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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고속도로가 뚫려 지금이야 지척이지만, 예전에는 오지나 다름없었다. 이른 시각 출발해도 도착하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있었다.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로 두세 시간은 달려야 서산, 거기서 다시 완행버스를 타야 겨우 닿는 곳이었다.

90년대 초반, 이곳 찾을 일이 잦았다. 당시 첫 직장에서 내가 맡은 업무가 '해미 도시계획'이었다. 당시 관련 법에 따라 도시기본계획과 재정비계획을 수행하는 절차였다.

해미읍성(1872년지방지도_부분) 둥글게 그려진 성곽, 해미천, 산줄기 등이 간결하게 표현되었다. 읍성 안에는 동헌, 객사, 청허정 등이 빼곡하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그때도 읍성은 위풍당당했고, 남문 중심의 저잣거리는 아담했다. 부챗살처럼 펴진 길 따라 낡은 집들은 옹기종기 평화로웠다. 저자는 해미천을 건너지 않았고, 가톨릭 성지엔 아는 사람만 알음알음 찾아 들었다. 해미성당은 소담했다. 순교성지사업을 주관하던 신부님께서 휑한 순교 터 작은 오두막에서 기거하신 걸로 기억한다.

그 신부님과 당시 많은 얘길 나누었다. 도시계획에 순교성지를 여하간 반영해야 했기에 당연한 순서였다. 다정다감하고 박학하신 분이라 도움도 많이 받았다. 가톨릭 역사는 물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여러 생각을 주고받았다.

성지를 꾸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결기 서린 표정도 생생하다. 유쾌한 분이셨고, 잦지는 않았으나 한번 잔을 들면 곧 새벽이기 일쑤였다. 비워진 술병만큼 가톨릭과 해미에 대한 지식은 넓고 깊어만 갔다.

해미순교성지 1866년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신자가 순교하였다. 내포지역 무명 순교자 터인 이곳은 1995년 이후 각고의 노력으로 성지화를 완료한다. 교회를 세우고, 성소를 복원하였으며, 무명 순교자 무덤을 이장 조성하였다. ⓒ 이영천

신부님 노력이었는지, 1995년 이후 순교지는 성지화하였다. 수많은 가톨릭 신자의 모금에 재정을 기댔고 일을 책임진 성직자 여럿이 노력한 결과였다. 이제는 어엿한 '국제성지'가 되었다. 예루살렘이나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과 같은 반열이라는 의미다. 1천여 무명 순교자의 피맺힌 한과 목숨으로 대신한 종교적 순종이 국제성지라는 메카로 거듭난 셈이다.

그 이면을 살피다 보면 내포의 군사 중심지였던 해미읍성이 보인다. 순교성지 '십자가의 길 14 처' 중 4곳이 읍성과 직간접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조선의 집약적이고 폐쇄적인 어두운 단면마저 엿보인다.

소담한 해미읍성, 찾는 발길은 많아졌지만

옛집에서 오붓하게 끓여내던 뚝배기가, 몇 해 전부터 너른 남문 앞길에서 뜨끈하게 맛을 우려내는 중이다. 옛집이 더 운치 있었는진 모호하나, 깊은 맛으로 든든하게 한 끼니 달래기엔 너끈하다.

진남문 해미읍성 정문인 진남문. 사진 속 파란 안내판 뒤 성벽엔 '公州'가, 왼쪽 비석 뒤 성벽엔 '淸州'가 각자되어 있다. ⓒ 이영천

진남문 오른쪽 성벽엔 공주, 왼쪽엔 청주가 새겨져 있다. 이는 그 지역 백성이 동원되어 성곽을 쌓았다는 표식이다. 휘적휘적 진남문에 들어 뒤돌아보면, 돌문 보에 새긴 붉은 글자 중국 연호가 의아하다. 조공국 이마에 새긴 주홍글씨일까, 심기가 살짝 흔들린다.

곧장 성벽에 오른다. 멀리 담수호가 되어버린 가뭇한 간월호가 어렴풋하다. 낡았던 집들은 수십 년 사이 죄 옷을 갈아입었고, 거리는 밝고 화사해졌다. 진남문에서 해미천까지 뻗은 길(남문1로)이 넓어졌다. 남문 앞에서 동-서로 잇던 옛 국도(남문2로)는 단장하여 깔끔해졌고, 걷는 이들을 배려함으로써 더 예뻐졌다.

길이 표정을 바꿈에 따라 상가며 집들도 추레한 근대화의 때를 벗고, 예스러운 읍성과 조화로워지려는 발버둥이 반가울 따름이다. 문화재보호구역으로 강력하게 규제되는 건축행위에 반하여, 읍성이 끌어들이는 그득한 발길이 법적 제약을 상쇄해내길 빌어본다.

요리 방송 등으로 젊은이 발길이 빈번해졌으나, 지역에 어떤 자긍심을 주었는지 의문이다. 덕분에 해미라는 소담한 도시가 많은 사람에게 각인은 되었을 터다. 그러함에도 내밀한 도시의 속살을 제대로 보여줬을까?

해미읍성의 봄 홍예문으로 들어서 진남문 안쪽에서 본 읍성. 동헌과 청허정, 호야나무가 마치 스크린처럼 보인다. ⓒ 이영천

문화재도 관심과 시선에 따라 변하나 보다. 무성한 풀과 퀭한 바람이 주인이던 읍성에 변화가 찾아온 건, 지방 자치제 이후 유행처럼 불어 닥친 축제 때문이다. 축제는 다양한 명목으로 추진되었고, 그 바람에 수면으로 부상한 게 지역의 문화와 역사, 인물이다. 성곽이 오롯한 해미는 그런 측면에서 서산을 대표할 만한 축제로 최적이었다.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면서 눈길을 끌었으나, 읍성이 축제 무대로 활용되는 씁쓸함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이를 통해 읍성 가로망과 시설물이 복원되는 촉매제로 작용하기는 했다. 지독한 역설이다.

충청 병영성, 군권 쥐락펴락하던 위용

동문으로 향한다. 마법처럼 방망이 소리가 들리고, 소리를 따라 초가에 드니 아낙네 몇의 다듬질이 분주하다. 일정한 리듬에 퉁탕거리는 소리가, 딱 어릴 적 그 광경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맞추던 각인된 장단, 잃어버린 옛 기억을 두들겨 깨우는 듯하다.

동헌 옆 가지런한 돌계단을 오르니, 대숲 사이 단정히 청허정이 앉았다. 읍성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천수만으로 침범하는 왜구를 방어하던 성곽답게, 전망대는 물론 한바탕 풍류에도 제격이다. 북벽으로 늘어선 울울한 솔숲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단정하고 매끄러운 소나무 품새로 보아 성곽이 잘 관리되고 있다는 인상을 충분히 받는다.

해미읍성 관청 바로 앞이 동헌이고 그 옆의 건물군이 내아다. 그 앞에 객사가 멀리 보인다. 동헌은 면사무소로, 객사와 내아는 사라져 초등학교 차지였던 걸 복원하였다. ⓒ 이영천

솔숲이 뿜어내는 피톤치드를 한껏 받으며 객사로 내려온다. 1970년대 중반까지 초등학교 차지던 걸 복원해냈고, 그 뒤편엔 내아가 앉았다. 옆 동헌의 솟을삼문이 우뚝하다. 서산의 '서령군문'을 본떴다. 동헌은 충청도와 내포의 군권을 쥐락펴락하던 위용을 가감 없이 내보인다.

덕산에서 해미로 병영을 이전한 1416년을 전후하여 성을 쌓기 시작해 1421년 1.8km 둘레에 5~6m 높이의 성벽을 완성한다. 230여 년간 병영이다가 1651년 청주로 옮겨 갔어도, 내포의 군권을 관장하였다. 그리도 긴 시간 당당했으니 좀 뽐내도 너그러이 봐 달라는 표정의 동헌이다.

저 위용이 일제강점기 면사무소였으니, 자존심이 오죽 상했을까? 그뿐이랴. 군권을 휘두르던 다른 시설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논밭과 민가에 자리를 앗기었으니, 뒷방 늙은이처럼 처연하지 않았을까.

호야나무 가톨릭 박해 당시, 바로 옆 옥에 갇힌 이름도 남기지 못한 신자들을 끌어다가, 이 나무에 매달아 갖은 고문을 가하고 목숨을 앗아갔다. ⓒ 이영천

동헌 앞 둥근 옥사와 키 큰 호야나무가 묘한 긴장감을 드리운다. 호야나무 중간에 패인 상처의 실체는 무얼까? 주변에 선 사람들의 시선도 여럿이다. 조용히 성호를 그리는 사람부터 망연히 쳐다만 보는 이들, 그저 나이 든 나무라며 어떤 호기심도 보이지 않는 부류 등 제각각이다.

한꺼번에 돌로 쳐서 박해... '죽인 뒤 보고 하라'는 왕

내포의 가톨릭 박해는 1801년부터다. 삽교천과 안성천이 흐르는 곳까지 뻗친 해미 군권은, 박해에서도 위세를 떨친다. 1866년 병인박해 전까지 순교자가 무려 130여 명에 이르렀다.

병인박해는 잔혹함 그 자체였다. 쇄국으로 나라를 틀어막고 벌인 전국적인 박해였다. 대원군의 분노가 폭발한 내포에선 특히 극악했다. 독일인 주도로 감행된 남연군 묘 도굴사건 때문이다. 묘 길잡이로 가톨릭 신자가 지목된다. 왕은 해미에 '죽인 후 보고 하라'는 선참후계의 특권을 부여한다.

읍성 감옥은 신분과 성별을 분리·수감하는 구조다. 갇힌 신자들이 차례로 호야나무에 매달려 신앙이라는 무형, 목숨이라는 유형의 찰나의 간극을 시험받았다. 신자들은 기꺼이 신앙이라는 무형을 택한다. 서문 밖 해자를 건너던 자리개 돌에 차례로 끌려가 죽는다.

자리개 돌 해미읍성 서문 밖에서 해자를 건너던 자리개 돌. 박해 당시 이 돌에서 무명의 신자들이 수도 없이 순교하였다. 읍성 서문 밖에서 성지로 옮겨 왔다. ⓒ 이영천

죽임도 지쳤는지 여럿을 한꺼번에 죽이는 방법을 시도한다. 여러 신자를 자리개에 눕혀 큰 돌로 내리쳤다. 진둠벙과 해미천에선 집단 생매장도 이뤄졌다. '서 있는 유해들'이 그 증거다.

신분이 높은 신자는 감영에 보냈으니, 천한 신분만 여기서 처형당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신자가 1천여 명이다.

당시 신자들이 암송한 예수 마리아를 여수(여우) 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성지가 '여숫골'이 되었다. 서산 본당 범 베드로 신부의 노력으로 1935년 일부 유해가 발굴되어, 음암면 성홍리 공소에 안장된다.

진둠벙 해미순교성지에 재현된 진둠벙. 해미천과 진둠벙에선 집단 생매장이 자행되었다. ⓒ 이영천

도시계획은 교구 요청에 따라 약 3만㎡를 종교용지로 지정했고, 천주교 측의 직접 매입에 따라 성지 영역이 획·결정되었다. 순교로부터 1백 년도 훨씬 더 지난 후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읍성 복원이 일찍 이뤄졌다는 점이다. 1963년 사적 지정 후 1970년대 초등학교를 비롯한 민가를 성 밖으로 이전시켰다. 오랜 사진에서 어마어마한 변화를 실감한다. 일제가 의도적으로 훼철하고 격하시킨 읍성의 위상을, 부족하나마 제자리에 돌려놓았을까?

무명 순교자를 기리려던 의지 서린 신부님 얼굴이 떠오른다. 밝은 표정으로 타인을 대하던 온화한 모습에서, 수많은 아픔을 껴안아야만 했던 묵묵한 해미읍성이 겹쳐 보이곤 한다. 옛집 정취는 아니어도 여전히 속 깊은 맛의 뚝배기처럼, 읍성 성벽에 부딪는 햇살마저 웅숭깊다.

해미읍성 성벽 동문 쪽으로 뻗은 해미읍성 성벽. 부서지는 햇살에 색색의 성벽이 웅숭깊다. ⓒ 이영천

성벽도 나이 들어갈 뿐이다. 변화하는 시간을 따라, 사라져 간 것에 대한 회한과 다가오는 것에 대한 번민을 읍성도 힘겹게 껴안고 갈 것이다. 듬직한 이에게서 받는 위안처럼, 색색의 돌들로 든든한 해미읍성에서 따뜻함을 흠뻑 받아안는다.
#해미읍성#해미순교성지#진남문#청허정#여숫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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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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