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직후 11공수여단이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진압작전(전투상보)'에 따르면, 군용트럭 54대(2½톤 42대, 1/4톤 10대, 3/4톤 1대, 5/4톤 1대)와 APC(병력수송장갑차) 2대(선두와 후미 각 1대씩)가 줄지어 이동했다.
효덕초 삼거리를 지나던 선두 장갑차 병력은 시민군을 발견하고 총격을 시작했다.
"1, 2초 서로 주춤했고 정적이 흘렀다.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갑차가 후진하더라. 그 틈에 제가 '군인이다, 피해라'라고 소리쳤다. 길 건너 집으로 도망치는데 '두두두' 소리가 들렸다. 장갑차가 다시 전진했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 시민군 최진수의 진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9년 2월)
11공수여단 후방 병력의 무차별 사격으로 진제마을 인근 '한씨 선산'에서 전재수(11)가 사망했다. 총소리에 도망가던 중 형이 사준 새 고무신이 벗겨져 이를 주우러 가다가 온몸에 총을 맞았다.
전재수의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엔 끔찍했던 그날의 현장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우측늑골 하부에서 좌측늑골 하부 부분으로 관통총상 ① 우복부 0.5cm×0.5cm 사입구와 좌복부 7cm×5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② 후대퇴부 0.5cm×0.5cm, 2cm×1cm 사입구와 (후대퇴부) 6cm×10cm 후하퇴부 6cm×3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③ 좌대퇴부 골절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갔더니 동생이 엎어져 있었다. 뒤집었는데 아랫배가 휑하니 싹 다 없어져버렸고 풀밭이 피로 물들었다. 도롯가로 나와보니 탄피가 쫙 깔려 있었다."
- 전재룡(전재수의 형) <오마이뉴스> 인터뷰(2023년 3월)
친구들과 원제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학생 방광범(12)도 총을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방광범의 검시조서를 보면 그가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음을 알 수 있다.
두부관통 총상 (두개골 좌측이 떨어져 나감)
"효덕초 인근에서 먼저 총소리가 났다. 그 순간부터 군인들이 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했다. 방광범 선배님이 내 옆에 있었는데 순간 외마디 '으' 하는 소리만 들렸다. 광범이형은 위쪽을 맞아서 얼굴이 날아가 버렸다."
- 안용남(방광범의 마을 친구)씨 진술, 광주 남구청 구술 채록(2021년 5월)
금당산에 주둔하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보병학교 교도대)가 송암동을 지나던 11공수여단을 공격했다.
교도대는 90mm 무반동총으로 11공수여단 선두 장갑차를 공격하는 등 집중 사격을 이어갔고, 11공수여단 또한 이에 대응하며 서로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11공수여단 9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다쳤다.
"장갑차에 (90mm 무반동총을) 세 발인가, 네 발인가 맞았다. (장갑차에 타고 있던 나의) 철모가 벗겨져 바닥의 핏물, 내장 위에 떠 있었다. 철모를 주워 도롯가 도랑에 복지부동으로 있었다. 조◯◯ 중령은 팔이 떨어져 껍질만 달랑달랑했고 (차◯◯ 대위 등) 나머지는 거의 토막 살해가 돼버렸다."
"1시간 정도 지나니 전방에서 '사격을 중지하라, 사격을 중지하라' 소리가 들렸다. (오인교전 종료 후) 나중에 보니까 2½톤 트럭은 벌집이 돼 있었고 바닥의 탄피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 특전사 K(당시 선두 장갑차에 탑승) 2023년 3·4월 <오마이뉴스> 인터뷰
오인교전 후 가택수색에 나선 11공수여단은 단지 젊다는 이유로 권근립(24)·임병철(23)·김승후(18)을 끌고 나와 사살했다.
"군인들이 집으로 들어와 방, 화장실까지 다 뒤지고 장롱의 이불까지 다 꺼내 난리를 쳤다. 큰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 담배, 라이터, 시계 같은 것을 가져가버리고 다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 김금순(권근립의 어머니)씨 진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198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