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기자말] |
꽃샘추위마저 물러가는 기미가 보인다. 한낮 기온이 어느새 10도를 넘겼다. 하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한 기운이 아직 강하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는 시기, 남도는 금세 꽃망울이 올라올 듯하지만 강원 산간 지역은 여전히 두터운 눈이 쌓여 있다. 봄을 맞이하는 시기, 필름카메라에 담은 지난겨울의 모습을 나누며 겨울과 잘 작별하고자 한다.
'한 달 늦은 뉴스'라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이고 싶다. 항상 여행을 다녀온 즉시 여행기를 쓸 수가 없다. 남은 필름을 소진해야 하고 아날로그로 기록된 사진을 디지털화하는 데에 역시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아무리 거듭 겪어도 지루하지 않다.
눈길 헤치고 법성포로 간 사연
▲ 복흥면의 한 중학교 우체통도 눈에 발길이 묶였다. ⓒ 안사을
원래 목적지는 전북 고창이었다. 서해의 진한 회색빛 수면 위로 새하얀 눈이 펄펄 날리는 광경을 보고 싶었다.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순창의 복흥면을 거쳐 장성을 지나 고창으로 가고자 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인 법성포 표지판에 그만 직진을 해버렸다. 영광 굴비가 나를 이끈 것인지 불교 최초 도래지로서의 영험함이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 온통 새하얀 논밭과 도로의 경계는 오로지 그 높이의 차이만으로 알 수 있었다. ⓒ 안사을
가는 길에 예약한 숙소는 우리가 도착해 방을 배정받자마자 '만실'이라는 팻말이 현관 계산대에 올려졌다. 깨끗하게 닦아놓은 복도에 하릴없이 눈 발자국을 잔뜩 남겨놓은 우리에게, 마음씨 좋은 주인장은 넉넉한 웃음과 함께 따뜻한 환영의 말을 건넸다.
"하이고, 눈사람이 따로 없네잉. 춘디 얼릉 들어와요. 방 따수울 것이여."
"네네. 고맙습니다."
"불편한 거 있으믄 인터폰 하시고이!"
오랜만에 듣는 남도 사투리가 정겨웠다. 왠지 모르게 길거리에 주렁주렁 걸려있던 굴비의 모습이 아주머니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3층이었던 숙소 창문을 열자마자 더 많은 굴비와 눈이 마주쳤다. 호텔 바로 옆 건물이 굴비 덕장이었다. 아파트 4층 높이는 족히 되어 보이는 곳에 굴비가 층층이 살고 있었다.
옛날 이곳은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칠산 해역은 조기가 지나가는 길목이고, 특히 이곳에서 산란을 하던 습성 덕분에 물 반 고기 반의 상황이 연출되곤 했다.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예전 같지 않은데, 그래도 법성포는 조기가 굴비로 변모하는 데에 필요한 가장 좋은 해풍이 불어오는 곳이어서 덕장으로서의 명맥은 여전하다. 창문을 열고 천천히 운전을 하고 있자니 바람을 따라 짭쪼름한 굴비의 향기가 코끝을 계속 스쳤다. 자린고비가 굴비를 입으로 먹지는 않았어도 코로는 잘 먹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평점이 괜찮은 한 식당을 정해 들어갔다. 1인분에 2만 원. 산지에서 먹는 정식치고 가격이 나쁘지 않았다. 보통 해당 음식이 유명한 곳에서는 오히려 비싸고 맛이 없는 일이 태반인데, 법성포는 그렇지 않았다. 손맛이 좋은 전남이기도 하고, 얼리지 않은 굴비로 바로 요리했기 때문인지 집에서 해 먹는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특히 반찬으로 나온 요리들이 참 인상 깊었다. 강진, 해남, 영광 등 이곳의 밥상이 유명한 이유는 주된 요리 못지않은 반찬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날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게장을 먹었다. 여느 집 냉장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밑반찬 또한 매우 맛있었다.
손에서 모락모락 나는 김... 눈 내린 해안이 절경
다음날 오전까지 눈이 계속 내렸다. 사람들이 제법 왔다 갔다 했지만 새눈이 금세 흔적을 지워, 처음 밟은 눈처럼 새 단장하여 우리를 설레게 해 주었다. 포구에는 썰물이 빠져나간 뒤 갯벌에 눈이 잔뜩 쌓여, 눈으로 된 바다 위에 배가 썰매처럼 놓여있는 재미있는 풍경이 만들어졌다.
흑백필름을 넣었지만 카메라의 뷰파인더로 보는 세상은 컬러일 텐데, 쉴 새 없이 내리는 눈이 점점 풍경을 흑과 백으로 만들고 있었다. 신이 나서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며 셔터를 누르다 보니 발갛게 달아오른 나의 맨손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 눈 쌓인 바다 새하얀 눈 속에 빨간 배의 깃발이 인상적이다. ⓒ 안사을
포구에서 잠시 벗어나 영광대교를 건너 남쪽으로 향하면 백수읍으로 가는 해안도로가 나온다. 백수해안도로라고 이름한 경치 좋은 길이다. 오후가 되어 다시 굵은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이곳에서, 애초에 보고자 했던 진한 회색빛의 바다를 만났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와도 같은 해무와 함께.
가다 보니 일부러 전시라도 한 듯 노오란 트럭이 공터에 세워져 있었다. 바퀴 자국도 없고 횡으로 내린 눈이 고스란히 타이어에 얼어붙은 것을 보니 아마 눈이 내리기 전부터 가만히 서 있었던 모양이다. 색의 대비가 확실하여 시선을 끌었다. 흑백 말고 컬러필름도 챙겨 온 것에 안도하며 셔터를 눌렀다.
▲ 대신등대 진한 회색빛 바다 위로 굵은 눈발이 묵직하게 내린다. ⓒ 안사을
▲ 회색빛 바다, 하얀 눈, 노오란 트럭 ⓒ 안사을
눈이 두텁게 쌓인 해안은 곳곳이 절경이었다. 거친 눈발을 소리 없이 흡수하는 바다의 위용을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세상, 다른 차원을 바라보는 듯했다. 모든 찌든 것을 말없이 받아들여, 파도의 힘으로 진흙에 짓이김으로써 맑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숭고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다를 향해 네모 반듯하게 지어진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열부순절지인 모열사였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을 피해 피신하던 부녀자들이 일본 함선을 만나자, 끌려가서 능욕을 당하느니 이곳에서 의롭게 죽겠다는 마음으로 바다에 몸을 던졌고 이를 기리기 위해 지은 곳이다.
안달복달 않아도 올 봄
▲ 백수해안도로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질주하던 파도 ⓒ 안사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애초 목적지였던 고창을 들렀다. 해변길을 따라 가마미를 지나 구시포로 향했다. 날이 점점 개어오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은 이제 더 이상 겨울의 것이 아니었다.
굳이 염려하지 않아도 봄은 오기 마련이다. 그래도 봄이 기다려지는 것은 아마도, 늘 같은 따스함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명은 항상 새롭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의 어지러운 시국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광기 어린 겨울이 지나가면 당연하게도 봄이 올 것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추위가 엄습했던 것이기에, 우리가 앞으로 피워낼 꽃망울은 오히려 더 선명한 빛깔을 뽐내게 되지 않을까.
▲ 구시포해변 멀리서 빛내림이 만들어지고, 역광의 햇빛이 파도의 주름살을 선명하게 비추었다. ⓒ 안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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