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림병사 반딧불이 덕림병사 들판에서 세기의 로맨스(?)를 꿈꾸며 낭만적인 발광체로 춤을 추는 반딧불이들 ⓒ 양병관
한밤중 오로지 내 자동차 불빛에만 의지해 산길을 가는 중이었다. 예전에는 버스가 다니는 길이었지만, 새로 길이 나면서 잡풀 더미 속에서 겨우 앞만 보이는 길이었다.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한 고개만 넘으면 한밤의 불꽃같은 로맨스가 펼쳐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가 더 컸다. 한편으로는 이 깊은 산 중에 설마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입소문 난 덕림마을 반딧불이
입구에는 안내를 해줄 마을 사람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목소리만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고 덕림병사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제법 주차된 차들이 있었다.
지난 28일 오후 11시 부여군 장암면 점상 3리 덕림마을 반딧불이가 나오는 곳에 취재하러 다녀왔다. 반딧불이들의 군무는 밤 11시부터 새벽 2시 사이가 장관이라고 했다.
"저기 한 마리 보이쥬?"
뭔가 번뜩이는 불빛이 휙 지나가기는 했다. 그것이 반딧불이라고 했다. 나뭇잎 속에, 허공 속에 전력이 약한 정원 등처럼 깜박이는 것들이 있었다. 좀 더 걸어 올라가니 덕림병사 건물 아래 풀숲 전체가 번쩍이고 있었다.
▲ 휴대폰 카메라로 찍은 반딧불이가 있는 풍경 휴대폰 야간 기능으로 반딧불이를 찍었지만 이런 풍경이 되었다. 마치 흑백사진 같다. ⓒ 오창경
여기저기 카메라 자동 셔터 소리만 들리는 와중에, 산속 별천지가 정말로 있었다.
"와아! 나이트클럽이다!"
"크리스마스트리네!"
막 도착한 누군가가 낮게 탄성을 질렀다. 어둠이 눈에 익으니 반딧불이가 번뜩이며 노는 것을 지켜보는 사람의 실루엣들이 있었다. 콩알만 한 불빛이 내게 달려들었다. 손을 내밀어 잡으려 했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바로 눈앞 한 치 어둠 속에 별빛 조각들을 확 뿌려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순간 내가 환상의 세계로 빨려 들어와 버린 것 같았다. 여기저기 눈길을 돌리는 곳마다 발광체들이 무리를 지어 떠다니고 있었다. 시골살이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나도 처음 목격한 장관이었다. 인공 불빛 아닌 자연 불빛이 저렇게 반짝일 수가 있다니!
풍양 조씨 재실인 덕림병사가 그 가운데 앉아 있었고 기와 라인만 살짝 보여서 더 비현실적인 신비감을 자아냈다. 재실을 중심으로 그 옆으로는 풍양 조씨 무덤들이 둘러싸인 곳이라 순간, 무덤 주인공들의 혼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덕림병사의 반딧불이 풍양조씨 재실인 덕림병사 앞에는 반딧불이가 서식할 수 있는 조건이 두루 갖춰진 곳이라 반디들이 개체수가 늘어나는 중이며 보존을 위해 마을 사람들과 사진가들이 서로 노력하고 있다. ⓒ 양병관
반딧불이가 잘 찍히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꺼냈다. 옆에 있던 누군가가 친절하게 야간 기능까지 알려 줬지만, 아무리 찍어도 흑백 사진 같은 배경만 찍혔다.
"원래는 사진가들 사이에 덕림병사 지붕 위의 은하수가 유명했는데, 반딧불이가 나온다고 입소문이 나더니 지금은 반딧불이들이 더 유명해졌어요."
덕림마을의 반딧불이에게 반해 2시간이 걸리는 광주에서 매일 찾아온다는 양병관 사진작가의 말이다. 그는 작년에도 장암 소식지에 반딧불이 사진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덕림마을 반딧불이 지킴이를 자처하는 분이다.
▲ 덕림병사의 은하수 원래 덕림병사의 은하수 사진이 유명했는데 반딧불이가 나오는 바람에 반딧불이가 더 유명해졌다. ⓒ 양병관
"다른 지역의 반딧불이 서식지들이 많이 파괴됐어요. 반디를 보호하기 위해선 조금 불편해도 차들을 통제하고 환경을 지키도록 통제할 필요가 있어요."
몇 년 전부터 덕림마을은 '덕림'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면 자동완성으로 '덕림병사 반딧불이'라고 뜨는 덕분에 점상 3리 마을이 온라인에서 유명해졌단다. 복수박(타원형 작은 수박), 취나물, 멜론, 벼농사가 주업이던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홀연히 나타난 반딧불이가 어느새 사람들보다 유명해졌다.
마을에 있는 풍양 조씨 사당인 덕림병사 주변에서 반딧불이가 서식하면서, 작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사진이 SNS에 소문이 났다. 전국의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마을이 되었다.
그런데도 풍양 조씨 종중과 부여군 문화재과에서는 이들 사진작가와 마을 사람들의 청원에 풀 깎기와 주차장 공사 등을 하지 않기로 했다. 반딧불이들의 시간을 최대한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다.
"음료수 한 잔 안 마시대유. 쓰레기 한 장 버리지 않고 갔더라구유. 사람들이 반딧불이 수만큼 몰려왔어도 흔적 하나 안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워디(어디) 있대유."
"어쩐 일이래유? 글씨, 차들은 수도 없이 지나갔는디 사람들이 없슈. 카메라 다리만 나래비(나란히)로 서서 반딧불이를 기다리대유."
백인구 점상 3리 이장과 마을 사람들은 작년 사진작가들이 몰려들어 덕림병사 주변에 진을 쳤다가 빠져나간 후일담을 이렇게 말했다. 작년 덕림마을에 갑자기 차량이 몰려들었지만 귀신이 다녀간 것처럼 흔적이 남지 않았다고 했다.
직접 와보니 정말로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실루엣들로만 존재했고, 반딧불이들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춤추며 발광을 내고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 산속에 이런 별천지가 있을 줄은 몰랐다. 잠과 휴식을 반납하고 찾아온 수고가 아깝지 않았다.
카메라 수십 대만 덕림병사 주변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카메라 액정을 수건으로 가려놓았다. 휴대폰 손전등을 켜거나 카메라 액정 불빛이 보이면 어둠 속에서 주의를 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날아왔다.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축제인 이유
대부분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는 외지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관광업에 대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시골 마을에 어떤 특정한 이슈가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대개는 문제부터 발생하기 마련이다. 쓰레기 투기, 주차 소동, 화장실 문제 등으로 원주민들과 갈등을 빚는 식이다.
하지만 덕림마을은 달랐다. 반딧불이가 친환경적 생물이라는 사진가들의 인식부터 남달랐고, 이는 반딧불 존재를 잘 모르던 덕림마을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사진 작가들이 왜 여기 몰려드는 것인지 궁금해졌던 주민들, 반딧불이가 일으킨 조용한 소동 이후 주민들은 긴급 마을 회의를 했다. 작년 6월의 일이다.
덕림마을 사람들은 자발적이고 자체적으로 축제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장으로 조동진씨를 위촉했다. 마을 사람들은 전국에서 반딧불이 축제로 유명한 곳으로 무주, 제주 등 선진지 견학을 다녀오고, 자료도 찾아보면서 반딧불이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는 6월 1일 오후 6시 덕림마을에서는 반딧불이 축제를 열기로 했다.
"우덜(우리)끼리 축제를 할 거유. 행정의 지원부터 바라지 않아유. 환경오염으로 사라졌던 반딧불이가 우리 마을에 돌아온 것도 기적인데 외부의 도움부터 바라면 실속은 없고 괜스레 일만 커져서 안 돼유. 반딧불이가 사는 환경을 보호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축제를 할 거유."
조동진 추진위원장의 뼈 있는 한 마디였다. 보조금으로 우후죽순으로 만들었던 마을 축제들은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중이다. 특히 올해는 그런 예산이 대폭 삭감돼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이번 축제는 반딧불이를 있는 그대로 소박하게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
▲ 조용한 시골 마을에 반딧불이들이 일으킨 조용한 축제 소식 부여군 장암면 점상3리 덕림마을에 찾아온 반딧불이들이 환경보존 축제를 기획하게 했다. ⓒ 오창경
반딧불이 축제는 사람들이 몰려와 즐기는 축제가 아니라, 1년에 단 보름여일 동안 번식을 위해 불꽃 튀는 로맨스를 불태우다가 한살이를 마치는 반딧불이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덕림마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마을 주변에 가로등을 철거해 달라고 민원 넣고 더 이상 도로포장도 하지 말아 달라고 하는 데는 우리 마을 밖에 없을규."
덕림마을은 반딧불이 서식지로 부상하면서 오히려 자연 생태 보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이는 양병관 사진작가들을 비롯한 사진가들의 앞서가는 환경 의식 때문이기도 했다. 마을은 이제 개발이 아닌 보존 위주의 축제를 논의하고 있다.
반딧불이 활동시간은 밤 11시부터 새벽 2시쯤, 통상 사람은 활동을 접을 시간이다. 그렇다 보니 이번 축제도 사람들이 찾아와 즐기는 것보다는 반딧불이에 방점이 있다.
1일 저녁 6시에 시작되는 축제는 모여서 공연 관람과 식사를 함께 한 뒤, 흩어져 반딧불이를 구경하는 식이라 한다.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마을이니, 환경 보호와 보존 경각심부터 일깨우겠다는 것이다.
반딧불 축제는 불편한 축제이다. 제대로 반딧불이들의 향연을 즐기려면 한밤중 휴대폰 손전등도 켜지 못하는 야간 산길을 5분 정도 걸어야 하며, 접이식 의자도 각자 준비해야 한다.
오로지 깜깜한 산속에서 발광체들의 불빛과 밤하늘의 은하수만 보는 '불빛멍'(?)만 가능하다. 볼거리는 있어도 즐길거리는 적고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축제로, 타 지역 주민이라도 참석 가능하다. 조용히 왔다 가면 된다. 마을 자체 예산으로 하는 것이라 인심만 풍성하게 누리게 할 생각이다. 한 주민의 말이다.
"저녁 6시에 오시면 잔치국수는 말아 드릴게유. 마을 가수들의 통기타 노래 정도는 보여드려유. 저희도 처음이라 준비는 많이 못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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