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읍성의 나라였다. 어지간한 고을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이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철되어 사라져 버렸다. 읍성은 조상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그 안에서 행정과 군사, 문화와 예술이 펼쳐졌으며 백성은 삶을 이어갔다. 지방 고유문화가 꽃을 피웠고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현존하는 읍성을 찾아 우리 도시의 시원을 되짚어 보고, 각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기자말] |
서설일까? 맵찬 바람, 나리는 눈에서 한겨울을 실감한다. 서해안고속도로와 나란한 전봉준로를 따라 고창읍으로 향한다. 덕정리 못 미쳐, 죽림리 전봉준 장군 생가로 꺾어 든다. 텅 빈 생가터에 소복한 눈이 평화로워 고요하다.
고속도로가 갈라친 죽림리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 유적지도 펼쳐져 있다. 너른 터에 산개한 고인돌이 눈 속에서 더 검게 보인다. 사나워진 눈발 속 점점이 박힌 고인돌이, 시간의 증언자처럼 늠름하다. 산자락에 의지해 앉은 모습이 마치 사람 사는 마을 같다.
고창천 건너 고인돌 박물관을 지나 봉덕리로 길을 잡는다. 뽀드득뽀드득 옛 지방도로를 따라가니, 근동 막걸리 맛을 책임졌을 양조장이 건재하다. 한겨울 마을마다 막걸리 추렴했을 풍경이 그리워지는 건 사나워진 눈발 때문일까.
▲ 봉덕리 고분 고창군 아산면 봉덕리 1호분. 이곳에서 금동신발 등 마한 모로비리국의 여러 유물이 출토되었다. ⓒ 고창군청
양조장 뒤로 하얗게 눈 덮인, 네모난 동산이 시야에 잡힌다. 근동 어디에나 있는 낮은 산 같은데, 잘 관리되어 있다. 봉덕리 1호분이다. 이 고분 4호 석실에서 금동신발 한 쌍을 비롯한 장신구, 토기, 칼 등 수많은 유물이 발굴된 게 2009년이다. 이를 근거로 고창이 마한 54개국 중 하나인 '모로비리(牟盧卑離)' 수도였다는 증거로 내세운다.
어느 때 '한반도 최초 수도 고창'이란 문구를 보면서 어리둥절했으나, 고인돌과 더불어 심정적으로 동의한 부분이다. 백제 때 고창은 '모양부리(毛良夫里)'였다. 오늘 찾아가는 고창읍성이 '모양성(牟陽城)'이다. 아마 옛 지명에서 이름을 빌어오지 않았을까.
▲ 모양성(1872년 지방지도_부분) 고창현의 남산 격인 반등산에 쌓은 읍성. 옛 지도엔 동문과 북문만 표시되어 있다. 성안 건축물들이 지도에 표시된 것처럼 복원이 이뤄졌다. ⓒ 서울대학교_규장각_한국학연구원
이 지역 사학자들은 모로비리와 모양부리가 756년 신라 경덕왕 때 高敞(고창)으로 변화한 근거를 제시한다. 모로나 모양은 산마루 등 높은 곳이란 뜻에서 높을 高(고)로, 넓은 또는 벌판인 비리나 부리가 넓을 敞(창)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다.
동리 신재효
나는 자장면을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맛보았다. 지금은 사라진 모양성 어귀 어느 중국집에서였을 터이다. 모양성 안 고창여중에서 열린 미술대회 인솔 선생님께서 보여준 맛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검은 춘장에 잘게 다진 고기, 김 모락거리는 수타 면발이 합쳐진 달착지근하며 쫀득한 그 첫맛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읍성 앞 너른 터에 초가집이 고즈넉하다. 한 채에 불과하지만, 몇 칸살이 상당한 집은 기품이 있어 보인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정원 등으로 미루어 여러 채 중 겨우 남게 된 가옥으로 추정한다.
▲ 동리 선생 고택 요즘 연예기획사 격인 '동리정사'를 설립, 당대 판소리를 하나의 문예사조로 자리매김 한 동리 신재효 선생의 고택. 눈 내리는 풍경에서 진한 향수가 느껴진다. ⓒ 이영천
동리 신재효 선생 고택이어서인가? 세찬 눈발이 시공간을 어린 시절로 이끌어 간다. 낡은 전축은 아버지 전유물이었다. 턴테이블 위 뒤틀린 LP는 소리마저 지지직거렸다.
하지만 울려 오는 판소리만큼은 청량하여, 귀가 호강하곤 했다. 깊은 맛이 있었다. 누가 부르는지 늘 궁금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임방울 명창의 LP였다. 자장면 맛이, 명창의 판소리 가락보다 더 달착지근했을까? 아직도 잘 판가름하지 못한다.
동리 신재효 선생의 본향은 경기도 고양이다. 한양과 고창의 물품 등을 중개하던 그의 부모가 고창에 정착한다. 상당한 부를 일군 것으로 전해진다. 늦둥이로 태어난 동리는, 고창현 아전으로 오래 재직한다. 재산이 크게 불어난다. 광대와 관기 등을 관리하던 호장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귀명창이자 문학에 조예가 깊었다. 아울러 시류 흐름에 명징한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 모양성 앞 수천 평 땅에 저택을 갖고 있었다. 지금의 '동리 국악당과 고창판소리박물관'을 아우르는 넓이로 추정한다. 요즘의 연예기획사 격인 '동리정사'를 꾸린다.
이를 바탕으로 소리꾼을 양성하고, 동시에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다. 영화로 알려진, 경회루 낙성식에서 흥선대원군 사람이 된 명창 '진채선'을 그리워하는, 선생이 작사·작곡한 '도리화가'가 그 결과물의 하나다.
아울러 판소리 여섯 마당 사설을 개작, 체계적인 구성을 갖춘다. 계급이 뿌리 깊게 남았던 당시, 소비자로 양반을 끌어들이는 계기를 마련한다.
듣는 판소리에서 움직이는 판소리로의 변모다. 신분을 넘어 문학으로 성장하는 기틀을 마련한 셈이다.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변강쇠가 등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건 선생 덕분이다.
▲ 판소리 수업 동리 고택의 방 한칸에 재현된 당시 판소리 수업하는 모습. ⓒ 이영천
동리 고택의 방 한칸에 당시 판소리 수업하는 모습이 재현돼 있다. 판소리를 훈련하는 인형 모습에서, 명창 진채선을 비롯한 이 고장 출신 김소희의 모습이 같이 보였다.
산성인가, 읍성인가
옹성을 가진 북문 공북루 앞에 이르자 눈발이 더욱 거세진다. 읍성 주 출입구가 북쪽이다.
지형이 만들어낸 특이함이다. 문루를 막아선 옹성이 둥글다. 성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을 지키는 보조 성벽이다. 따라서 공성 기구인 수레 등이 오가기 어려운 폭으로 통로를 갖춰야 한다.
▲ 공북루(북문) 옹성 안에 성벽도 없이 일반 누각처럼 서 있는 공북루. 성문에 있는 누각으론 이채로운 모습이다. ⓒ 이영천
옹성 위에는 적을 막는 군사를 보호하기 위해 성가퀴(성벽 위의 낮은 담장)를 두었다. 성가퀴엔 적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숨기며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총안을 뚫었다. 가까운 거리와 먼 거리를 향해 쏠 수 있게 되어있다. 고창읍성 성가퀴는 문루가 있는 동·서·북문의 옹성과 그 주변에만 쌓았다.
공북루는 '공손히 손을 모아, 북쪽 임금을 향한다'는 뜻이다. 형식도 특이하다. 여느 성은 옹성 안에 두텁고 단단한 성벽과 문을 두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곳 북문은 그냥 누각으로 여닫는 문뿐이다.
또한 그 옆엔 성벽이 아닌, 길고 허술한 성문을 두었을 뿐이다. 한마디로 방어에는 무척 불리하지만, 평상시 백성들이 드나들기에는 그지없이 편안했을 것임은 자명하다.
▲ 등양루(동문)와 성벽 고창읍성 최고의 조망점인 동문 치성에서 바라본 동문과 성곽. 멀리 고창읍이 보인다. ⓒ 이영천
성벽에 오른다. 3개 문루와 6개 치성의 성곽은 세종 32년(1450)에 쌓기 시작해 단종 원년(1453)에 완성된다. 전라도와 제주의 19개 군현 백성이 동원되어 각기 맡은 부분을 쌓았다.
눈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신경 쓰며, 공북루에서 동문 등양루로 향한다. 중간의 동북치에 다다른다. 밖으로 튀어나온 성벽인 치는 무기 사거리 안에서 방어 가능한 거리마다 쌓는다. 따라서 지형적으로 취약하거나 문루 등 방어에 불리한 곳에 사각형으로 치성을 두는 게 일반적이다.
눈이 내려 둘레 1,684m(높이 4~6m)의 성벽을 도는 데 1시간 넘게 걸렸다. 동문과 남치, 서문 진서루를 지나 다시 공북루에 이르렀다. 고창읍성엔 일반 백성이 살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자 중학교가 1986년까지 성안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옛 모습을 잘 보전하고 있다. 증거로 숲이 울울하다.
▲ 공북루와 성곽 읍성 주 출입문인 북문 밖에서 바라 본 고창읍성. 평지성과 산성이 반반 섞인 건 지형의 영향이다. ⓒ 이영천
건축물 22채가 있었다고 하나, 동학혁명과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훼손되었다. 동헌과 내아, 객사 등이 1976년부터 복원되기 시작해 점차 옛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산을 둘러싼 성곽이다. 시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반등산(半登山)을 에워쌌다. 산은 동-남쪽이 높고 북-서쪽이 낮다. 따라서 반읍성 반산성이 되었다. 그만큼 방어에 유리한 입지란 얘기다. 모름지기 성곽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첩경이라 추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성밟기 놀이
답성(踏城), 모양성 성밟기를 교과서에서 배웠다. 주로 지역의 여성들이 성 주위를 도는 일종의 놀이다. 그렇다면 이는 왜 행해졌을까? 먼저 밟는 시기를 살펴야 한다.
예전엔 윤삼월에 이뤄졌다. 해안에 가까운 지리적 여건은 겨울에 습해지고, 서릿발을 돋워내는 습기는 성벽이 약해지는 요인이었다. 마치 봄이 오면 뿌리가 안착하도록 밟아 주는 '보리밟기'와 비슷한 원리다. 윤 4년마다 성밟기를 통해 성채를 보강했다는 의미다.
▲ 성밟기 모형 윤 3월에 여인들이 머리에 돌을 이고 성을 1~3바퀴 돌았던 놀이를 형상화한 모형. 지금은 매년 (음)9월 9일 중양절에 축제(모양성제)를 열어 이를 재현하고 있다. ⓒ 이영천
아울러 저승문이 열린다는, 길한 윤달을 택했다. 민간의 이런 믿음을 활용하여, 바깥 활동이 상대적으로 뜸한 여성의 참여를 유도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지금은 9월 9일(음) 중양절에 '모양성제' 축제를 열어, 이를 재현하고 있다.
머리에 돌을 이고 한 바퀴를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를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를 돌면 극락왕생한다는 말이 전해온다. 일견 의미 있는 이야기다.
오르락내리락 1.7km를 걸었을 것이니, 당연히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머리에 인 돌은 성안에 모아, 그 돌로 성벽 수리에 사용하거나 유사시 무기로도 쓸 수 있게 대비하였다.
▲ 모양지관_객사 내리는 눈에 파 묻힌 고창읍성 객사 모양지관. 성안 가장 안쪽에 자리한 공적 건축물이다. ⓒ 이영천
객사인 '모양지관'이 젊은 옷을 입었다. 동헌인 '평근당(平近堂)'과 내아를 거쳐 맹종죽이 우거진 숲 쪽으로 발길을 옮긴다.
수없이 지나온 역사의 풍랑에도 무성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빽빽한 대나무가 두꺼운 소나무를 호위하듯 곧게 하늘로 뻗은 모습에서 거침없는 파죽지세가 느껴진다.
성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어느덧 눈이 멎었다. 댓잎에 앉은 새하얀 눈이 청정한 솔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선경의 읍성에서 신선인 듯 우쭐해진다. 멀리서 명창 임방울의 청량한 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동헌과 내아 동헌 평근당(平近堂)과 오른쪽으로 현감의 거처인 내아의 모습. 읍성 안의 대문 격인 풍화루 오른쪽 구릉에 앉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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