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애호가로서 국내외 문화유산 탐방과 여행, 건축물, 사찰 등을 살펴보는 데 관심이 많아 연재를 진행 중입니다. 이번 산불로 대한민국 곳곳 문화유산이 소실된 게 안타까워 이 기사를 작성했습니다.[기자말] |
▲ 지난달 25일 산불로 인해 가운루와 연수전 등이 전소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의 28일 오후 모습. ⓒ 권우성
2025년 3월, 경북 일대를 휩쓴 산불은 3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3천 여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경북도는 7일 산불로 주택 4199채가 불에 탔다고 발표했다).
이번 산불로 인해 입은 피해는 이재민 2000여 가구, 3314명 이상 등 대한민국 단일 산불 중 가장 큰 피해 규모라고 한다. 잿빛 뉴스가 이어지던 중, 가슴 아픈 속보 하나가 유난히 내 눈에 들어왔다.
"천년고찰 고운사 전소."
▲ 고운사 가운루. 2015년 촬영된 사진. ⓒ 국가유산포털(공공누리 제1유형)
화면을 멍하니 오래 들여다봤다. 문화유산 애호가로서 '언젠가 꼭 가봐야지'하고 지도 앱에 표시해 둔 곳이었다. 고운사의 가운루(駕雲樓)와 연수전(延壽殿)이 잿덩어리로 변했다. 경북 의성 단촌면에 있는 고운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681년).
물길 위에 세운 독특한 가운루, 고종의 기로소(연로한 왕족과 관료를 위한 예우 기관) 입소를 기념해 지은 전각인 연수전.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이 보관된 것으로, 더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든 귀한 유산들이다. 그 고운사가 불에 전소돼, 이제 다시는 우리 눈에 담을 수 없게 됐다.
▲ 경북 의성의 천년 고찰, 고운사가 3월 25일 화마에 휩싸인 가운데 불길을 진압하려 나선 경산소방서 대원들 모습 ⓒ 경북도청 소방본부 예방안전과
3월 25일 16시 50분경 결국 고운사가 산불에 스러졌고,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은 같은 날 17시 30분을 기해 국가유산 재난 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했다.
국가유산 경보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상 처음 경보 울려...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만휴정, 병산서원
▲ 지난3월 25일 산불로 인해 가운루와 연수전 등이 전소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의 28일 오후 모습. ⓒ 권우성
▲ 지난 25일 산불로 인해 가운루와 연수전 등이 전소하는 큰 피해를 입은 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의 28일 오후 모습. ⓒ 권우성
산불은 고운사를 집어 삼켰지만, 다행히 화마를 이겨낸 유산도 있었다. 눈에 띄는 사례는 안동 병산서원(세계유산 등재)과 안동 만휴정(명승, 영남의 대표 정자)이다. 병산서원은 불길이 3km 앞까지 뻗어 오는 다급한 상황에서 현판을 분리해 세계유교박물관으로 긴급 이송했고, 서원 주변에는 불길 확산을 막기 위해 지연제를 살포했다.
만휴정은 불과 5m 옆에서 잔불이 발견될 만큼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1천도까지 견디는 방염포 덕분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두 곳 모두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렇게 집계된 산불 관련 국가유산 피해는 총 35건이라고 한다(국가유산청, 지난 4일까지 집계).
국가유산청은 재난에 대비해 다양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과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위기관리 표준매뉴얼'과 '실무매뉴얼'을 마련했고, 문화유산 재난위험지도 개발도 시도하고 있다.
최근에는 드론, IoT 감지기, CCTV를 활용한 실시간 감시체계도 확대하고 있다. 또한 매년 2월 10일, '문화유산 방재의 날'에는 민·관 합동 훈련이 진행된다. 이와 함께 시민의 관심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행사도 함께 열린다.
▲ 재난, 산불에 대비한 국가유산청의 위기 대응 매뉴얼 ⓒ 박배민 디자인
국가유산청이 지난 1월 제작한 '국가유산 재난 위기관리 표준매뉴얼'은, 문화유산이 포함된 지역에 산불, 홍수, 지진 등이 발생했을 때 어떤 기관이 어떤 순서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세세히 규정한다. 위기 경보 단계는 '관심(Blue)–주의(Yellow)–경계(Orange)–심각(Red)' 네 단계로 나뉘며, 국가유산청은 위기 발생 시 가급적 '심각' 단계로 먼저 대응하고, 이후 상황에 따라 경보 수준을 조정하라고 기본 원칙으로 명시하고 있다.
재난이 발생하면, 국가유산청장은 즉시 중앙사고수습본부를 가동한다. 본부는 5개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문화유산이 있는 현장에는 수습관리반과 대응협업반이 파견된다. 이 두 반은 유산의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현장에서 긴급 보호 활동을 펼친다.
부석사의 보물 고려목판과 오불회 괘불탱을 영주소수박물관으로 이송(25일 21시~26일 02시)하고, 봉정사의 보물 목조관음보살좌상이 피신(26일 새벽,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대책반의 활약 덕분이다.
대부분 나무라 불에 취약... 재난 관리 예산은 1.8%, 공동체의 기억이 사라진다
▲ 3월 28일 오전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에서 산불에 대응하기 위해 기와집과 초가집이 대부분인 마을 안과, 마을 앞 강가에 소방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하회마을앞 강변에 서 급수차가 마을 안쪽으로 물을 퍼올리고 있다. ⓒ 권우성
또한 국가유산청은 단독으로 대응하지 않고, 소방청·경찰청·지자체와 통합지휘체계를 구성해 문화유산을 보호한다. 병산서원에서처럼 현판 분리와 이송, 사전 살수와 현장 통제가 실제로 작동한 사례는, 이 매뉴얼이 단지 문서에 그치지 않고 숙달되어 현장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매뉴얼이 완벽했다기보다는, 운이 따랐다고 보는 게 더 솔직할 것이다. 실제로 현장을 많이 다녀 봐도, 한국의 전통 건축물은 대부분 나무로 지어져 불길에 특히 취약하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준비하고 있음에도, 현장의 산불 대비는 여전히 부족해 보인다.
▲ [참고 사진] 공주 마곡사 영산전에 소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모습. ⓒ 국가유산포털(공공누리 제1유형) 재가공
전국의 목조 국가유산 다섯 개 중 하나는 소화기구가 다섯 개도 구비되어 있지 않다(545건 중 105건, 19.3%). 보물로 지정된 목조 건조물 가운데 소화설비가 전혀 없는 곳이 21곳, 화재경보장치조차 없는 곳이 25곳에 이른다. 수치 하나하나가 뼈아프다(2024년 민형배 의원실 자료 참조).
또한 문화유산 피해 여부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CCTV와 같은 방범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비중도 절반에 불과했다(국가유산 2790곳 중 1550곳, 55.6%).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뛰어나 영구적인 보존이 필요하다고 평가되는 국보조차 4곳이나 CCTV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2025년 강유정 의원실 자료 참조).
▲ 국가유산 CCTV 설치 현황 (천연기념물, 명승, 국가민속, 국가등록 제외) ⓒ 박배민 디자인
배정된 예산만 보더라도, 문화유산 관리에 대한 아쉬움은 크게 남는다. 2025년 국가유산청 전체 예산은 1조 3,875억 원. 그중 재난 관리에 쓰이는 돈은 240억 원뿐이다.
취약지역 문화유산 보존 예산 9억 원까지 더해도, 전체의 1.8%에 불과하다. 궁중 문화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219억이 책정되었다. 불을 막을 소화기도, 감시할 눈도, 현재 예산으로는 빠듯한 셈이다. 잘 '보존'되어야 잘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 2025년 국가유산청 전체 예산 대비 '국가유산 재난안전 관리' 관련 예산 비중 ⓒ 박배민 디자인
대한민국은 국토의 70%가 산지다. 그만큼 매 봄마다 산불은 예고된 재앙처럼 다가온다. 유산에 대한 위험은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데, 방어막은커녕 감시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제도도, 예산도, 인력도 부족했겠지만,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닐까. 문화유산은 어느 한 기관이나 전문가의 소유가 아니다.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다.
문화유산은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다. 시간을 품은 공동체의 기억이다. 지역 주민의 기억이며, 정서이고, 세대를 잇는 매개체다.
잿더미가 된 건물보다, 문화유산에서 살아 숨 쉬던 기억과 이야기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더 쓰라리다. 2023년 강릉 방해정(放海亭)과 상영정(觴詠亭)을 잃은 후, 고운사의 소실 앞에서 나는 또다시, 그 상실감 앞에 마주 서야 했다.
▲ 광주광역시 증심사에서 재난 상황을 대비한 문화유산 이송 훈련 (2025. 4. 1.) ⓒ 광주광역시 누리집 (공공누리 제1유형)
한 가지 묻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혹시 자신이 사는 동네에 어떤 문화유산이 있는지 알고 있을까?
앞으로 다시 한번 이렇게 소중한 유산을 지켜야 할 순간이 온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준비로 마주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불길이 스쳐간 자리에 다시 숲이 자라게 되듯, 문화유산 보호도 이제는 소멸 이후의 뒷수습만이 아니라 '예방과 준비'라는 숲을 미리 가꾸는 일이 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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