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이드 직업이 없으므로, 이제까지 밥만 먹고 그림만 그렸습니다."
서울여자대학 서양화과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1990년부터 34년 동안 프랑스와 스위스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화가 장정연(張禎延 Jung-Yeun Jang)이 지난 9월 '나라는 정거장'이라는 타이틀로 평택문화원의 복합문화공간 '웃다리 문화촌'에서 기획초대전을 가졌다.
정거장이란 목적지는 아니어도 과정을 제시하고, 새로운 공간을 보게 하고,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지점이다.

▲완전히 행복하면서도 접근할수 없는(Entierement heureux et inaccessible) 150x150cm 캔버스에 유채 -장정연의 개인전 'Condensation(농축)' 중에서 2018년 5월 ⓒ 장정연

▲봄의 소리 (91x72.8cm 캔버스에 유채 2018)작:장정연 ⓒ 장정연

▲호들러(Hodler)의 현대여성 (140x110cm 캔버스에 유채 2017)작:장정연 ⓒ 장정연

▲애착 (85x85cm 캔버스에 유채 2018)작:장정연 ⓒ 장정연
장정연 작가의 작품에는 저마다 다른 배경과 여성이 등장한다.
이들은 일상적이지만 낯설고, 비현실적이지만 생생한 서술적 이야기로 마치 연극을 보는 듯하다. 캔버스 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고,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 또는 잡지나 광고 등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구성, 또다른 새로운 서사를 만든다.
"어쨌든 분명한 점은 장정연이 인생의 수많은 이미지에서 주제를 찾고 있고, 그 작업은 시사성을 갖고, 추상이 아니면서도 부분적이고, 사실적이 아니면서도 그럴듯함을 표현한다."
- 베르나르 과(프랑스 FRAC의 lle-de-France 회장, 파리 10대학 현대미술사 교수) 작품평
* Ile-de-France : Paris 를 포함한 그 주위의 지역
* FRAC (Fonds régional d'art contemporain 프랑스 현대미술 컬렉션) : 프랑스의 대도시 또는 해외 지역에 위치한 공공 지역 컬렉션이다. 현재 전국에 23개의 FRAC이 있는데, 지역, 문화부 및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국가가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원래 장소가 없었던 FRAC은 현재 컬렉션 규모에 따라 역사적 건물을 개조하거나 특수 제작된 미술관에서 개최되고 있다. 그 창립과 역사는 통치의 일부를 지방 정부로 이양하는 지방 분권화 정책의 일환으로, 문화부 장관 자끄 랑(Jacques Lang)에 의해 설립되었다. 1982년부터 지역 컬렉션을 구성하고 지역 사회와 문화 기관에 대한 지원 활동을 통해 현대 미술을 장려/홍보하기 위해 지역 기금이 설립되었다.
장정연은 프랑스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E.N.S.B.A.)와 스위스 바젤 FHNW(Fachhochschule Nordwestschweiz) 순수미술 석사 후, 현재까지 바젤에서 활동하고 있다.
* 바젤(Basel) : 스위스 북부에 있는 제 3의 도시. 인구는 177,000명이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지대에 놓여 있는 특이한 위치 탓에 도시권의 규모는 3개국에 걸쳐 850,000명에 달함. 취리히, 제네바에 이어 3위.
긴 세월 동안의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활동경험은 그녀를 강인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었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성은 작가 자신과 닮아있는 능동적이고,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로 표현되어 있다. 정지되어 있는 정적인 모습보다는 다소 과장된 행동을 하는 연극의 한 장면에 등장할 법한 여성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 속 여성들은 욕망, 기쁨, 행복, 불안, 공허함 등의 다양한 감정들을 표출, 끝없는 내러티브(이야기)를 이어간다. 해외에 살면서 그녀가 느꼈을 다양한 감정들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져 이야기를 건네는 것도 같다.
게다가 여성 특유의 에로티시즘과 잠재된 욕망을 능동적이며 드라마틱한 여성들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

▲새로운 세상 (126x141cm 캔버스에 유채 2000)장정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로, 사랑하는 도시 파리에서 스위스로 옮기던 해에 그린 그림. 프랑스와 스위스, 동양과 서양이라는 동시성을 기대하며 두 개의 물통에 동시에 몸을 담고 있는 어린이와 같은 느낌으로 그렸다. ⓒ 장정연

▲밤에서 나와봐 (120x130cm 캔버스에 유채 2005)작:장정연 ⓒ 장정연

▲코스모폴리트 (140x120cm 캔버스에 유채 2022)작:장정연 ⓒ 장정연
피카소의 그림과 함께 있는 장정연의 그림
장정연 : 1998년 파리에서 그렸던 그림 중 하나가 제 아틀리에에서 나갔었거든요. 제가 그림을 많이 그렸어서 그 그림이 어디로 간 건지 잊고 있었는데요~ 반년 전 구글을 봤더니 그 그림이 떠있더라구요. 제가 모르는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나오는 거에요. 저는 그 미술관에 가본 적이 없어요. 남불 스페인 옆이었는데, 제가 스위스에 살며 맨날 그림 그리느랴 바빠서 그 쪽으로는 여행을 간 적이 없어요...일주일 동안 '내 눈이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하다가 지인들에게 좀 알아봐달라 했더니 맞다는 거에요. 너무 떨리는 마음으로 미술관에 전화를 했죠. 3분 뒤에 다시 전화가 왔는데, 내 그림이 그 미술관의 컬렉션이라는 거에요. 철학자이며 비평가로 유명하신 분의 콜렉션. 그 분에게 자식이 없고 지금 연세가 많으셔서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다는 거에요. 그 미술관에는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그림이 60점. 앙리 마티스(프랑스어: (Henri Émile Benoît Matisse),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마르크 샤갈(Marc Chagall)의 그림 등이 들어가 있는 미술관이래요.
김경원 : 동양인 장 화백님의 그림이 이제 피카소와 나란히 보관되어 있는 거로군요.
장정연 : 그런데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요, 아직 그곳에 못가봤네요.
김경원 : 미술관 이름이?
장정연 : [뮤제 다르 모데르느 드 세레 (Musée d'Art moderne de Céret)]라고 하는데, 남불의 세레에 있는 큰 현대미술관이에요. 근데, 사실 제가 거기 가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더 중요해요. 제가 그림 따라 간다면 갈 데가 많죠. 노르웨이도 가야 되고 오스트레일리아도 가야 되고 홍콩도 가야 하거든요. (웃음)
* 1948년, 세레(Céret)의 두 화가가 세레를 거쳐간 예술가들의 작품을 수집해 세레에 현대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마티스와 피카소는 이 기획의 '두 견인차'였다. 피카소는 53점의 작품을 이 미술관에 기증했다. 마티스는 1905년 콜리우르에서 제작한 야수파 그림의 예비 드로잉 14점을 제공했다. 이는 1934년 1월 아내가 콜리우르 시에 기증한 후안 그리, 오귀스트 에르빈, 앙드레 마송, 키슬링, 마놀로 등의 아리보 컬렉션에 상당량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계간지 ‘BaslerN’ (2019년 여름호). 작가 장정연의 그림이 표지에 실려있다.. ⓒ 장정연
"나에게 있어 그림이란 나의 시간, 꿈, 경험이 농축된 표면이다. 때로는 일기이자 거울이며, 환상이자 나를 은근히 지켜주는 수행원의 역할도 한다. 거기에는 자유가 있다. 나는 내 그림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으면, 왠지 안정감을 느낀다." -작가 노트 중
"엄마가 남성들만 있는 건축가들 사이에서 너무 열심히 사셨어요. 밥만 먹으면 회사로 향하셨는데, 무채색 톤의 정장옷에 조용하면서도 이지적인 표정의..어려서는 그런 엄마가 다른 친구들 엄마와는 너무 달라 생소했어요. 너무 차갑고 일만 하시고..하지만 지금은 좀 알아요. 그 척박한 남성중심적 한국사회에서 여성이 홀로 부대끼며 살아오셨을 그 힘겨움을요."
어머니는 1960년대부터 활약했던 여성 건축가 조계순 여사다.
1938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신 조계순 씨는 광복 직전 1944년에 서울로 건너왔다. 한국 여성건축가 1세대이자 김수근 건축가의 1호 제자이다.
장 작가는 '그림은 자신의 몸세포 중 하나'라 한다.
경쾌한 웃음을 터뜨리는 여성이 윙크하는 눈에 커다란 개미가 올라앉은 '애착'이라는 그림이 있는데 "왜 개미냐?"는 물음에 그녀는 말한다.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정체는 전혀 다르기도 하죠. 보여지는 것과 펼쳐 보이는 것이 다른, 환상과 실체의 거리를 표현하고 싶었어요."

▲서울태생인 장정연(張禎延)은34년 동안(1990~2024 현재) 프랑스와 스위스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화백이다. ⓒ 장정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쎈 언니’ 포즈를 취한 화가 장정연(張禎延 Jung-Yeun Jang)과 배우 김경원(金京媛 Kung-Won Kim) -마포 광흥창점 파스쿠찌 2024 ⓒ 김경원
"사실 저는 그림 외에 잘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건강체질도 아니구요. 그래서 하루 온종일 아틀리에에만 틀어박혀 작업만 해요. 저와의 싸움이 너무 외롭고 힘들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길을 걷고 있는 씩씩한 사람이에요. 전 뭐든 신념을 갖고 열심히 사시는 분들을 뵈면 존경심과 함께 아름다움을 느껴요. 제 캔퍼스 안에 정지시킬 수 있는 장소와 시간, 그런 분들과의 감동의 만남...그 순간을 즐기는 편입니다."
우리는 인터뷰 기간 중,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반가운 뉴스를 접했다.
" 한강 작가는 박근혜 정권 때, 나와 같이 <블랙리스트>로 낙인 찍힌(?) 예술가 동지여서, 감회가 남다르다. 그래서 더욱 자긍심과 용기를 얻는다. "
* 블랙리스트(blacklist) : 박근혜 정권 때,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감시하거나 불이익을 줄 목적으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 )를 통해 만들어졌다. 당연히 불법이며 사회적 논란이 되고 있다.
는 필자의 말에 그녀도 축하메세지를 보냈다.
"코로나 전에 바젤에 오셔서 대담할 때, 한강 작가의 글낭독을 직접 들었네요. 바젤의 '문학의 집'에서 그 행사를 개최/번역하신 박후남 선생님, 스위스 최고신문 NZZ에서 극동 아시아에 대한 철학/사회/문화 전반에 대한 칼럼을 쓰고 계시는 분이신데요~ 그 분이 초대해서 갔었는데, 제가 유일하게 가봤던 문학회견이었어요.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분이었는데.. 같은 한국여성으로 더할 나위없이 기쁩니다. 노벨문학상 아시아 여성 수상자는 처음이라는군요.^^ 정말로 축하드립니다!"
말끔하고 당당한 첫인상의 장정연 화백, 그녀는 10월 초 다시 스위스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