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사진이 이메일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사진 하단에 사진기와 필름의 종류를 적었습니다. [기자말] |
강원도 정선은 이미 제법 유명한 여행지다. 아리랑 시장이라 불리는 정선 5일장이 유명하고, 청량리에서 아우라지까지 연결되는 A-Train(아리랑 열차)가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열차 운행은 주말과 장날이다. 이 얼마나 낭만적인 시간표인가. 동강으로 모여드는 크고 작은 천들이 또한 아름다운 광경을 자아낸다.
정선읍의 북동쪽에는 임계라는 곳이 있다. 임계천과 골지천이 합수하여 서쪽을 향해 굽이쳐 흐르며, 동쪽으로는 1,000m가 넘는 산들이 짙푸른 경계를 친다. 백봉령을 넘어 갈림길에서 남북으로 갈라지면 각각 삼척과 강릉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서 시원한 동해바다까지는 30분이 채 안 걸린다.
사람 적고 저렴한, 숙식하기에 딱 좋은 임계면
▲ 강릉, 동해, 삼척, 정선읍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지리적 위치 ⓒ 지도화면 캡처
▲ 임계천 암내교 위에서 바라본 임계천 ⓒ 안사을
한여름 강원도 해변은 국내 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다. 올해는 비교적 관광객 수가 적었다고 하나, 때마침 주말이어서 숙소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물론 예산을 고려하지 않으면 선택지는 항상 있지만, 여행을 자주 다니려면 숙소비를 아껴야하기에 저렴한 곳을 찾다보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눈을 돌린 곳이 정선군 임계면이었다. 커브를 수십 번 돌고, 서늘한 기운이 들 정도의 높은 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바다에서 50분이면 읍내에 도착할 수 있고 식당이나 숙소가 충분히 있어서 맘편히 쉴 수 있는 곳이다. 항상 이용하는 숙소는 성수기 주말에도 5만원의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임계에 도착한 날은 밤의 초입이었다. 시골은 가게들이 문을 일찍 닫으니 맥줏집 등을 제외하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래도 가장 번화가처럼 생긴 곳을 가보니 문을 연 곳이 있었다.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손님은 아무도 없고 곧 문 닫을 준비를 하시는 주인장만이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죄송스러웠지만 식사가 되는지 여쭈었다. 거절 당할 각오를 하고 드린 질문이었다. 그런데 황송하게도, 돌아온 것은 함박웃음과 환대였다.
나와 아내, 우리 단 두 사람을 위해 반찬통이 열렸고 화구에 불이 올랐다. 잠시 뒤 나온 육개장은 어릴 때 교회에서 권사님들이 들통에 끓여주시던 그 맛이었고, 외할머니가 조미료 없이 손맛으로 만들어내던 그 맛이었다.
2박 3일을 머물며 총 다섯 끼니를 사 먹었다. 맛이 없는 집이 없었다. 저렴하기까지 했다. 한 고깃집은 정육점에서 직접 사다가 집에서 구워 먹는 가격과 거의 같은 비용으로 삼겹살을 즐길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친절했다. 정선은 항상 올 때마다 마음이 풍족해지는데, 임계는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미소와 넉넉함이 단연코 최고였다.
임계를 떠날 때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로, 아직 가보지 못한 음식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머문 날이 짧아서, 가게 주인이 휴가를 떠나서, 딱 두 명이서 다니느라 메뉴를 다양하게 시키지 못해서, 그래서 먹지 못한 메뉴가 꽤 남았다. 함께 간 아내와 다음 방문 시에 뭘 먹을지에 대해 신나게 대화했다.
이름도 산뜻한 골지천 산소길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도 참 좋았지만 계속되는 폭염에 해변을 즐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삼척에서 이곳 임계로 올라올 땐 잠시 머물 숙소를 위해서였지만 차창 밖에서 들어오는 서늘한 공기에 매료되어 다시 바다로 내려가지 않고 내리 이틀을 같은 숙소에 머물렀다.
파도가 철썩거리는 바다 대신 바위틈을 힘차게 흐르는 개천으로 향했다. 헬멧을 쓰고 로비를 나서는 우리에게 숙소 사장님은 임계천 천변길을 소개해주었다. 이곳이 처음이 아니어서 이미 아는 길이었지만 우리가 갈 길에 대해 말씀하시니 반가웠다. 이곳 지리에 대해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길을 나섰다.
아무리 강원도 내륙이라도 올여름의 폭염을 피해 갈 수는 없으리라 생각하여 전기자전거를 가져갔다. 참 잘 한 선택이었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뜨거운 태양이 아스팔트와 박치기를 하고 튀어 오른 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골지천의 힘찬 물줄기와 전기자전거의 손쉬운 페달질이 만들어낸 바람이 그나마 우리의 뺨과 호흡기를 식혀주었다.
▲ 신나게 페달질 자전거 도로는 없지만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안전한 길 ⓒ 안사을
▲ 다리 위에서 이름이 붙지 않은 돌다리에서 골지천을 바라보고 잠시 쉬었다. ⓒ 안사을
골지천은 오지이긴 하지만 소위 아는 사람들은 아는, 그런 곳이다. 특히 여름철엔 열대야가 없고 낮에도 그늘이 많아 차박을 즐기는 사람이 항상 있다. 붐비진 않아서 쓰레기가 넘쳐나는 등의 일 없이 깔끔하고 호젓하게 자연 속에 잠시 있다가 갈 수 있는 곳이다.
다만 차박 공간이 절벽 아래에 있고 차도 바로 옆이라 낙석이나 가끔 지나가는 야간 주행 차량 때문에, 개인적으로 좋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항상 이곳을 지날 때마다 캠핑카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서너 무리 정도 있을 뿐이다. 보통 어르신 부부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화목한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조금 더 진행하면 구미정이라고 하는 정자가 나온다. 신기전, 추노, 선덕여왕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동네 사람들이 마실 나와 쉬는 곳으로 더 익숙하다. 여름철 이곳에 올 때마다 10명 남짓의 사람들이 모여 채소와 과일, 송어회 한 접시를 놓고 수다를 떠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날도 그랬다.
▲ 구미정과 마을사람들 근처에 송어 양식장이 있어서인지 이곳에서는 송어회를 먹는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 안사을
임계면에서 여량면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쭉 따라가면 아우라지가 나온다. 언덕이 거의 없는 길이기에 여유롭게 자전거를 즐길 수 있다. 다만 돌아올 때 새로운 길로 가고자 42번 국도로 가는 것은 좋지 않다. 그길은 생각보다 차가 많고 경사도 심하다. 골지천과 임계천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추천한다.
우리는 아우라지까지 가지 않고 개병교 바로 앞에 있는 연리목쉼터에 짐을 부리고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읍내에서 사 온 김밥과 떡, 그리고 얼음물이었다. 말이 쉼터지 한 평 남짓 되는 면적에, 의자도 없고 바로 길 옆이라 잠시 숨을 돌릴 공간일 뿐이다. 머리 위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연리목이 있었다.
▲ 점심으로 먹었던 김밥, 떡, 그리고 얼음물 ⓒ 안사을
여행 중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정선의 한 카페를 골랐다. 굽이치는 강을 기준으로 하여 마치 세 개의 섬처럼 존재하는 정선읍 중, 가장 동쪽 덩어리에 있는 카페다. 관광객들은 아무래도 아리랑시장이 있는 가운데 구역을 많이 갈 것이다. 서쪽에는 터미널이, 가운데에는 시장과 각종 관공서가, 동쪽에는 역이 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살짝 어지럼증이 올 정도의 진한 커피냄새가 훅 다가왔다. 커다란 로스팅기에 직접 제작한 듯한 각종 계기판과 스위치가 달려있었다. 한 분은 활발하게 커피를 볶고 계셨고 한 분은 알맹이를 잘 정리해서 담고 계셨다. 왼쪽으로는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절박한 심정으로 만든 책
▲ 내부의 공간은 나름의 규칙과 구성으로 빼곡히 들어찬 물건들로 인해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 안사을
블로그 등을 찾아보면 커피 맛으로는 이견이 없을 만큼 훌륭한 곳이기도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정말 놀라운 보물을 발견했다. 두 권이 한 묶음으로 되어있는 책이었다. <정선의 구비문학>이라는 책이었는데 한 권은 설화편, 한 권은 민요편이었다.
골동품을 구경하는 느낌으로 책을 펼쳤는데, 엄청난 수집과 연구의 결과라는 것을 몇 쪽만 읽어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음악을, 아내는 국어를 전공한 터라 함께 책을 발견한 뒤 탄성을 질렀다. 나란히 있는 두 권 책의 모습이 마치 우리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 시간이 찰나처럼 지나갔던 것 같다. 책을 뒤적이며 감탄에 감탄을 더했다. 이 책을 기획한 정선의 공무원, 아리랑 연구소 사람들, 함께 연구한 강릉대학 교수님 등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낄 정도로 훌륭한 결과물이었다.
연구자가 직접 그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모든 것을 녹취하고 정리했다고 하니, 그 노력이 참 숭고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입을 뗀다.
"참 절박한 심정으로 이 책을 만들었을 것 같아."
"어떤?"
"이 책에 담긴 설화들, 지금 노년층 세대가 돌아가시면 다시는 수집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으로 조사를 시작한 듯해. 나라면 그랬을 것 같아."
"그래. 어떻게 보면 딱딱한 논문 같은 기록들이지만 이 방대한 자료를 모으고, 정리하고, 구성한 결과물을 보면 절박함이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카페 주인에게 물어보니, 오래 전에 비매품으로 배포된 자료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팔 수 있냐는 부탁을 드리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 했다. 그때 아내가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온라인 중고 서점에 전국적으로 딱 한 묶음이 남아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채갈 새라 냉큼 구매했다.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택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상자에서 꺼내어 보물처럼 쓰다듬었다. 스무 번이 넘는 정선 여행에서 만난 풍경에 더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수 백년 역사가 버무려질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순간이었다.
▲ 임계에 대한 설화가 수십쪽에 걸쳐 있다. ⓒ 안사을
이 책을 천천히 탐독을 한 뒤에는, 아예 몇 편의 기사로 따로 다루어보고 싶다는 생각마저 했다. 8년 가까이 정선 여행을 하며 담아 온 사진들과 이 책에 나온 설화, 민요를 더하여 현재의 풍경과 과거의 이야기를 잇는 바느질꾼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든 것이다.
설악산 종주를 며칠 앞두고 스며든 기대감에, 몸도 마음도 두둥실 떠올라 한달음에 대청봉에 닿을 것만 같았던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7월 23일부터 8월 5일까지 있었던 경북, 강원 여행 중 임계, 정선 여행기입니다. 한여름 설악산 종주기가 이어집니다. 촬영과 인화에 시간이 더 걸리는 필름 사진 특성상 기사 작성 시기가 늦춰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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