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 정강이에 불이 붙은 것 같은 느낌이 든 건 몇 발자국 더 옮기고 나서였다. 오른쪽 어깨에 길이 5m, 무게 15kg짜리 22mm 철근 두 개를 메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다리 쪽을 보니 바지가 북 찢겨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천 쪼가리 안으로 선명한 피가 흘렀다.
대전에서 30년 넘게 철근 밥을 먹었다는 이씨(66)가 슥 돌아보고는 계속 철근을 멨다. '사시깽이'란 콘크리트 바닥 위로 돌출돼있는 여분의 철근 이음부를 말했다. 아래층에서부터 이어진 기둥이나 벽체 철근 상부가 위층 바닥을 뚫고 솟은 부분인데, 아파트는 어느 층이든 기둥과 벽의 위치가 똑같기 때문에 '사시깽이'에 새로운 철근을 잇는 방식으로 위층의 기둥과 벽을 세워갔다.
평소 말수가 적은 이씨가 철근을 놓고 오면서 유독 강조를 했다. 무릎 높이의 사시깽이 철근에 다리가 스쳐 10센티쯤 찢어진 거였다. 철근은 크기에 맞게 절단해 쓰는 경우가 많아 끝이 날카로웠다.
공사장 땅바닥엔 사시깽이는 물론 날카로운 못들이 널려있었다. 안전화 없이 밟았다간 발바닥이 뚫린다고 했다. 공기는 흙먼지로 탁했고, 시끄러운 기계 소음은 단 1초도 멈추지 않았다. 머리 위론 높이 솟은 타워크레인이 쉴새 없이 움직이며 육중한 자재들을 옮겼다. 아래로는 지게차가 '접근하지 마세요 위험합니다'라고 한국말로 한번, 중국말로 한번 녹음된 목소리를 반복하며 다녔는데, 그 소리가 하도 커서 꿈에 나올 지경이었다.
비포장 길목엔 굴착기나 대형 트럭, 레미콘차나 펌프카가 이리저리 후진을 하고 몸체를 돌렸다. 한쪽에선 가스 용접기로 용접을 하고 반대쪽에선 그라인더로 철을 잘라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걷다가 잠시라도 고소작업대나 비계 발판, 사다리 위에 올라가 일하는 사람들을 쳐다봤다간 밑에 구멍이 뻥 뚫린 엘리베이터 개구부나 계단 단부 낭떠러지에 이르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곳에도 철근은 들어가야 했고, 철근공들은 난간도 없는 허공에 어떻게든 다리를 벌려 철근을 대고 묶었다.
바닥이나 벽, 기둥 등 아파트에서 보이는 모든 콘크리트 속엔 다 철근이 들어있다. 그리고 이 철근들을 일일이 배치하고 고정시키는 건 모두 사람의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길면 8m, 무거운 건 30kg까지 나가는 철근을 멘 며칠 만에 어깨에 철 자국 그대로 피멍이 들고 물집이 터졌다.
특히 오후 1~2시가 되면 철근이 햇빛에 열을 받아 달궈졌는데, 어깨에 얹기가 뜨거워 장갑 낀 손으로 받치면 힘만 더 들었다. 그나마 9월 초 늦더위가 이 정도였다. 한여름엔 젖은 수건을 대지 않으면 뜨거워진 철근에 어깨가 다 데인다고 했다. 철이 수건에 닿는 순간 치익 증기가 나고, 철근 다발에 계란을 깨면 프라이가 된다는 거였다. 옷을 갈아입을 때 본 철근공들의 어깨는 살이라기보단 반질반질한 가죽에 가까웠다.
준비된 철근이 도면보다 길 땐 철근공들이 현장에서 즉석으로 철근을 절단해야 했다. 철근을 자르는 기계를 '핸디' 혹은 '절단기'라고 불렀는데, 휴대용이지만 무게가 20kg이 넘었다. 핸디 구멍에 철근을 끼운 뒤 버튼을 누르면 프레스가 나오면서 금세 동강을 냈다. 한번은 철근 여러 개를 한꺼번에 넣고 자르다 이리저리 으스러지는 철근들 사이에 새끼손가락 끝이 살짝 끼었는데, 시퍼렇게 부풀어 오른 붓기가 일주일 넘도록 가라앉질 않았다. 만약 핸디 구멍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면 철근과 함께 잘려나온다고 했다. 주로 검지 아니면 새끼손가락이라고 했다.
바닥에 철근을 깔 땐 철근 위를 밟으며 작업을 해야 했는데, 새벽 이슬을 머금은 오전엔 더 미끄러웠다. 중심을 잡기도 어려운 철근 위에서 노동자들은 무겁고 긴 철근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에 이고 다녔고, 손이 닿지 않는 하부 철근을 결속하기 위해 10m를 넘게 기어 다녔다. 고개를 박고 계속 철근을 엮다 보면 땀이 안경에 줄줄 흘러 맺힌 소금기 때문에 앞도 잘 안 보였다. 목이 아파 고개를 젖혔다간 머리가 핑 돌아 철근 사이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바닥에 콘크리트도 깔리기 전에 이뤄지는 공정이라 아래층의 '동바리'라는 임시 지지대들이 떠받치는 거푸집 위에서 일을 했는데, 아래층에서 다른 작업이라도 할 때면 동바리 개수가 눈에 띄게 줄어 불안했다.
철근으로 벽과 기둥을 만들 땐 '렌탈'이라고 불리는 고소작업대를 써야 했다. 고소작업대는 7m 정도까지 올라갔는데,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처음 철근을 배치해나가는 거기 때문에 주변에 안전줄 매달 곳도 없었다. 벽체나 기둥의 크기가 클 땐 바닥에서 미리 철근을 조립한 뒤 타워크레인으로 세우기도 했다. 이때 조립체를 정확한 위치에 꽂으려면 타워크레인이 착지시키는 밑에서 철근공들이 맨손으로 자리를 잡아줘야 했다. 철근으로 조립한 벽체 하나의 무게만 2톤이 넘었기 때문에 까닥 잘못 끼었다간 또 손가락이 잘린다고 했다. 혹시라도 타워크레인이 들어올린 조립체의 철근 결속이 부실하면 철근이 공중에서 풀려 떨어지면서 큰 사고가 난다고도 했다. 일명 '철근 비'라고 했다.
혼란 속에 일하다 돌아서 생각해보면 현장 곳곳이 사지였다. 안전보건공단 자료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개구부·단부에서 추락해 죽은 사람만 106명에 이른다. 같은 기간 비계 발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만 77명, 굴착기에 부딪혀 죽은 사람이 63명, 고소작업대에서 떨어져 62명, 사다리에서 떨어져 62명, 트럭에 부딪혀 52명, 이동식 비계에서 떨어져 41명, 거푸집 동바리 위에서 일하다 39명, 이동식 크레인에서 떨어진 인양물에 맞아 33명이 죽었다. 모두 매일매일 지척에서 스치는 현실이었다.
실제 공사장은 일하다 죽는 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이다. 지난해 1년간 산재 사고로 사망한 874명 가운데 무려 46%인 402명이 건설 노동자였다. 하지만 철근공들은 이 수치마저 믿질 않았다.
이씨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이씨같이 경력 30년이 넘는 철근공들 중엔 사람 죽은 걸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 도리어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안전 보호구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근로계약서 상엔 회사가 안전화와 안전모, 안전조끼, 안전벨트, 보호안경을 지급한다고 돼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받은 건 시중에서 5000원 하는 안전모 하나가 전부였다. 나머지는 모두 각자 알아서 구해야 했다. 인부들은 구멍 난 안전화에 본드를 발라가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듯했다. 노동자들은 "건설사들이 공사비 중 별도 항목인 안전관리비를 대놓고 빼돌린다"는 얘길 많이 했다.
'순살아파트' 사태의 시작이 된 GS건설 검단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적발됐다. 국토부는 지난 7월 5일 해당 사고 조사 결과 발표에서 "건설공사 안전관리비의 경우 건설사업자는 건설기술진흥법령상 정해진 용도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으나, 출퇴근 셔틀 임차비용으로 용도와 다르게 사용한 것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며칠 뒤 새벽 5시 반, 한 나이든 노동자가 식당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래기국 한 숟갈을 뜨며 말했다. 앞에 앉은 이씨는 식판에서 고개도 들지 않고 말 없이 깍두기만 씹었다. 공사장에서 맨 먼저 분주해지는 함바식당 바깥으론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두컴컴했다.
작업 시작 시간은 아침 7시였지만, 철근공들은 보통 새벽 5시면 현장에 나왔다. 출근하면 곧장 공사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휴게실에서 눈을 붙이거나 담소를 나누며 대기했다. 비좁은 컨테이너 휴게실에 자리가 없으면 공사장 바닥에 합판 한 장 깔아놓고 드러누웠다.
우리 팀에도 세종시나 충남 천안, 충북 옥천에서 대전 현장까지 오가는 팀원들이 있었다. 고참들은 젊은 사람들이 건설 일을 오래 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너무 이른 출근 시간을 꼽기도 했다. 내가 속한 한국인 철근팀은 모두 18명이었는데, 70대 한 명, 60대 일곱 명, 50대 네 명, 40대 네 명, 30대는 나를 포함해 둘뿐이었다. 나 역시 오후 4~5시에 일을 마치고 다음날 새벽에 출근하려면 적어도 저녁 7~8시엔 잠에 들어야 했다. 퇴근이 빠르다 해도 개인 시간이 거의 없는 셈이었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던 이씨는 자세히 보면 다리를 약간 절었다. 특별히 다친 건 아닌데 골병이 나서 지난 겨울 결국 무릎 수술을 했다고 했다. 이씨의 다리는 새벽 출근길보다 하루 종일 몸을 쓰고 난 오후 퇴근길에 더 심하게 비틀거렸다.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이씨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
내가 휘청댈 때면 그는 말 없이 뒤에서 철근을 들어주고 주의사항과 노하우를 일러줬다. 다만 그는 신입인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어떤 인생사도 묻지 않았다. 일에 필요한 것만 말했고, 내가 묻는 것에만 답했다. 가끔씩 그저 "이제 노가다엔 젊은 애들 없으니께, 우리 세대 다 나가면 너가 왕이여. 긍께 한 번 열심히 해봐"라고 격려만 해줄 뿐이었다.
그런데 한 달이 다 돼갈 무렵, 여느 때처럼 퇴근길에 이씨와 함께 공사장을 나서는데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이씨가 크게 한숨을 한번 쉬더니 내게 조용히 말했다.
이씨는 그 후로 더 이상 내게 말을 붙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