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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40년이 된 친구들, 지난 2월에 이어서 다시 만났다. 20대 대학원 시절에 친해졌다 각자의 길을 걸은 뒤 60대 은퇴기에 새로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 서울 송파의 순댓국집에서 의기투합한 , 우리는 날씨 좋은 5월에 가까운 곳을 산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한 행선지는 서울 서대문의 안산이었다.

그런데 2025년 봄 날씨는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유난히 비가 잦다. 특히 5월 둘째 주 날씨 예보는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락가락했다. 비가 오던 금요일 낮에 예보는 주말에 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토요일 아침에도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심지어 강풍까지 불어 닥쳤다. 우리는 급히 플랜 B를 가동했다.

종묘서 발견한 우리 문화의 깊이

종묘광장공원 종로3가역에서 가까운 종묘광장공원의 모습, 멀리 종묘 외대문이 보인다. ⓒ 김성일

그날의 호스트였던 나는 작년에 다른 친구들과 들렀던 '종묘'(宗廟)를 떠올렸다. 그땐 가장 중요한 건물인 '정전'(正殿)이 보수공사 중이었는데, 5년에 걸친 대공사가 끝났다는 지난 4월 뉴스도 기억났다(종묘대제는 종묘 정전의 보수공사 등으로 지난 4일, 6년 만에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도심의 평지라 비 오는 날씨에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갔는데, 결과적으로 모두가 기대 이상으로 만족한 날이 됐다.

오전 10시에 방문한 종묘는 짓궂은 날씨에도 방문객이 제법 많고 외국인들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마침 문화관광 해설사인 노신사 한 분이 안내와 해설을 진행하고 있었다. 종묘에 얽힌 다양한 의미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많은 공부가 됐다.

종묘를 찾은 사람들 비 오는 날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 김성일

흔히 '종묘사직'이라는 말을 한다.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社稷)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사직이 '경제적 의미'가 강한 곳이라면 종묘는 나라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서울의 사직단은 아예 공원으로 탈바꿈했지만, 사당인 종묘는 어쩐지 우리 일상과는 멀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역사적 문화적 의미가 특별한 곳이다.

우선 건축미가 첫 손에 꼽힌다. 국내에서 가장 긴 좌우 101m의 정전은 한국 전통 건축의 걸작이자 백미라고 말한다. 장엄한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국보로 지정되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다. 또한 정전에서 행하는 의식인 '종묘제례'와 이때 사용하는 '종묘제례악'(음악(樂), 노래(歌), 춤(舞)의 총칭)이 2001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됐다.

K컬처로 이어지는 한국의 문화 자산

이처럼 종묘는 유형·무형의 문화유산이 동시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보기 드문 사례다. 문화 대혁명으로 전통이 단절된 중국이 질시할 정도라고 한다. 건축물과 문화, 물질과 정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조화를 이루는 현장이 바로 종묘라는 뜻이다.

'혼백'(魂魄)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한다. '혼'은 정신을 다스리고 '백'은 몸과 물질을 다스리니 혼은 사당(종묘), 백은 왕릉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망묘루와 연못 종묘 외대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망묘루와 연못의 모습, 연못 한 가운데 향나무는 자세히 보면 뭉크의 '절규'가 떠오른다. ⓒ 김성일

우연히 방문한 종묘에서 뜻밖에 한국 문화의 정수를 만날 줄이야. 긴 역사를 통해 우리가 축적한 문화의 깊이와 균형감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오늘날 세계의 주목과 인기를 끌고 있는 K컬처 또한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선조가 가꾸어온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적 자산이야말로 창조의 원동력이자 보고(寶庫)가 아니었을까 싶다.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K컬처 속에 한국인의 정서와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도심의 공원이자 휴식 공간

종묘 경내를 걸으며 우리는 새삼 도심 공원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녹지와 공원이 많지 않은 우리의 도시, 특히 서울의 도심은 궁궐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경복궁, 덕수궁 등 5대 궁에 비하면 아무래도 종묘는 일반에게 덜 알려진 편이다.

하지만 키 큰 나무들이 이어진 경내의 산책로는 도심 속 별천지처럼 색다른 세상이다. 짙푸른 나무와 숲이 주는 맑은 기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청량하다.

사람이 거주하던 궁궐은 오밀조밀 건축물이 많은 편이지만, 종묘는 천천히 걸으면서 시원한 개방감과 공간감을 즐길 수 있다. 더구나 시청과 광화문 등 시내 가까운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잠깐 일상에서 벗어나 멈춤과 휴식의 시간을 보내는 데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 싶다.

종묘의 정전 한국 전통 건축물의 백미로 꼽히는 정전의 모습. 자연과 조화와 균형을 이룬 기품 있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 김성일

비가 계속 내려 땅은 질척거리고 신발은 젖어도 우리는 공간과 장소가 주는 기분 좋은 상쾌함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날씨 화창한 날, 산행에 나서는 것도 좋지만 문화와 역사, 자연과 함께하는 시간의 의미는 훨씬 남다르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흔적과 체취, 살아가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40년 우정 또한 새삼스럽게 감사한 마음이 느껴졌다. 기나긴 역사, 깊이 있는 문화와 비교할 순 없지만 만남이 거듭될수록 조금씩 깊이를 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궂은 날씨에도 제법 많이 걸었던 날이다.

종묘의 산책로 마치 숲 속을 걷는 듯 시원한 개방감과 청량감을 느낄 수 있다. ⓒ 김성일

발걸음은 종묘에서 창경궁과 창덕궁으로 이어졌고 안국동의 한옥집에서 우리는 허기진 배를 채웠다. 막걸리 잔을 부딪치며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 보따리를 하나씩 풀었다. 함께한다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누는 정이 더해질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깊어간다. 내 인생의 무대에 함께한 친구들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이들과 함께 역사적인 곳에 다녀오니,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낸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립니다.

#종묘#종묘사직#K컬처#은퇴#종묘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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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새로운 날을 위해 글을 읽고 쓰며 생각을 나눕니다. 지금 여기의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오늘도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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