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써브웨이 동굴이 연출하는 바깥 풍경 써브웨이 동굴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면 기하학적인 풍경에 입이 떡 벌어진다. ⓒ 백종인
마을을 둘러싼 갖가지 형상의 붉은 바위산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거기에 붉은 바위층에서는 지구의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영어로는 '볼텍스(Vortex)', 우리말로는 '기'라 부른다. 사람들은 경이로운 자연을 보는 것을 넘어 치유, 명상, 영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기'를 받기 위하여 이곳을 찾는다. 이곳은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세도나(Sedona)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우리가 세도나를 방문한 것은 상쾌하고 시원한 날씨 속에서 붉은 바위산을 누비는 하이킹을 하고 싶어서였다. 세도나에서의 하이킹은 단순한 등산 이상이었다. 코스 곳곳에 숨어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바위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아찔한 바위를 타고 기어 올라가는 맛이 나이를 까맣게 잊게 했다. 게다가 산을 조금 깊숙이 들어가면 20도 가까운 날씨에도 녹지 않은 눈을 보고 만질 수 있었다.
벨 록과 코트하우스 버트 루프(Bell Rock and the Courthouse Butte Loop) 트레일: 7.4km
▲ 벨 록 캐시드럴 록과 함께 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진 벨 록은 이름이 말해주듯이 전체가 종 모양이다. ⓒ 백종인
벨 록(Bell Rock)은 캐시드럴 록(Cathedral Rock)과 함께 세도나를 대표하는 산으로 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벨 록은 전체가 종 모양이다. 또한, 바로 옆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코트하우스 버트(Courthouse Butte)를 끼고 있어 두 바위산 전체를 둘러싼 트레일을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세도나에서의 첫 번째 하이킹으로 벨 록과 코트하우스 버트를 끼고도는 트레일을 택했다.
7.4km에 달하는 벨 록 루프(Bell Rock and Courthouse Butte Loop) 트레일은 크게 오르내림이 없는 길이라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나, 그런 만큼 주차를 하려면 부지런해야 했다. 아침 8시경에 도착해 무사히 주차한 후 우리는 호기롭게 하이킹을 시작했으나 처음부터 입구를 헷갈리는 수고를 해야 했다. 루프를 돌고 난 다음 마지막으로 오르기로 한 벨 록 등반 길과 루프 길을 혼동한 것이다. 적당히 구름이 낀 하늘은 하이킹하기에 적당한 빛과 그늘을 제공해 주었다.
▲ 코트하우스 버트 벨 록 바로 옆에 웅장하게 솟아오른 코트하우스 버트를 둘러싼 트레일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한 무리의 붉은 바위산 속에 있는 기분이 든다. ⓒ 백종인
▲ 멀리서 바라본 케시드랄 록 벨 록을 뒤로하고 시계방향으로 돌다 보면, 오른편에 코트하우스 버트가 있고 왼편으로 멀리 캐시드럴 록이 보인다. ⓒ 백종인
벨 록을 뒤로하고 시계 방향으로 돌다 보니 오른편에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었다. 코트하우스 버트였다. 그리고 왼편으로 멀리 캐시드럴 록이 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한 무리의 붉은 바위산 속을 걷고 있는 셈이었다.
고인돌 같기도 하고 무쇠솥뚜껑 같기도 한 크고 넓적한 바위를 스쳐 지나가고, 검지와 중지를 모아 맹세하는 모습의 바위도 멀찍이 보면서 계속 걸었다. 다리가 조금 무거워질 무렵 갑자기 사람들이 붐비며 눈앞에 거대한 종이 나타났다. 벨 록에 다다른 것이다.
▲ 벨 록에서 만난 한 마리의 개 주인과 함께 벨 록에 온 개 한 마리가 우리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 백종인
벨 록 등반은 바위틈을 잡고 기어오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나 이후에는 능력껏 올라가야 했다. 저기까지만 가야지 하고 오르다가도 더 높은 곳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면 생각이 바뀌며 자꾸 기어 올라갔다. '무리하지 말자. 나이를 생각하자'를 되새기며 꾸역꾸역 올라오는 욕심을 누르고 멈춰 섰다. 주인과 함께 온 개 한 마리가 우리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데블스 브리지(Devil's Bridge) 트레일: 6.7km
데블스 브리지를 다녀오는 트레일은 쉬우면서도 붉은 바위산의 기막힌 풍경과 아슬아슬한 모험을 제공하는 무척 인기 있는 곳이다. 인기가 많은 만큼 주차도 힘들어 우리는 길어지는 해를 이용해 4시가 넘는 시간에 출발했다. 늦은 오후여서 그런지 올라가는 사람보다 돌아오는 사람이 더 많았다. 작은 언덕을 구불구불 따라가다 보면 길 양 옆에 선인장과 유카 식물이 즐비해 있고 멀리 보이는 붉은 바위산을 마주하였다.
▲ 데블스 브리지로 가는 트레일에 주차된 4륜구동자동차 세도나의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는 4륜구동자동차. 드라이브의 스릴과 신비한 경치를 동시에 만끽할 수 있다. ⓒ 백종인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4륜구동자동차가 주차된 다소 넓은 길을 건너 좁은 오솔길을 지나 가파른 바윗길을 마주했고,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데블스 브리지(Devil's Bridge)가 다 왔다는 표시이기도 했고 바위를 헤쳐 올라야 한다는 알림이기도했다.
길지 않은 바윗길을 헉헉거리며 오르니 움푹 들어간 동굴이 나타나고 그 건너편에는 보기에도 아찔한 아치형 천연다리가 버티고 있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간단한 계약(?)을 했고, 그런 약속에 우리도 동참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10분 정도 기다리니 차례가 왔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후들거릴 것 같았던 다리는 막상 올라가니 폭이 제법 넓었다. 사람들은 갖가지 포즈를 취했고 심지어 중국 무술을 시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데블스 브리지 가슴이 벌렁거리고 후들거릴 것 같았던 다리는 막상 올라가니 폭이 제법 넓었다. ⓒ 백종인
즐거운 모험을 끝내고 서로 한바탕 웃고 떠들다가 오던 길로 되돌아 가는데, 어느새 주위가 적막하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타닥타닥" 하는 낯선 소리가 들리고 마주한 길에 머리가 커다란 검은 물체가 나타났다. "멧돼지!"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뒤따르는 놈은 없는지,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지 잠시 기다리다 숨을 죽이며 조심조심 길을 건너 계속 나아갔다. 사실 멧돼지와 모양새는 비슷하나 전혀 다른 종류인 하벨리나(Javelina)로 멧돼지만큼 위험한 동물이었다.
아직도 긴장이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멀리 바라보니 지는 해에 바위산의 색깔이 신비로웠다. 잠시 후, 세도나의 하늘은 붉게 물들며 또 하나의 세도나를 연출하고 있었다.
▲ 늦은 오후의 세도나 지는 해가 비친 바위산의 색깔이 신비롭다. ⓒ 백종인
▲ 세도나의 석양 세도나의 저녁 하늘에는 또 하나의 세도나가 있었다. ⓒ 백종인
보인톤 캐넌(Boynton Canyon) 트레일: 13km
보인톤 캐넌(Boynton Canyon)을 모르는 사람들도 써브웨이 동굴(Subway Cave)은 안다. 그곳에 다녀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체력과 용기를 자랑한다. 그만큼 써브웨이 동굴은 동굴 자체도 독특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여정 또한 스릴 만점이다.
보인톤 캐넌을 가기 위해 전날처럼 아침 일찍 서둘렀다. 제한된 주차 공간도 이유지만 써브웨이 동굴이 붐비기 전 도착해야 사진 찍기도 좋고 동굴의 신비함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인턴 캐넌 트레일 자체는 힘든 코스가 아니었다. 오른쪽에는 붉고 거대한 사암 덩이가 우뚝 솟아 있고 왼쪽으로는 마을이 보였다. 트레일 초입에 있는 전망대는 체력 안배를 위해 나중으로 미루고 머릿속은 써브웨이 동굴 입구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명세에 비해 뚜렷한 표지판이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봄방학 기간이라 그런지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눈에 띄었다. 특히, 우리 앞에는 아들 넷과 온 가족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솟아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오른편 바위 절벽을 계속 오르내리며 뛰어다녔다.
3km쯤 걸었을 때, 땅바닥에 누가 막대기로 써 놓았는지 'CAVE'라는 글씨가 크게 보였다. 모르는 자의 친절에 고마워하며 왼쪽 길로 꺾어 걷다 보니 슬슬 가라지던 길이 사라지고 커다란 바위가 앞을 가로막았다. 동굴 입구였던 것이다.
▲ 써브웨이 동굴로 올라가는 길 아래에서 올려다본 동굴은 까마득한 곳에 있다. 동굴로 가려면 사암 벽 사이의 수직에 가까운 좁은 바위틈을 올라가야 한다. ⓒ 백종인
아래에서 올려다본 동굴은 까마득한 곳에 있었다. 동굴로 가려면 사암 벽 사이의 수직에 가까운 좁은 바위틈을 올라가야 하는데, 생각보다 잡을 것이 마땅치 않았고 짧은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도움을 받아 겨우 올라가면서도 내려올 일이 걱정되었다.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모험은 일단 끝이 났고 숨을 몰아쉬고 뒤를 돌아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 써브웨이 동굴에서 바위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 동굴에서 바위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정면에서 비추는 해와 함께 신비로웠으며, 카메라 앵글의 방향에 따라 삼각형, 마른모 등 온갖 기하학적 모습을 연출했다. ⓒ 백종인
동굴에서 바위틈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정면에서 비추는 해와 함께 신비로웠으며 카메라 앵글의 방향에 따라 삼각형, 마른모 등 온갖 기하학적 모습을 연출했다. 앞에서 뛰어다니던 아이들은 올라오는 길이 다소 무서웠는지 긴장해 있었고, 양쪽 경사면 선반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쉽고 미끄럼을 타는 느낌까지 받았다.
▲ 써브웨이 동굴로 가기 위한 긴 줄 다시 동굴로 가는 길옆의 산길을 치고 올라간 다른 동굴은 써브웨이 동굴과 가파른 좁은 선반 길로 연결돼 있었고, SNS를 위함인지 이 아슬아슬한 길을 어린아이들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통과하는 가족들이 보였다. ⓒ 백종인
다시 동굴로 가는 길옆의 산길을 치고 올라가니 또 다른 동굴이 나왔고 이 동굴들은 처음 올라갔던 동굴과 가파른 좁은 선반 길로 연결돼 있었다. SNS를 위함인지 이 아슬아슬한 길을 어린아이들과 함께 카메라를 들고 통과하는 가족들도 있었는데, 나이 든 사람이 보기에는 무척 무모해 보였다.
흥미진진한 동굴 모험을 마치고 보인톤 캐넌 트레일로 되돌아갔다. 대부분 사람의 목적지가 써브웨이 동굴이어서 그런지 사방은 조용하고 소나무 향내가 짙게 풍겼다. 힘들지 않은 오르막이 계속됐다. 숲은 깊었고 계곡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길이 점차 가팔라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질 무렵 트레일의 끝을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이제는 돌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아니다. 한 군데 더 갈 곳이 남아 있었다. 트레일 입구의 보인톤 캐넌 전망대(Boynton Canyon Vista)가 마지막 숙제였다.
▲ 보인톤 캐넌 전망대에서 본 세도나 써브웨이 동굴에서 절정의 순간을 잊지 못하는 우리에게 보인톤 전망대에서의 전경은 그저 흔한 세도나 경치 그 이상은 아니었다. ⓒ 백종인
거의 12km를 걸었으니 다리는 지쳤고 배가 고팠으나 계획했던 트레일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전망대를 올라갔다. 바윗길이라 지루하지 않았고 전망도 볼만했다. 하지만 써브웨이 동굴에서 절정의 순간을 잊지 못하는 우리에게 보인톤 전망대에서의 전경은 그저 흔한 세도나 경치 그 이상은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미국에서 3월은 봄방학의 계절이다. 대학생들은 친구들과 어린 학생들은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또한,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애리조나주와 유타주 등의 날씨는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고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기 전이어서 여행에 가장 알맞은 계절이다. 그래서 우리도 짐을 꾸려 ‘기'가 솟아 나온다는 애리조나주의 세도나로 향했다. 내가 사는 엘에이에서 운전하는 시간만 7시간 가까이 걸리는 이번 여행의 목적은 실체가 모호한 ‘기’를 받는 것보다는 붉은 바위산을 걷는 하이킹이었다. 4박 5일 동안 열심히 걷고 올라간 6곳의 트레일을 한 번에 다 풀어놓기에는 지면이 부담스러워 두 번에 걸쳐 이야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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