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 유족들이 대거 참여해 이루어진, '여순사건 53주기 추모 역사순례'는 여수·순천·광양·구례 지역에서, 많은 유족 및 학생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지난 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비가 오는 가운데서도 차분히 이루어졌다.
이번 역사순례는 올해 처음 결성된 여순사건 유족회(이하 유족회, 회장:김상태)의 진상을 알아야겠다는 의지와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을 통해 명예회복을 이루어야겠다는 스스로의 자각에서 이루어졌다.
여순사건 53주기 추모 역사순례는 유족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여수·순천·광양·구례 지역 등의 집단 학살지를 주로 순례하였고, 여수 만성리 학살지·순천 서면 구랑실 학살지·광양 반송쟁이 학살지·봉성산 암매장지 등에서는 유족들의 통곡 및 헌화·분향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21일은 학생 ·시민들이 주로 참석한 가운데 여수 지역의 집단 학살지·암매장지·격전지를 순례하였다.
유족들은 첫번째 방문한 125구의 미수습된 시신이 뒹굴고 있는 형제묘인 여수 만성리 학살지에 도착하자 마자 땅을 치고 오열을 터뜨렸으며, 순천 반송쟁이 학살지에서는 "개자식들"하며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간 희생자들의 학살지에서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족들은 그동안의 '빨갱이 가족'이라는 눈초리 때문에, 부친·남편의 학살 장소에 처음 와 본다고 이야기 하였으며, 시신도 제대로 거두지 못하게 한 한스런 세월을 탓하였다. 그리고 그 유족이 한·두 사람이 아니고 (만여명의 희생자) 유족이 헤아릴 수없이 많으니 이 사람들의 가슴속의 한을 이제는 씻어주어야 할 것 아닌가 하고 이야기하였다.
한편 순천시 유족회장을 맡고 있는 장준표(58, 남) 씨는 "특별한 죄목도 없이 광양 옥룡면 면서기를 맡고 있었던 부친이 옥룡 면서기로 있다가 갑자기 광양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가 51년 1월 14일 백운산 빨치산의 광양지역 습격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다른 잡범들과 함께 반송쟁이(일명 주령골)로 끌려 가서 총살당했다"고 울먹이며, 이 "한스런 세월이 지난 9월 6일 국회에 발의된 특별법을 통해서 조속히 해결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였다.
구례 경찰서 마당에서의 집단 학살로 부친을 잃은 박찬근(66,남, 구례유족회장) 씨도 "구례 경찰서에 잡혀가 거기서 집단 학살된 부친의 암매장지를 올해 처음 벌초를 하고 성묘를 했었다"고 한스럽게 이야기하며, 15대 국회때 13번이나 탄원서를 넣었던 과정을 한도 끝도 없이 이야기하였다.
또한 박찬근 씨는 "진실을 이야기하기 거부하는 당시 구례주둔 12연대 연대장인 가해자도 나이가 많이 들고, 진실을 알고 있는 여순사건 피해자의 유족들도 이제 한사람씩 한사람씩 저 세상을 가고 있으니, 더 지체하지 말고 인권 대통령을 낳은 국민의 정부에서 이를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틀별법을 통한 조속한 해결을 강조하였다.
덧붙이는 글 | 여수시 만성리 및 광양 반송쟁이 학살지의 민간인 학살 피해실태 및 구례의 봉성산 암매장지 실상
1.만성리 학살지의 민간인 학살 피해실태
여순사건 진압이 완료되면서 서정지역 주민들은 1948년 10월 26일 새벽부터 서국민학교에, 동정지역은 공설운동장과 동국민학교 등에 모여 심사를 받게 된다. 지까다비를 신고 있는 사람, 총을 멘 흔적이 있는 사람, 군용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처형이 되었고, 또한 우익가족이나 경찰 및 가족들의 손가락총에 의해 좌익이거나 적극적인 가담자라고 판명된 자는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고, 계속된 심사를 거쳐 가담한 자로 판명이 되면 종산국민학교(현 중앙국민학교)에서 재심사를 받게 된다.
종산국민학교에는 여수에서 1차 심사를 통해 끌려온 사람들과 각 지방에서 끌려온 좌익이나 가담자들이 갇혀 있었으며, 이곳에서도 즉결 처형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후 이곳에서 색출된 125명에 대한 처형이 만성리 굴 너머, 현재 군부대가 위치한 근처에서 헌병들에 의한 총살 및 화장이 이루어지는데, 정기순씨의 오빠인 정기만이 여기에서 총살당한 관계로 1949년 1월 13일이라고 밝혀졌다.
사건 당시 여수경찰서 사찰계 형사였던 최명균씨의 증언이나 인근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당시 희생된 사람의 숫자가 125명이었으며, 그 과정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증언을 통해 확보된 희생자 15명의 인적사항이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당시 125명을 끌고 와 경찰에게 총살을 명령했으나 최명균씨 등이 경험이 없다고 미루었고, 이후 헌병이 총살을 하고 경찰은 주위 경계를 했다고 한다. 5명씩 묶어서 총살을 한 후, 지게꾼들이 시내에서 가지고 온 장작을 이용해서 장작과 사람 5명을 겹겹이 쌓아 5층으로 다섯 묶음을 만든 후 화장을 시켰다고 한다. 이때 3일간이나 불이 탔으며, 그 냄새로 인해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곤란했다고까지 한다.
만흥동의 신용식씨 증언에는 당시에도 한명이 생존해 지게꾼들이 바지개로 가려서 살렸다는 말이 있었는데, 최명균씨를 통해 비탈쪽으로 한명이 굴려졌는데 목에 줄이 걸려 죽었음이 확인되었다.
2.광양 반송쟁이 학살지의 민간인 학살 피해실태
백운산 자락을 끼고 마을을 이루고 있는 광양은 여순사건을 일으키고 패퇴한 14연대의 주력부대가 산으로 숨어버리고 난 후, 군과 경찰의 부역자 색출과 빨치산이 된 반군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한국전쟁이 끝나도록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다.
여순사건 당시부터 백운산을 중심으로 하여 살아남은 14연대의 반군들과 입산한 좌익청년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던 빨치산부대는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지리산과 백운산을 중심으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국군 토벌대도 진을 치고 이들과 맞서고 있었던 터라 광양지역은 이미 여순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전쟁상황과 같은 처지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후 1950년 8월 중순에서 10월 중순까지 약 2개월간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국군의 반격으로 산골을 제외한 전지역이 수복되고 조금씩 정상을 찾아가던 1951년 1월 14일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던 백운산의 빨치산이 야음을 틈 타서 광양경찰서를 제외한 전지역을 점령하였다가 날이 밝자 도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조사를 위해 각 지역에서 잡아들여 왔던 민간인들을 빨치산 습격으로 희생되었던 경찰과 군인의 희생에 대한 보복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사건관련자 전원을 반송쟁이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버렸던 것이다. 이 시기에 옥룡면의 파출소에서도 파출소에 갇혀있던 혐의자 모두를 봉강과 옥룡의 경계였던 가문개재로 데려가 모두 총살시키기도 하였다.
반송쟁이 학살지는 여순사건 당시에도 광양읍 지역에서 적극가담자로 지목된 자들을 재판 등의 절차도 없이 즉결처분하였는데 여순사건 참상을 기록사진을 통하여 알린 데 공헌한 이경모 선생의 사진 중 서울대생 김영배가 희생된 장소도 이곳 이었으며 덕례리 골짜기, 주령골, 반송정, 반상쟁이 등으로 알려진 학살지이다.
3.구례의 봉성산 암매장지 실상
1948년 11월 18일 구례경찰서에는 약 80여명의 민간인들이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문척면 토금리에서 잡혀 온 마을 주민 19명을 비롯하여 치안유지라는 죄목으로 밤늦게 돌아다니다 붙잡힌 사람 등 다양한 이유로 구례경찰서로 잡혀온 이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밤을 세우던 이날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 날 새벽을 틈 타 빨치산의 습격으로 경찰서 부근에서는 경찰과 빨치산의 교전이 있었고 조사도 하지 않았던 애매한 민간인들은 경찰의 화풀이에 새벽 공기를 가르는 기관단총의 총알 세례를 받으며 모두 끌려나와 개죽음을 당해야만 했었다.
당시의 시신을 처리하였던 증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밝혀진 희생자는 모두 72명으로 뒤늦게 이들이 묻힌 봉성산 암매장지의 땅을 파고 시신을 수습하려고 해도 수많은 시신이 뒤엉켜 있어서 그대로 다시 묻고 말았다 한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구례유족회의 박찬근 회장의 부친도 이때 억울한 희생을 당한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