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발끝에서 시작했다. 하늘은 유리알처럼 청명하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함을 전하는 계절, 자연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만추(晩秋)의 화려한 색깔을 준비하는 고즈넉한 시간, 걷기 좋은 때다.
어딘가 떠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지난 25일 홀로 훌쩍 떠났다. 목적지는 전라남도 곡성군. 새벽녘 이슬 같은 비가 내렸다. 아침 공기는 구름 사이로 스미는 햇살에도 불구하고 제법 싸늘했다. 스산한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가을의 서정. 그렇게 곡성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자연의 화음에, 꽃향기에 취하고
▲ 침실습지 퐁퐁다리 가는 길. 홍수가 져서 물이 세차게 흘러도 다리가 떠내려 가지 않는 것은 다리에 구멍을 퐁퐁 뚫은 부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붙여진 이름이 퐁퐁다리이다. ⓒ 김재근
첫 여정은 침실습지. 섬진강과 곡성천·금천천·고달천이 만나는 203만㎡의 습지로, 섬진강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일교차가 큰 봄가을 일출 무렵 물안개가 장관이라고 한다. 제22호 국가습지 보호구역이다. 습지는 조금 쓸쓸하게 고요한 얼굴로 담담하게 맞아 주었다. 날씨도 그렇거니와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새벽 강가를 뒤덮는 물안개의 몽환적인 풍경도 동이 트며 반짝이는 생선 비늘 같은 물결도 볼 수는 없었다.
강을 가로지르는 퐁퐁다리 위를 걸었다. 홍수가 져서 물이 세차게 흘러도 다리가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다리에 구멍을 퐁퐁 뚫은 부력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모양새를 보고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발 아래 강물이 흐르고 이마에 바람이 스친다.
은빛으로 부서지는 억새 군락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파도처럼 일렁인다.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 수풀 헤치며 흐르는 물 소리, 자연이 주는 화음에 귀 기울인다. 물안개라는 화려한 화장 대신, 억새와 물소리와 새소리라는 민낯을 드러내는 수묵화 같은 풍경이다. 이곳에서 가을은 깊어지고 있었다.
▲ 동화정원 삼만여 평 동산이 황화코스모스로 꽉 찼다. ⓒ 김재근
침실습지에서 곡성읍 방향으로 차로 10여 분. 풍경은 극적으로 반전했다. 방금까지 담백한 수묵화 속에 있었다면, 이곳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유화 한가운데다. 동화정원, 삼만여 평의 야트막한 동산이 황화코스모스로 가득했다.
거대한 주황색 물감을 하늘 아래 쏟아부은 듯하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기 시작한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그 아래 펼쳐진 꽃의 바다는 아득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세 가지뿐이다.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주황빛 꽃물결. 압도적인 아름다움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문득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가을바람에 실려 온 꽃향기에 취해 한참을 넋 놓았다.
황홀한 꽃의 바다를 뒤로하고, 곡성의 상징인 기차마을로 향했다. 동화정원에서 건너다보이는 거리다. 뿌우-, 둔탁하면서도 정겨운 기적 소리와 함께 증기기관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선다. 기관차는 옛 전라선 철길을 따라 섬진강변을 왕복한다. 덜컹거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창밖을 바라본다. 낮이 되면서 하늘은 완연한 가을빛을 되찾았고, 따스한 햇살이 섬진강의 은빛 물비늘 위에서 부서진다.
참게탕과 토란 들깨탕
▲ 섬진강 .증기기관차 차창밖으로 섬진강이 흐른다. 고려 우왕 때, 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 김재근
섬진강(蟾津江). 이름이 참 독특하다. 고려 우왕 때, 강 하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수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울부짖어 왜구들이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두꺼비 '섬(蟾)' 자에 나루 '진(津)' 자를 써서 '두꺼비나루'라는 뜻을 품게 되었다.
전설 속 두꺼비의 울음소리 대신, 지금 강변에는 가을이 속삭인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억새와 갈대숲은 은빛으로 물들었고, 드문드문 붉게 타들어 가는 단풍잎이 가을의 절정이 멀지 않았음을 알린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기차도 느릿느릿 가을의 풍경을 실어 나른다. 그 느림이 고맙다.
기차에서 내리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곡성의 가을을 통째로 맛볼 수 있는 참게탕과 토란 들깨탕을 선택했다. 섬진강 참게는 작지만 속이 꽉 차고 특유의 향이 진하기로 유명하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붉은 참게탕, 한술 떠 맛을 보니, 칼칼하면서도 시원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딱딱한 껍질 속 부드러운 게살과 고소한 내장은, 싸늘했던 오전의 한기를 단번에 녹여준다.
함께 시킨 토란 들깨탕은 참게탕과는 또 다른 매력이다. 곡성은 전국 제일의 토란 주산지이다. 흙 속의 알이라 불리는 토란은 영양가가 풍부하다. 뽀얀 국물에 들깨를 아낌없이 갈아 넣은 탕은 그야말로 구수함의 극치다. 푹 익어 파근파근 씹히는 토란의 식감과 고소하고 부드러운 국물이 어우러져, 뱃속을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준다.
▲ 뚝방마켓 .한여름과 한겨울은 잠시 쉬고 매주 토요일이면 장이 선다. ⓒ 김재근
배를 채우고 낭만 한 잔을 위하여 뚝방마켓을 찾았다. 곡성천 둑방을 따라 아기자기한 좌판들이 늘어선 플리마켓이다. 한여름과 한겨울은 잠시 쉬고 매주 토요일이면 장이 선다. 따사로운 가을볕 아래, 뚝방은 활기가 넘쳤다. 직접 만든 수공예품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물건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쪽에서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버스킹 공연이 한창이다. 잔잔한 기타 선율이 강바람을 타고 흩어진다. 시원한 식혜 한 잔을 손에 들고 음악을 듣는다. 오후의 햇살 닮은 따스한 시장의 풍경과 홀로인 나. 조금은 이질적인 조화가 왠지 싫지 않다.
침실습지‧기차마을‧동화정원‧전통시장 그리고 뚝방마켓까지, 걷기에 부담 없는 거리였다. 이제 깊고 아늑한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 뚝방마켓을 떠나 섬진강 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압록유원지에서 강은 두 갈래로 나뉜다. 섬진강과 대황강(보성강)이 만나는 합수머리다. 이곳에서 대황강의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고요한 사찰에서 만난 국보
태안사(泰安寺)로 가는 길은 멀고 깊고 또 외로웠다.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만큼,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법한 좁은 산길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마치 귀한 보물을 겹겹이 숨겨둔 듯하다. 무념무상으로 명상에 들 듯 오르다 보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며, 아늑한 분지가 나타난다. 그곳에 꿈결처럼 아담한 절집 태안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적인선사탑 적인혜철선사 조륜청정탑이라고 부른다. ⓒ 김재근
태안사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선종 불교의 아홉 개 산문 중 하나인 동리산문의 본산지다. 화려함 대신 오랜 세월의 깊이를 간직한 곳이다. 절 마당에 들어서자,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표였던 국보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로 '적인선사탑'이다. 통일신라의 승려 혜철 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부도(승탑)이다. 1963년 보물로 지정하여 관리하다가 올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부도탑 앞에 선다. 거대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그 기품과 정교함에 숨이 멎는 듯하다. 8각의 기단부에는 구름과 용, 사자가 생생하게 조각되어 있고, 탑신을 받치는 연꽃무늬는 더없이 우아하다. 지붕돌의 처마는 가볍게 하늘로 치켜 올라가,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다.
천년의 세월을 견뎌낸 돌탑은 따스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묵묵히 서 있다. 그 앞에서 나는 한낱 스쳐 가는 바람임을 깨닫는다. 깊은 산속, 고요한 사찰에서 만난 국보의 품격은 오늘 하루 느꼈던 모든 쓸쓸함과 황홀함을 하나로 묶어 평온이라는 이름으로 매듭지어 준다. 태안사를 나서는 길, 해는 서쪽 산을 넘어가고 있다. 공기는 다시 싸늘해졌지만, 마음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여행의 마지막은 언제나 돌아갈 길 앞에서 서성이는 발걸음이다. 홀로 나선 길이었지만 돌아가는 길은 혼자가 아니다. 그게 섬진강의 은빛 물비늘인지, 태안사 석탑의 천년 고독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동행으로 내 삶의 굽이진 길이 언젠가는 태안사의 고요한 분지처럼 아늑한 평안에 닿을 것이라 믿는다. 가을이 깊어질수록, 곡성은 더욱 선명하게 남을 듯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화순매일신문에도 실립니다.네이버블로그 '쿰파니스 맛담멋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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