는다.

▲ 부모와 함께 강가에 나온 아이들. 이 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직접 크라통을 만든다. ⓒ 정나원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야 마땅할 강가는 평소와 다름없이 퇴근 보트를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다. 이상하다 싶어 강가의 한 식당 주인에게 물어 보니 올 해는 폭죽놀이가 금지되어 사람들이 많이 안 올 거란다. 해마다 폭죽놀이 때문에 다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란다.

식당 주인도 심드렁해 있었다. 대목에 한 밑천 건지는 건데 올 해는 장사도 글렀다는 얘기다. 그래도 정 보고 싶으면 자정까지 기다려보라고 한다. 난감한 마음으로 강가를 서성이는데 강 건너편에 있는 아룬 사원 근처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깜박거린다. 크라통은 거기에 있었다.

밤 9시쯤 되니 식구끼리 연인끼리 손에 손에 크라통을 든 사람들이 강가로 줄지어 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아룬 사원으로 가는 50원짜리 보우트를 타고 강을 건넌 뒤 사원 정원으로 들어가 가져 온 크라통의 초와 향에 정성스레 불을 붙인 다음 다시 강가로 이어지는 선착장으로 가서 줄을 섰다.

▲ 아룬사원의 스님. 이 스님은 무슨 소원을 빌까. ⓒ 정나원
제 차례가 오니 눈을 꼭 감고 기원을 드린 뒤 촛불이 꺼질세라 강물에 코가 닿을 정도로 엎드려 크라통을 띄워 보냈다. 이 행렬은 정말로 자정까지 끊이질 않았다. 예년만큼 떠들석하고 흥청거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어느 해보다 차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염화미소가 어디 따로 있겠는가. 조막만한 손으로 직접 만든 크라통에 불을 붙이고 기도를 드린 뒤 활짝 피어나는 아이들의 얼굴 위에 있지 않은가!

로이 크라통의 연원은 13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700여 년 전 태국이 처음으로 크메르 제국의 휘하에서 벗어나 세운 최초의 태국 왕국, 스코타이 왕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태국과 라오스와 캄보디아, 이 세 나라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을 따라 흐르는 것이 바로 메콩 강이다. 이 일대가 당시 크메르 제국의 최대의 곡창 지대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 밤 11시. 7살짜리 이 여자아이는 크라통을 만들어 파는 중이다. 엄마는 그 옆에서 음식을 팔고 있다. ⓒ 정나원
이 열대나라에서 11월은 가장 중요한 절기에 해당한다. 35도가 넘는 3-5월의 뙤약볕 이후에 약 4개월 간 지속되는 우기가 끝나는 시기이고 기온이 30도 안팎으로 내려가는 ‘서늘한’ 건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며, 무엇보다도 농부들은 그 간의 고된 농사일을 끝내고 한숨을 돌리는 시기이다. 당시 스코타이 시대의 농부들은 수확기를 앞두고 ‘물의 여신(Goddess Mae Khongkha)’에게 강물을 더럽힌 죄를 사하여 주고 풍성한 곡물을 거두게 한 데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강에 촛불을 띄웠다고 한다.

농부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좀더 화려하고 ‘뼈대있는’ 전통으로 발전한 데에 대해서는 또 다른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당대의 노파마스라는 한 아리따운 여인에 관한 얘기다. 이 여인은 미모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롭고 예술적 재능도 탁월했던 모양이다. 이 소문을 들은 당시의 왕은 그녀를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한데 불교를 국교로 하는 스코타이의 왕은 당연히 불교도였던 데 반해, 이 노파마스는 신실한 힌두교 가문 출신이었다.

▲ 방콕의 한 국제학교. 할로윈이 겹친 이 날, 외국아이들은 호박통 대신 크라통을 들고 다녔다. ⓒ 정나원


당시 모든 국가적 의례는 부처를 숭상하는 불교 전통에 따라야 했는데, 수많은 자연신을 모시는 힌두교도인 그녀로서는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런저런 고심 끝에 노파마스는 11월의 행사 때마다 바나나 잎으로 연꽃 모양의 조그만 쪽배를 만들어 물에 띄우며 자신의 종교적 의례를 몰래 지켰다고 한다.

그런데 왕은 이 사실을 알고도 노파마스에게 괘씸죄를 적용하기는커녕, 그녀의 신심과 그녀가 손수 만든 아름다운 크라통에 홀딱 반해 물의 정령에게 크라통을 바치는 의식을 온 나라에 선포하여 하나의 국가적인 의례로까지 승격시켰다고 한다. 그래서 로이 크라통 때 열리는 미인대회는 지금도 ‘노파마스 미인대회’라 불리운다.

한 때 왕과 아리따운 후궁의 물놀이로 그쳤을 수도 있는 로이 크라통 전통은 오히려 태국 평민들에 의해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고 한다.

우선 전체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이 나라에서 물은 여전히 이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자연력이다. 물은 매 년 일거에 한 마을을 집어삼키는 재앙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약속해 주는 축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콕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전통적인 농업공동체사회 틀 속에서 살고 있는 태국 사람들에게 물의 여신을 숭상하는 일은 이들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이다.

또한 이들의 태반은 가난하다. 빌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70년대가 그랬듯이 현재 방콕의 서민계층을 이루는 이들은 대부분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올라 온 이들이다. 이들은 한 달에 고작 10만원, 20만원으로 생활을 꾸려가며 벤츠와 루이뷔똥과 롤렉스를 즐기는 계층과 더불어 살아간다. 땅에서 뿌리 뽑힌 이들은 여전히 가난과 질병과 불운으로 인해 오는 심신의 고통을 크라통에 실어 보낼 것이다.

출렁대는 차오프라야강 위를 흘러가는 크라통들은 바로 그들 하나하나의 삶이고 그 위에서 가물거리는 촛불은 그들의 절실한 희망이자 삶의 위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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