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디 한곳에 닻을 내리고 온전히 정착할 수 없는 존재였다. 발밑의 차가운 흙을 딛고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인간의 눈동자 속에는 언제나 '저 너머의 세계'를 품어 안으려는 아련한 열망이 출렁였다. 그러나 길 위로 발을 내딛는 행위가 시대마다 가지는 묵직한 결은 결코 같지 않았다.
태초의 이동이 생존을 갈구하는 유목의 서사였거나 정결한 마음으로 신의 보좌에 다가가던 숭고한 순례였다면, 근대의 샛별이 떠오르며 시작된 이동은 '볼 관(觀)' 자와 '빛 광(光)' 자가 섬세하게 맞물린 이른바 관광(觀光)이라는, 세상을 시각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새로운 문명적 행위로 옷을 갈아입었다.
관광과 여행은 언뜻 닮은 듯 서로의 영역을 비추지만, 그 속살을 들여다보면 결이 자못 다르다. 여행이 뚜렷한 이정표나 약속된 정거장 없이도 길 위에서 마주치는 뜻밖의 인연과 풍경의 일렁임을 넓은 품으로 포용하는 자유롭고 아득한 유랑이라면, 관광은 유흥과 오락, 지적인 탐구와 역사적 견문, 혹은 명확하게 정돈된 사건의 한복판에 서고자 하는 선명한 동기를 품고 떠나는 이동이다.
그럼에도 이 두 행위는 모두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익숙한 일상의 공간, 곧 숨 쉬던 '생활권'의 테두리를 잠시 벗어나 타인의 삶과 이국적인 풍경을 가슴에 담은 뒤 다시 자신이 출발했던 보금자리로 귀환한다는 온화한 순환의 섭리를 공유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문명이 일구어 놓은 낯선 풍광을 '관람'하기 위해 정교하게 짜인 선로와 길 위로 자신을 내던지게 되었는가? 근대라는 거대한 철마가 뿜어내는 뜨거운 연기와 차가운 철길의 굉음은 인간이 지녀온 공간과 시간에 대한 감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으며, 그 길의 아득한 끝자락에서 우리는 동래온천의 신비롭게 피어오르는 유황 증기와 근대 소비문화의 낯선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철도와 토머스 쿡, 근대 관광산업의 태동
19세기 중반, 서구의 푸른 하늘은 산업혁명이 뿜어내는 그을음과 증기기관의 뜨거운 숨결로 짙게 물들어 갔다. 공간의 거리를 아득히 압축하고 유동하는 시간을 정교하게 규격화한 근대 기술의 정점, 즉 기차의 유려한 바퀴와 선박의 웅장한 항해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삶의 지평을 비약적으로 넓혀놓았다. 이 격동하는 문명사적 전환점 한가운데서 근대 관광산업의 마스터마인드라 불리는 영국의 토머스 쿡이 역사의 무대 위로 걸어 들어왔다.
1841년, 토머스 쿡은 금주 운동의 기치를 든 570명의 무리를 모아 영국의 레스터에서 러프버러까지 연결하는 세계 최초의 단체 기차 여행을 기획하였다. 이는 단순히 육신을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옮겨 놓는 고전적 교통 수단의 제공을 넘어, 여정 자체를 하나의 아름다운 상품이자 표준화된 문화로 재구성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후 1845년 '토머스쿡앤선'이라는 여행사가 세상에 닻을 올렸고, 대량수송을 가능케 한 철도의 그물망과 제국주의의 창궐, 그리고 더 넓은 세계를 눈에 담고자 팽창하던 근대인의 열망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면서, 관광은 특권층만의 고결한 전유물에서 대중의 삶 속으로 밀물처럼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시계의 정교한 톱니처럼 오차 없이 돌아가는 철도 시각표는 사람들에게 '여가'와 '계획된 이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율동을 선물했다.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던 타향의 도시들이 철마의 거친 바퀴 소리와 함께 성큼 다가왔고, 타인의 미소와 이국적인 건축의 선을 눈에 담는 '시각적 소비'는 근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고유하고도 뜨거운 욕망으로 자리 잡았다.
개항기 조선의 유랑자들: 대륙과 해양을 건넌 시선
서구의 땅 위에 철길의 핏줄이 깔리고 관광이 하나의 유려한 산업으로 피어나던 무렵, 조선 역시 격동하는 개항의 풍랑 속에서 오랫동안 걸어 잠갔던 문호의 빗장을 열어야만 했다. 조용한 아침의 정적 속에서 살아가던 선각자들은, 바다 너머 대륙과 해양의 거친 문명을 목격하기 위해 고독한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거세게 밀려오는 근대라는 거친 파도 앞에서 그들은 국운의 기로에 서서 낯선 세계를 향해 서글프고도 결연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1883년 7월, 검은 갓과 칠흑 같은 포를 갖추어 입고 푸른 태평양을 건넌 보빙사절단의 민영익은, 미지의 대륙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거대한 서구 문명과의 강렬한 충돌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다. 하늘을 가릴 듯 높이 솟은 빌딩 숲과 굉음을 내며 달리는 기계의 거친 포효 속에서, 그는 문명이 이루어 낸 경이로움과 무너져 가는 조국의 쓸쓸한 그림자를 동시에 목격하며 깊은 탄식을 삼켰을 것이다. 이어 1887년, 최초의 주미공사로 파견된 박정양 일행 역시 낯선 이국(異國)의 정교한 제도와 문물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근대 국가라는 새로운 지평을 고독하게 모색하였다.
그중에서도 1896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전권공사로 참석했던 민영환의 여정은 마치 가시밭길 위에서 피로 써 내려간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와도 같았다. 인천항의 아득한 물결을 뒤로하고 상해, 나가사키, 도쿄를 거쳐, 드넓은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와 뉴욕, 런던, 그리고 마침내 모스크바에 이르는 장구한 길. 돌아오는 길에는 차디찬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며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장대한 궤적을 감행했다.
그 험난했던 유랑의 기록인 <해천추범(海天秋帆)>에는 '가을 바다와 푸른 하늘을 누비는 한 포기의 외로운 돛단배'처럼, 거대하고 차가운 근대 문명이라는 폭풍우 한가운데 던져진 조선 지식인의 깊은 고독과 경악, 그리고 처연한 고뇌가 짙게 배 있다.
이러한 눈물겨운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1898년 어린 나이에 제국의 낯선 풍경을 목격해야 했던 영친왕의 일본 및 미국 여행과, 1900년 빛의 도시에서 화려하게 열린 파리만국박람회장을 누비던 민영찬의 서글픈 시선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박람회장 한가운데서 전 세계가 '근대'라는 정교하고도 가혹한 기계 문명으로 재편되는 현장을 목격하며, 그들은 기울어가는 조국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세계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려 했던 뜨거운 열망과 안타까운 모색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남긴 발자국은 단순한 유람의 흔적이 아니었다. 거친 풍랑을 헤치며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그들의 시선은, 문명의 거대한 변혁기 속에서 나라의 운명을 짊어지고 고뇌했던 조선 지식인들의 아프고도 숭고한 궤적으로 오늘날까지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식민지 근대와 제국의 시선: 일본시찰단과 '동래온천'
1910년 강제 병합의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이후, 길 위를 걷는 이동의 성격은 식민지 통치 권력의 침묵하는 의도와 복잡하게 얽혀 들었다. 1920년대에 이르러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와 신문사들은 조선의 엘리트층과 지식인, 지주들을 끌어모아 이른바 일본시찰단이라는 이름의 이동을 기획하였다.
3·1운동의 뜨거운 함성 이후 일제가 기만적으로 표방한 이른바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이 시찰 프로그램은, 조선인들에게 근대화된 제국 일본의 화려한 박람회, 거대한 공장, 정교한 도시 시설을 지켜보게 함으로써 제국의 힘에 압도당하도록 설계된 정밀한 시각적 조율이었다. "제국의 문명을 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정숙한 명령 속에서 조선인들의 일본 관광이 장려되었다.
비록 당시 바다 너머로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들의 수는 전체 조선 인구에 비하면 밤하늘의 손꼽히는 별처럼 극소수에 불과하여 대중화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이 '시찰'과 '관광'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근대적 소비문화와 위생, 그리고 유흥이라는 낯선 감각들이 조선 사회의 틈새로 점차 축축하게 스며들었다.
이러한 식민지 근대 소비문화의 오묘하고도 서글픈 일면을 가장 극명하게 비추어주는 거울 같은 공간이 바로 부산의
동래온천이었다.
오래전부터 신비로운 탕수(湯水)가 샘솟아 아픈 이를 치유하던 예스러운 동래의 온천지대는, 근대적 교통망인 전차와 철도가 도시의 핏줄처럼 부설되고 일본 자본의 탕전 시설이 들어서면서 대중적인 '근대적 목욕탕'이자 '관광 유흥지'로 온전히 재편되었다.
피어오르는 뜨거운 유황 증기 속에서 옛 선비들이 풍류를 읊던 아늑한 유락(遊樂)은, 근대적인 '위생'과 '화폐 소비'의 매끄러운 영역으로 개조되었다. 탕 속에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몸을 담그고 창밖의 경치를 바라보는 행위는, 근대 도시인이 돈을 지불하고 지친 일상과 바꿀 수 있는 하나의 정교한 '관광 상품'으로 변모하였다.
동래온천은 근대가 안겨준 모던함의 화려한 조명과 식민지 현실이 가진 그늘진 쓸쓸함이 차갑게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탕 안의 더운 열기는 삶의 무게와 시름을 잠시 잊게 해주는 환각을 선사했지만, 그 온천수를 끊임없이 끌어올리는 차가운 쇠 파이프와 웅장하게 들어선 여관 건물들은 식민지 수탈의 자국과 근대화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품은 채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멈추지 않는 길, 근대의 유산과 우리의 시선
역사의 굽이굽이 속에서 '관광'과 '여행'이 걸어온 아득한 궤적을 추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 타자를, 그리고 눈앞의 세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가"를 고요히 확인하는 묵상의 작업이다.
19세기 토머스 쿡이 쏘아 올린 대중 관광의 신호탄은 산업혁명이 안겨준 시간과 공간의 위대한 축소였으며, 개항기 <해천추범>을 쓰며 거친 바다를 건넜던 민영환의 눈빛에는 서구 문명에 대한 경외와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처연한 눈물이 함께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시찰단의 묵직한 발걸음과 동래온천의 피어오르는 모락모락한 증기 속에는, 식민지라는 비극적 조건 속에서도 야릇하게 피어나던 근대적 소비의 욕망과 모던함에 대한 갈증이 스며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저마다의 이정표를 품고 길을 떠난다. 손바닥만 한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비행기표를 손쉽게 예매하고, 이국적인 도시의 풍경을 손끝으로 빠르게 소비하는 유례없는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롭고 경쾌한 이동과 관광의 아름다운 이면에는, 근대라는 거대한 문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며 대지 위에 새겨놓은 역사적 흔적과, 낯선 문물과 마주하며 두려움과 열망으로 눈물지었던 선대들의 서글픈 고뇌가 아련히 서려 있다.
동래온천의 오래된 깊은 샘에서 온천수가 여전히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피어오르듯, 낯선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발을 내딛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밝혀줄 '빛(光)'을 마주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열망은, 앞으로도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산포커스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