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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파면된 내란우두머리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친위쿠데타는 대한민국 헌정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다행히, 위대한 국민들은 내란 세력에 맞서 이를 지켜냈다.
겨우내 광장을 지키며 "윤석열 탄핵!"을 외치고 또 외쳤던 함성은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탄핵 정국을 거치며 우리는 헌법의 무게와 의미를 새삼 되새겨볼 수 있었다(
헌법 전문보기). 이에 따라 최근에는 '헌법 필사'도 젊은 층에서 유행이다. 시중 서점가에는 헌법 및 탄핵 사건 선고 결정문 등을 필사하는 책들이 매대를 장식 중이다(탄핵 때 책 <헌법 필사>는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대한민국 헌법의 뿌리
▲ 헌법재판소는 4월 4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을 선고했다. 사진 윗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당시 헌재 대심판정에 앉은 정계선, 문형배, 정형식, 김복형, 조한창, 정정미 헌법재판관, 윤 대통령, 이미선, 김형두 헌법재판관 ⓒ 연합뉴스
이 열풍을 보면서 문득 대한민국 헌법 제1조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다 함께 톺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필사 챌린지를 제안해 보기로 했다. 마침 '개헌'이 화두인만큼, 임시정부의 헌법에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점은 없을지에 대해서도 다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다.
필사 챌린지는 지난 15일 인스타그램 '대한사람(@kiaquot)'을 통해 스타트를 끊었다. 해당 채널은 '역사학도가 소개하는 독립운동사' 콘셉트로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알리기 위해 2023년 1월 개설한 계정이다. 보통 어록과 투쟁사를 소개하는 용도로 활용하지만,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반대 운동 등 윤석열 정부에 저항하는 시민운동 역시 여기서 전개해 왔다.
규칙은 단순하다. 손글씨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을 노트에 베낀 뒤, SNS에 올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챌린지를 진행할 사람들을 태그로 지목하는 방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수립 이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5차에 걸쳐 헌법을 개정했으며, 이에 따라 총 여섯 종류의 헌법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중 어떤 헌법도 좋다. 헌법 조문 전체를 베끼지 않아도 좋다. 마음에 드는 구절 한 문장이라도 손글씨로 한 번 옮겨보자고 했다.
뜨거운 호응... "헌법 최초 만든 이들 떠올렸다", "친일행위 처벌 가능했으면"
▲ 인스타그램 '대한사람(@kiaquot)'을 통해 시작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필사 챌린지 (2025.4.15). 현행 헌법 전문과 1조는 같지만('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2조부터는 살짝 다르다. ⓒ 김경준
필사 챌린지를 제안한 직후, 여러 사람이 공감을 표하며 동참의 뜻을 밝혀왔다. 그렇게 저마다 SNS에 임시정부 헌법을 필사하고, 거기서 지목받은 이들이 다시 필사 릴레이를 이어가고 있다(23일 기준 7명 참여). 필사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을까.
한국 근대사를 전공하는 30대 대학원생 서태원씨(한양대 사학과)는 "부끄럽게도 역사학도임에도 이번에 처음 임시정부 헌법을 읽어봤다"며 "필사를 하는 동안 헌법을 처음 만든 분들의 마음과 의지를 되새겨봤다"고 계기를 밝혔다. 서씨는 "임시정부 헌법을 보면서 지향 삼아야 할 조항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며 임시정부 헌법의 '의원내각제'적 요소에 주목했다.
대한민국 최초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은 제2조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이를 통치함"이라고 못박고 있다. 또 3차 개헌을 통해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약헌>(1927) 역시 "대한민국의 최고권력은 임시의정원에 있음"(제2조)이라고 하여 의회에 최고 권력을 부여했다. 임시약헌에서는 "임시정부는 국무위원으로 조직한 국무회의의 의결로 국무를 총판함"(제28조)이라는 조항이 추가되어 국무위원들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임시정부의 개헌사는 곧 '민주공화정 발전사'였다. 서씨는 "정치권이 임시정부 헌법을 공부해야 한다"며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임시정부는 1925년 이승만 탄핵 후 임기 제한이 없는 대통령제의 폐해를 깨닫고 2차 개헌을 통해 임기 3년의 국무령제를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3차 개헌을 통해 임시의정원에 최고 권력을 부여한 뒤 집단지도체제를 채택, 내각책임제로의 완전한 전환을 꾀했다. 윤석열 내란 사태 이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권력구조 개편이 화두인데, 임시정부의 헌법이 향후 개헌에 있어 좋은 본보기가 아닐까."
▲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헌법,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 臨時憲章). ⓒ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20대 정민규씨는 "임시정부 헌법 필사는 왜 우리가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해야 하는지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며 "개헌을 통해, 아직도 해결 안 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 조항이 생겼으면 한다"고 역설했다.
우드버닝(인두화) 작가 겸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는 30대 이재인씨 역시 "격동의 탄핵 을 거치며 헌법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참여하게 됐다"며 "대통령을 비롯, 자격 없는 고위공직자들을 끌어내릴 수 있는 국민투표권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내기도 했다.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는 40대 중반 박아무개씨는 "사실 임정 헌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는데 직접 쓰면서 큰 공부가 됐고 역사의식도 강해졌다"며 "대한민국 정치체제를 민주공화제로 규정한 임시헌장 제1조를 보면서, 우리가 자유를 누리며 사는 게 독립운동가들 덕분임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헌법을 쓰며 새삼 느낀 바가 많았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를 꿈꿨던 독립투사들의 이상과 열망을 재확인한 것이다. 예컨대 제정 이후 1차 개헌 당시까지도 존속했던 '구황실(대한제국 황실) 우대 조항'이 2차에 폐지된 것을 보면서, 비로소 대한민국이 제국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민국'으로 거듭났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전엔 "3.1대혁명"이었던 3.1운동... "역사성 볼 때 '혁명'이 타당"
▲ SNS와 단톡방에 올라온 시민들의 임시정부 헌법 필사 인증샷 모음 ⓒ 김경준
한편으로 정치권에 제안하고 싶은 메시지도 생겼다. 3.1운동 명칭을 '3.1혁명'으로 바로잡자는 것.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렇다면 임시정부 헌법은 어땠을까?
"(…전략) 우리 국가가 강도 일본에게 패망된 뒤에 전민족은 오매에도 국가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무수한 선렬들은 피와 눈물로써 민족자유의 회복에 노력하여 3.1대혁명에 이르러 전민족의 요구와 시대의 추향에 순응하여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일체 제도에 자유, 평등 및 진보를 기본정신으로 한 새로운 대한민국과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가 건립되었고 (…후략) -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
제5차 개헌을 통해 제정된 임시정부 마지막 헌법은 3.1운동을 '3.1대혁명'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역사학계·법학계 일각에서는 3.1운동의 명칭을 3.1혁명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1운동의 헌정사적 의의를 고려해볼 때, 운동보다는 혁명이라는 명칭이 적확하다는 것이다.
원로역사학자 윤경로는 "3.1운동이 지닌 역사성은 '운동' 차원을 훨씬 넘어 '혁명성'이 대단히 높다"며 "민족 내부의 기존 체제를 전복한 혁명은 아니지만 수천 년 내려오던 봉건왕조의 제국에서 백성이 주인 되는 민국, 다시 말해 제국에서 민국으로의 혁명적 단초를 제공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3.1운동보다는 3.1혁명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역설한 바 있다.
현재 야당을 중심으로 개헌시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헌법에 5.18 정신을 수록하는 것만큼이나 대한민국을 잉태한 3.1운동의 역사적 위상을 제고할 수 있는 명칭 바로잡기가 필요하다.
독자 여러분께도 제안한다. 임시정부 헌법을 한번 필사해보자(
'임시정부 헌법 열람' 바로가기). 우리가 임시정부 헌법에서 계승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한번쯤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
덧붙이는 글 | 원로역사학자 윤경로 발언 출처는 여기에서 참조했다. 윤경로, 「3·1절을 3·1혁명절로 바꾸자」, 『3.1혁명 정명〔正名〕찾기 학술 심포지엄 자료집』, 2015, 대한민국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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