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기자말] |
집 앞 천변만 가도 눈이 싱그러워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출근길 운전대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쨍한 색감이었다. 1인칭 시점의 화각으로 연속되는 애니메이션이 가상현실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벅찬 마음이 들었지만, 연달아 침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런 날씨에도 결국 향해야 하는 곳이, 일터라고?
4월 말부터 5월 초순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는 1일부터, 아내는 3일부터 7일까지 연속되는 휴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고민인 '이번엔 어디 가지?'를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우리는 영주 부석사를 주된 여행지로 정하고 위성지도를 보며 출발지에서부터 대각선을 그어보았다. <전주-추풍령-상주-무섬마을-부석사-조선민화박물관>으로 연결되는 여정이 구성되었다.
추풍령 넘어 상주로... '대각선 루트'의 즐거움
▲ 대략적인 여정 지도 일명 '대각선 여행'. 경유지를 보은, 괴산으로 바꾸면 또 다른 대각선 여행이 만들어진다. ⓒ 포털사이트 지도 캡처
추풍령은 호남에서 영동지방으로 국도를 이용하여 넘어갈 때 거쳐가는 관문이다. 이곳이 고개로서 인기 있는 곳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위해 영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주로 이용했던 곳은 조령(새재)이었다. 추풍령이 더 낮은 고개지만 길이 험하고 산적이 많아 훨씬 높은 새재를 넘었던 것이다.
추풍령은 일제강점기 시절 경부선이 놓이면서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그로 인해 대전, 김천 등의 도시가 갑자기 성장했고 주된 관문으로 영화를 누리던 상주와 충주는 급격히 쇠퇴했다. 전주에서 추풍령을 지나 상주로 넘어가는 여정은 이러한 역사의 상관관계를 관통하는 의미가 있었다.
▲ 추풍령 급수탑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했던 급수탑이 추풍령역의 유물로 남아있다. ⓒ 안사을
상주는 '자전거의 도시'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효과적으로 상주를 지배하기 위해 자전거를 들여온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변은 산악지형이지만 내부는 평평한 분지 지역이기에 자전거를 타기가 쉬워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자전거 이용자가 많았고, 낙동강 주면으로 자전거길이 계속 정비되어 자전거의 성지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곳이 되었다.
도심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가면 경천섬공원을 중심으로 생물자원관, 학전망대, 경천대 등의 관광지가 모여있다. 자전거박물관도 이 근처에 위치해 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변으로 이팝나무가 절정이었다. 하루 전날의 진회색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하늘에 연둣빛 나뭇잎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 학전망대에서 보이는 경천섬공원 계단 입구까지 차를 타고 올 수 있다. 주변에서 가장 전망이 좋은 곳 ⓒ 안사을
특히 아이가 있다면 함께 방문하기에 참 좋은 곳이었다. 생물자원관에는 다양한 생물의 표본을 생동감 있게 전시해 놓았고, 6번째 대멸종이라 일컫는 현재의 기후위기에 대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었다.
상주 자전거박물관 역시 아이들이 보기에 흥미로운 자료들이 많았고 자전거 체험프로그램도 있었다. 바로 앞에 캠핑장도 있으니, 야영도 하고 자전거도 타면 건강하고 재미난 여행이 될 것이다.
전통시장과 향교, 도시마다 빠지면 섭섭한 곳
▲ 생물자원관과 자전거박물관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1. 생물자원관의 외관 2. 생물자원관 내부 3. 자전거박물관 외관 4. 자전거박물관 내부 ⓒ 안사을
상주의 여정 중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곳은 향교이다. 평소 어떤 도시를 여행할 때 꼭 들르는 곳이 있다. 전통시장과 향교이다. 시장은 그 지역의 현재를 엿봄과 동시에 소박한 먹거리를 찾을 수 있다. 향교는 그곳의 옛날을 상상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당 지역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역사를 대하는 자세를 가늠할 수 있다고나 할까.
상주향교의 대성전에 오르면, 상주가 한때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곳으로, 지금의 도청 역할을 하던 곳)이 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대성전 좌우에 있는 동무와 서무는 문묘와 경주의 그것 다음 가는 규모라고 한다. 보통 아담하고 아늑한 인상을 주는 다른 향교에 비해 위엄과 웅장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는, 매우 가까운 현대에도 향교의 기능이 그대로 쓰였던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향교는 고려와 조선 때 있었던 국립 지방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공립 중, 고등학교라고 생각하면 쉽다. 1950년부터 한동안 이곳은 남산중학교였다. 명륜당은 교무실로, 동무와 서무는 교실로 쓰였다.
요즘도 상주향교는 활발하게 운영된다. 유교 인문학 강좌 등을 열고 있고, 석전대제 등 각종 예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다만 제안하고 싶은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향교의 교육 프로그램을 청소년 층에게 더욱 솔깃한 방향으로, 더 쉬운 설명을 곁들여 운영해보면 어떻냐는 것이다.
둘째는 진입로, 대성전 앞 광장 등의 환경을 조금만 더 쾌적하게 바꾸면 어떨까 한다. 지금은 낙동강 주변으로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한데, 구도심의 역사적 건물들로도 관광객을 유도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 향교와 은행나무 공자가 주로 강학을 했던 곳이 은행나무 밑이어서 향교나 서원에는 은행나무가 많다. ⓒ 안사을
▲ 대성전, 동무와 서무 대성전 또한 문묘와 성균관 다음으로 큰 규모다. 밤나무와 아카시아나무가 가득한 숲 덕분에 공기 또한 싱그러웠다. ⓒ 안사을
풍경이 남다른 천 품, 황혼의 부석사... 빛살가루 뿌려진 모습
상주를 벗어나 예천을 거쳐 영주 방향으로 가다 보면 풍경이 남다른 천을 만난다. 수심이 낮아 바닥이 훤히 보이는데 수량이 풍부하여 끊임없이 흐른다. 마치 거대한 아기가 천진한 손으로 모래놀이를 하듯이, 물줄기가 모래톱을 주무르며 굽이친다.
지켜보고 있자면 이 흐름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 같다. 아니, 생명체가 맞다.
이 아름다운 곡선 안에 폭 담긴 작은 마을이 있다. 물 위에 떠있는 섬 같은 마을이라는 옛 명칭을 간직한 곳이다. 지금은 차가 오갈 수 있는 작은 다리(수도교)가 놓여있지만 불과 40여 년 전만 해도 해마다 보수하거나 새로 놓아야 하는 외나무다리로만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현재는 그 나무다리를 복원해 놓아 관광 거리로 만들었다.
하회마을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고 명성도 낮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고즈넉했다. 관광지로 개발된 지 오래지만 상업화되었다는 느낌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택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전주의 한옥마을과 매우 비교되는 장면이었다. 조만간 다시 와서 고택 체험과 더불어 모래톱에서 유유자적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곡선과 곡선, 그리고 곡선이 만나 자아낸 풍경 ⓒ 안사을
▲ 어느 고택 싱그러운 햇살에 비춰보니 색색깔 빨래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 안사을
▲ 무섬마을의 절반 마을 뒤편 언덕에 올라 담은 사진 ⓒ 안사을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일부러 부석사에 도착하는 시각을 늦게 잡았다. 해가 지기 직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기 때문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뒤를 돌면 기와 용마루 뒤로 소백산맥의 산자락이 겹겹이 압축되어 보이고, 오른편에서 비스듬히 들어오는 황혼의 조명이 골짜기마다 빠짐없이 빛살가루를 뿌린다.
이맘때의 부석사는 사찰이라기보다는 한국적인 미가 가득한 하나의 큰 정원 같다. 철쭉이 군데군데 피어있고 연둣빛에서 진한 녹색을 향해가는 나무는 마치 동자승이 청년스님이 되어가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건물과 건물이 가깝고 계단은 가파르며 빈틈없이 각종 나무가 살고 있으니, 뜰이 외롭게 널찍한 다른 절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 부석사 범종루 저녁 석양이 비춘 범종루의 모습 ⓒ 안사을
때마침 초파일 전날이라 연등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오후 7시 30분이 되면 연등에 불이 들어올 것이라는 어떤 이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인공의 조명을 경치로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절 마당에 피어나는 불빛은 소원과 정성이라는 의미에서 자연과 어울리는 한 편의 그림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저마다 명당을 찾아 점등을 기다렸다. 이윽고 불이 들어오자, 지켜보던 사람들의 나지막한 환호성이 퍼졌다.
▲ 연등과 부석사 안양루 앞에서 찍은 모습 ⓒ 안사을
어둠은 금세 찾아왔다. 부석면에 딱 한 군데 문 연 식당이 있어서 저녁을 해결할 수 있었다.
마구령을 넘어 김삿갓계곡으로 가, 역시 딱 하나 남은 민박집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힘차게 흐르는 계곡과 한껏 생기를 머금은 신록을 만끽했다. 마지막날 여정이었던 '조선민화박물관'은 따로 지면을 할애해 쓰고 싶을 정도로 놀라운 곳이었다.
내려가는 길은 다시 대각선이었다. 두고 가는 풍경들이 많이 아쉬웠다. 특히 무섬마을과 상주는 이번 여행을 '사전답사'격으로 삼기로 했다. 다시 방문할 때는 고택에서 몇 밤, 상주보 오토캠핑장에서 몇 밤을 보내며 못다 즐긴 곳을 천천히 누릴 것이다.
여러 모로 날씨도 좋고, 지역 축제들이 다가오는 시기다. 하지만 5월 연휴가 다 지났다고 슬퍼하지는 말자. 6월 선거일(3일), 현충일(6일) 등 빨간 날이 우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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