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이 디지털 사진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Kodak Ektar100 필름을 사용하였습니다.[기자말] |
(* 지난 기사 <키르기스스탄에서 텐트 치기... 뭔가 잘못했음을 깨닫다>에서 이어집니다. https://omn.kr/25u58 )
▲ 덩그러니 초원 한복판에 놓인 우리의 보금자리 ⓒ 안사을
송쿨(Соң-Көл) 호수에서의 첫날 밤, 진한 노을이 바위 능선 너머로 사그라들고 별 외에는 빛나지 않는 묵직한 어둠이 찾아왔다. 많이 걷진 않았지만 비포장에서 통통 튀어 오르는 차를 몇 시간이나 타기도 했고 갑자기 고도를 올린 탓인지 피가 느리게 도는 듯한 찌뿌둥함이 뒷골과 등판에 머무르고 있었다.
말들도 자는지 간간이 들리던 투레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넓디넓은 수면이 지척에 있었지만 잔잔한 호수인지라 파도 소리 하나 없었다. 별들이 숨쉬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한 적막을 즐기고 있었다. 바람조차 불지 않으니 눈을 감으면 여기가 텐트 안인지 초원 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지 모를 만한 평화가 우리 곁에 있었다.
▲ 송쿨의 밤 (휴대폰 촬영 사진) 선명한 은하수가 머리 위에 있었다. ⓒ 안사을
바로 그때,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기계음도 아니고, 천둥소리도 아니었다. 사회 초년생 때 전체 회식 3차로 끌려간 노래방 복도에 갑자기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분명 마이크에서 앰프를 거쳐 스피커로 증폭되는 소리였다. 비록 우리가 이곳에 단 하루째 살고 있지만, 여기의 환경과는 상극의 소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텐트와 100m 정도 떨어져 있는 유르트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음악 소리만 들었을 땐 그들의 국적을 몰랐다. '설마 한국인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과 훅 올라오는 짜증이 교차했다. 그런데 스피커로 걸쭉한 사회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창피함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이게 웬 나라 망신인가 싶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 정도의 데시벨이면, 게다가 소리가 널리 퍼지는 고요한 초원이라면 정말 많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동행인이 나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그들에게 다녀오겠노라고.
따끔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오겠다고 했다. 말을 조리 있게 하는 사람이니, 단호하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게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도 했다. 그런데 그들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의아한 마음을 가지던 중 동행인이 돌아왔다. 헛웃음과 함께였다.
"아니, 참나. 분명히 화가 났었거든? 근데 화를 낼 수가 없었어."
"왜?"
"일단 한국 사람들이 맞았다? 내가 진짜 단단히 마음먹고 갔거든? 그런데 두 가지 이유로 내가 무장을 해제할 수밖에 없었어."
"그게 뭔데?"
"내가 갔는데 갑자기 막 반갑게 손짓을 하면서 샤슬릭을 함께 먹자고 환영을 하는 거야. 글쎄... 차마 고기를 먹을 순 없었지만 어쨌든 환영하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모진 말을 하겠어..."
"하하. 그랬겠네. 또 하나는 뭔데?"
"한국 사람들이란 거에 민망함을 느꼈거든. 고즈넉함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더 조용히 시키고 싶었던 거야. 근데 음악 소리에 맞춰서 흥겹게 춤을 추고 있는 무리를 봤는데 글쎄, 외국인들인 거야.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같이 춤추고 놀고 있더라고."
결국 그러한 이유로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씩씩거리며 갔다가 부드러운 마음을 안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자야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조금만 소리를 줄여주시고 너무 늦게까지만 하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파티는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잦아들었다.
▲ 이른 아침 초원을 달리는 말 자연 그대로의 풍경 ⓒ 안사을
고산병의 특효약, 처방약도 아닌 '이것'
우리가 머문 호수는 해발 3000m에 형성된 담수호다. 많은 사람이 딱 이 높이에서 고산증 증상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예민한 사람은 해발 2500m 정도에서부터 느끼기 시작한다. 우린 네팔 묵티나트에서 첫 고산증을 경험했다. 해발 3800m였고, 그 밑에서는 뛰어놀아도 증세가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걷고 싶은 만큼 걸으면 되었고 메고 다녀야 할 짐도 없었다. 코치코르(Кочкор)의 상점을 모두 뒤져도 가스를 구할 수가 없어서, 조리도구가 모두 있었지만 모든 음식을 사 먹을 수밖에 없는 기가 막힌 상황이었기 때문에 취사 등 자질구레한 일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행인에게 고산증이 찾아왔다. 고산증은 이래서 무섭다. 대체의 경향성은 존재하지만 예외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제법 있다. 다행히 우린 같은 고도에 머무르는 상황이었고 바로 다음 날 2000m로 내려갈 예정이었기에 안정만 취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인천공항에서 미리 구매한 고산증 약을 먹었다. 증세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계속해서 메슥거림과 두통을 호소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바람도 점점 강해졌으며 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의 하늘 먼 곳에서 번개가 번쩍거렸다. 고산증은 체온이 낮아지면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순간이 계속되었다.
▲ 우두머리 친구 초원 한 복판에 텐트를 치면 말 무리와 함께 사는 느낌이 든다. ⓒ 안사을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계속 식사를 하던 가까운 유르트로 가 저녁을 주문했다. 메뉴는 따로 없고 가격은 일 인당 500솜(com)으로 고정이다. 동행인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사람인데 이때만큼은 나온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고산증 증세 때는 속이 안 좋아도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 잘 먹지 않아도 급격히 나빠지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안색으로 도통 음식을 먹지 못하자 주인 아주머니께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동행인을 보더니, 갑자기 "김취?"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곧이어 그의 눈이 왕구슬만하게 커지면서 안색이 밝아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포크로 김치통을 푹푹 쑤셔가며 김치 투약을 시작하자마자 동행인의 얼굴에 그늘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방전까지 받아 구매한 약보다 푹 익은 배추김치 한 포기가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두통도, 몸살 기운도 거의 사라졌다고 했다.
참 얄궂게도 그 김치는 어제 그토록 우리를 괴롭혔던 한국인 무리가 놓고 간 것이라고 했다. 밤잠을 못 이루게 고성방가로 메아리를 울리던 그들을 원망하고 낯부끄러워하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인데, 우리 앞에 보물단지처럼 놓인 김치 한 통에 감사하는 상황이 참 재미있었다.
순탄치 않았던 복귀 여정
송쿨에서의 마지막 아침, 말끔하게 회복된 동행인과 여전히 화창한 호수를 바라보며 떠날 채비를 했다. 다시 코치코르로 나가 하룻밤을 보내고 촐폰아타를 거쳐 카라콜로 갈 계획이었다. 송쿨을 벗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보통은 1박2일 패키지로 오기 때문에 왕복의 차편을 준비하지만 우리는 좀 더 머물고자 편도로 왔기 때문이다.
아침에 동분서주하며 유르트들을 돌아다니던 동행인이 희소식을 가져왔다. 단체 관광객을 태우고 어제 들어왔던 마슈르카(미니버스)가 자기들 나가는 길에 단돈 500솜에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했단다. 택시 한 대에 5000솜을 내야 하는데 두 명에 1000솜이면 거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샤슬릭 값이 굳었다며 행복하게 남은 짐을 꾸렸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우린 그 차를 탈 수 없었다. 우리에게 호객하던 택시 운전사 한 명이 그 사람에게 가서 따진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우리에게 오더니, 미안하지만 우리를 태우지 못하겠다고 했다. 사정을 듣고 보니 이해가 갔다.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다른 지역의 영업 택시가 사람을 태우는 꼴이니 그들 사이에서는 불문율을 어기게 되는 것이었다.
이해는 갔지만 저 사람의 택시는 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짐을 꾸려놓은 곳으로 돌아왔는데 글쎄, 우리를 훼방 놓았던 택시 운전사가 세상에서 가장 해맑은 표정으로 그네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우리를 보며 활짝 웃은 채 "코치코오르?(코치코르로 나가겠냐는 뜻)"라고 외쳤다.
오히려 기가 막혀서 마음의 빗장이 풀리기도 했고, 그 택시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서 우리는 거금 5000솜(7만 5천원 정도)를 주고 그 택시를 탔다. 대신 내려오는 동안 자유롭게 차를 세워서 풍경을 담기로 했다. 보름이 넘는 여행 동안 몇 만원 정도는 큰 돈이 아니니 마음 쓰지 않기로 했다. 기분 좋게 여행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일테니 말이다.
그런데 내려오는 도중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어 보니 카메라 렌즈가 두 동강이 나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지만, 그 역시 몇 초 만에 가라앉았다. 잘 묶으면 촬영은 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동행인의 머리끈과 텐트 로프로 잘 고정된 렌즈는 실제로 여행의 끝날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 했다.
▲ 렌즈 파손 어쨌든 찍히면 됐다. ⓒ 안사을
▲ 내려가는 길 렌즈가 두 동강 난 뒤 처음 찍은 사진. 다행히 경통이 틀어지진 않았나보다. ⓒ 안사을
* 20kg 배낭을 메고 3박 4일 동안 텐트에서 자며 50km 이상을 걸었던 알틴아라샨(Алтын-арашан)과 알라쿨(Ала-Көл) 호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행은 지난 7월 23일부터 8월 9일까지 이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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