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을 연재하는 까닭은 자연과 인간, 삶과 사유를 잇는 다리로서 글을 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산을 오르며 만나는 풍경과 들꽃, 그 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인문학적 질문과 깨달음을 붓글씨와 함께 풀어내며, 독자와 함께 마음의 결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잠시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는 사색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기자말] |
주변 사람들은 나를 꽤나 점잖고 잔잔한 호수처럼 평온한 사람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내 안에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거세게 일렁이는 파도가 늘 숨어 있는 듯하다.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책과 씨름하며 작가이자 편집자로 살아왔고, 마음 공부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자부했지만, 예순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현듯 격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여전히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다.
고요했던 어느 주말 아침, 쨍-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뒤이어 아내의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에구머니나!"
아내가 그릇을 떨어뜨린 모양이다. 당황한 듯 떨리는 아내의 목소리에, 내 안의 평온했던 호수에도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듯 순간적으로 격렬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산산이 깨진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어휴, 또야!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빼놓고 살아?"라는 날 선 말이 튀어나왔다.
예기치 않은 감정의 파도, 내가 듣기에도 매정한 내 목소리
▲ 부부 사이의 감정은 때론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서, 아주 사소한 일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한다(자료사진). ⓒ mitzmoco on Unsplash
산산이 부서진 유리 그릇 조각들과 망연자실한 아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즉각 날 선 반응을 보이는 아내. 순식간에 싸늘한 침묵이 주방을 감쌌다. 부부 사이의 감정은 때론 날카로운 칼날과 같아서, 아주 사소한 일에도 깊은 상처를 남기곤 한다.
특히 오랜 세월 함께해 온 관계일수록,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예상치 못한 깊은 흉터를 남기기도 한다. 알뜰살뜰 살림을 꾸려온 아내의 작은 실수 앞에서조차, 순간적으로 쏘아붙인 나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매정했다. 아차 싶었다.
'그동안 쌓아온 마음 수련의 깊이가 고작 이 정도였던가?'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밀려왔다. 이미 뱉어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것. 그 짧은 순간의 분노가 얼마나 덧없고 어리석은 감정이었는지 곱씹었다.
"내가 그깟 일로, 말이 심했네요. 화내서 미안해요."
나지막한 사과를 건네고 서둘러 아내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오랜 세월의 경험칙이다. 잘못했을 때는 최대한 빨리 군말 없이 사과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가끔 혼자 산중을 거닐며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곧 무위자연의 꿈을 꾼다. 세속의 명리보다 도가풍의 사상을 더 좋아하기에 이따금 홀로 조용한 산을 찾아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붓을 들고 종이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묵향 속에 분노를 다스린다.
▲ 우리는 정말 사소한 것에 감동을 받는다 우리는 무엇에 감동을 받는가? 정말 사소한 것이 잔잔한 행복을 느낀다. 들에 핀 이름 없는 꽃을 보고도 감동을 받는다.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 이명수
그 시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조용히 되새겨 본다. 산중에서 홀로 써 내려가는 붓글씨는 대개 내 마음을 돌아보는 성찰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모색하는 나만의 고독한 궁리인 셈이다.
물으라,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가?
언젠가 문득 붓을 들어 '화생화(火生禍)' 세 글자를 써 내려간 적이 있다.
검은 먹물이 스며든 종이 위에 새겨진 이 세 글자는 즉석에서 내가 쓴 한자의 조합인데, 비록 즉흥적으로 떠올렸지만 불길이 모든 것을 태울 듯 격렬한 감정은 오랜 공든 탑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깊은 후회만 남긴다는 이치였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처럼 느껴져 마음 깊숙이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 밑에 "火(화)는 禍(화)를 부른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처럼, 격한 감정은 오랜 시간 쌓아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고, 깊은 후회와 아물지 않는 흉터만을 남긴다."라고 썼다.
▲ 火生禍(화생화) 화는 재앙을 낳는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잠시 숨을 멈추고 생각하면 제법 신통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 이명수
장난스럽게 "음, 걸작이로다! 누구의 작품인고?" 하면서 한참 동안 붓글씨를 바라보며 스스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지나가던 등산객이 글씨와 그 의미에 감탄하며 탐을 냈다. 나는 흔쾌히 건네주었다.
순간의 깨달음이 다른 이에게도 작은 울림을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래서 나는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끼지 않고 붓글씨를 건넨다. 물론, 제대로 서법을 익히지 않고 휘갈긴 붓장난 같은 글씨라 내겐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의 감정을 담았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산중에서 붓을 천천히 움직여 한 글자씩 써 내려가는 행위는 격렬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히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과정과 닮아 있다. 검은 먹이 흰 종이에 스며들듯, 분노의 감정도 내 안으로 스며들어 그 흔적을 남기지만, 붓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승화시키는 힘을 얻는다.
▲ 산에서 즐기는 인문학적 붓장난 산속을 거닐면 내 마음을 수양할 수 있는 선인들의 말이 생각날 때가 있다. "선행기언 이후종지(先行其言 而後從之)" 자기가 한 말을 실행하게 되면 남들도 따르게 된다. 그 밑에 그때 떠오르는 생각을 쓱쓱 쓰는 형식으로 붓장난을 하며 논다. 야옹거리며 우는 고양이는 쥐를 잡을 수 없다. 말은 실천이 뒤를 좇아야 한다.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말은 항상 신중하게 해야 한다. ⓒ 이명수
이처럼 적잖은 시간을 마음 수양에 쏟았음에도, 때로는 깊은 옹달샘 밑바닥에서 갑자기 거센 물줄기가 솟아오르듯 감정이 요동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후회의 감정이 밀려왔고,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그깟 일에 왜 그토록 흔들렸던가?', '결국 분노 끝에 남는 건 텅 빈 후회뿐인데…'.
그 순간 그 감정에 휩싸였던 '나'는 과연 진짜 '나'였을까? 때로는 산바람처럼 스쳐가고, 때로는 짙은 안개처럼 맴돌며 끊임없이 나를 성찰의 길로 이끄는 화두이다.
찰나의 분노, 영원한 후회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소설 <악마>에서 순간적인 욕망과 함께 불현듯 찾아오는 찰나의 분노가 한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이끄는지 예리하게 통찰한다. 사소한 질투심에서 비롯된 예브게니의 분노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한다.
▲ 인향만리(人香萬里) 남양주 축령산전망대에서 산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속의 욕심이 참 하찮게 생각되기도 한다. 꽃은 지기 때문에 아름답고, 사람의 향기는 멀리가기 때문에 그리운 것이다. ⓒ 이명수
물론 소설 속 상황은 극단적이지만, 40년 가까이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를 접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껴온 나 역시, 때로는 사소한 감정의 불씨 하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후회와 상처로 얼룩진 순간들을 경험해 왔다. 톨스토이는 이 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눈 깜짝할 사이에 타오르는 분노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우리에게 묵직한 경고를 던지는 것이다.
마치 작은 불씨 하나가 순식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화재처럼, 찰나의 분노는 소중한 시간을 덧없이 흘러가게 만들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후회의 순간들을 가슴 깊이 새겨놓는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온 관계는 한순간의 격렬한 감정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에는 깊은 흉터가 남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용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젊은 날의 나 역시,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고 나면 순간적으로 후련함을 느끼곤 했다. 하지만 수많은 독서와 또 스스로의 감정을 차분히 되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깨달았다. 그 일시적인 해소감 뒤에는 어김없이 씁쓸한 후회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 봄꽃이 거저 피는 것을 보았는가? 산에서 보는 야생화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관화미심(觀花美心)-꽃을 보면 마음을 아름답게 하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 이명수
진정한 시원함은 감정을 터뜨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차분히 다스리고 마침내 평정을 되찾았을 때 비로소 깊이 느껴지는 법이다. 마치 산속에서 붓글씨를 쓰듯, 격렬한 감정을 천천히 갈아내야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만의 '불언3(不言3) 법칙'
오랜 시간 묵묵히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을 탐구해 온 끝에, 마침내 삶의 지혜가 담긴 세 가지 간결한 원칙을 정립했다. 바로 나만의 '불언3(不言3) 법칙'이다.
첫째, 불필요한 불평은 입 밖으로 내지 않기.
둘째, 감정에 휘둘려 목소리 높이지 않기.
셋째, 마치 타인의 감정을 바라보듯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응시하기.
이 세 가지 원칙을 의식적으로 실천하기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사소한 다툼에서도 불필요한 언쟁이 현저히 줄어들었고, 예상치 못한 감정적인 동요에도 이전보다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거친 파도가 잠든 잔잔한 바다처럼, 내면에도 평화로운 안정이 찾아왔다.
갈등 상황에 직면하면, 나는 일단 이 세 가지 원칙을 먼저 떠올린다. 불평 대신 침묵을, 고함 대신 차분한 목소리를, 격렬한 감정 대신 냉정한 관찰자의 눈을 가지는 것이다. 마치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한 편의 드라마를 관람하듯, 격렬하게 요동치는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것이다.
▲ 축령산에서 만난 꽃창포 꽃창포의 꽃말을 찾아보니 '심부름' 또는 '소식'이다. 하늘의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땅위에 심부름을 왔다가 구름이 무지개를 걷히게 하면서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꽃창포로 변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꽃창포 꽃봉오리는 붓을 닮았다. 붓글씨를 쓰면 멋진 글씨가 나올 것도 같다. ⓒ 이명수
때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감정의 소용돌이로부터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 가장 현명한 해답이 될 수 있다. '뜻이 맞지 않는 사람과는 억지로 함께하지 말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억지로 서두르지 말라(不如意事常八九, 可與語人無二三)'는 <채근담>의 가르침처럼,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을 때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이는 곧 '불언3 법칙'의 세 번째 원칙인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응시하기'와 맞닿아 있다.
분노는 결국 스스로를 향한 총과 같다. 방아쇠를 쥐고 있는 것도, 총구가 향하는 곳도 결국 자기 자신이다. 상대방이 화를 낸다고 해서 똑같이 분노로 맞서는 사람은 세 번 패배한다. 상대에게 지고, 자신의 감정에 지고, 결국 홀로 외롭고 쓸쓸해진다. 이제 고희, 만 7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니 분명히 안다. 분노는 낼수록 내 삶의 품격을 깎아내린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짬이 날 때마다 '화생화(火生禍)'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스스로를 경계한다. 마치 산중에서 붓을 들어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가듯, 격렬한 감정이 일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감정을 차분히 응시하고 다스리려 노력한다. 분노의 불씨가 '화(禍)'라는 재앙으로 번지지 않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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