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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를 온몸에 품고 있는 뉴욕. 누군가 살아냈고, 누군가 살아가는 빌딩 숲 사이사이의 이야기를 하나씩 담아 보려 합니다.

▲2026년 9월 29일 미국 뉴욕주 이타카에 위치한 코넬 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들이 걸어가고 있다. 뉴욕주 검찰총장은 2024년 캠퍼스 내 남학생 사교 클럽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코넬대 전 학생의 주장에 대해 대학 측이 초기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제인 도(Jane Doe)'라는 가명으로만 알려진 이 학생은 2024년 10월 19일 '카이 파이(Chi Phi)' 사교 클럽 숙소 안에서 약물을 투여받은 뒤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미국 ABC 뉴스는 지난 27일 속보를 통해 아이비리그 명문대 중 하나인 코넬 대학의 학내 집단 성폭행 사건(Gang Rape)을 뉴욕 지방 검사가 재수사 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2년 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검사가 닫아버렸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대중의 거센 분노와 지속적인 항의가 가해자들을 다시 형사 재판에 세울 수 있게 했다. 일부는 뉴욕 주지사에게 항의 서한을 보내며 주정부가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다.
한국인 포함 가해자 7인
우리 가족은 뉴욕 맨해튼 인근의 주택 지역에 살고 있다. 2년 전인 202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미주 한인 사회에도 큰 공분을 사고 있다. 7시간 동안 7명의 남학생이 여학생 한 명을 상대로 저지른 강제 약물 투여와 성폭력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가해자 중 한 명이 한인 유학생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는 이들을 '코넬 7인(Cornell Seven)'으로 부른다. 대학 내 사교 클럽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탈과 범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코넬 7인에 대한 분노는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코넬 7인과 가족의 인적 사항이 파헤쳐지고, 기소를 중단한 검사와 주도자 2인만 자퇴시킨 후 나머지는 반성문과 정학 등 비교적 가벼운 징계를 한 대학, 이들을 취업시킨 회사에까지 비난과 항의가 쏟아지고 있다. 결국 유명 금융회사(Wells Fargo, 웰스파르고)는 가해자를 해고했다.
피해 여학생은 사건 이후 자퇴했고, 형사 재판이 불가능해지자 가해자 7인과 학교, 관련 사교 클럽 등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시작했다. 신원 보호를 위해 피해자를 제인 도(Jane Doe)라 부르는데, 이는 한국의 '홍길동'과 같이 불특정 일반인에게 붙이는 가명이다. 제인 도와 코넬 7인의 소송에 미 전역의 눈이 쏠리고 있다.
재수사 소식이 전해진 날, 외출했다가 곁에 있던 미국인 중년 부인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시작은 날씨에 관련된 평범한 스몰토크(Small Talk)였다. 주말 동안 뉴욕에 몰아닥친 비바람 폭풍에 나무가 쓰러지진 않았는지, 다른 피해는 없었는지, 서로 안부를 묻던 중이었다.
내가 한국인임을 눈치 챘는지 그분이 갑자기 '코넬 세븐' 아느냐고 묻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다.
"가해자 7명 중에 (영어식 이름이 아닌) 진짜 이름, 본명이 밝혀지지 않은 건 윈스턴 리(Winston Lee)밖에 없어, 알고 있어?"
그랬다. 나머지 6인의 미국인 학생은 본명과 얼굴 사진, 근황까지 파헤쳐져 SNS를 타고 정보가 빠르게 확산 중이다. 소송장에서 드러난 그들의 가해 내용도 퍼지고 있다. 그 중 한국인 학생은 사진과 영문 이름만 확인되었고, 처벌받지 않으려고 한국으로 도망해 입대했다, 다시 돌아와 학년을 바꿔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등의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돈다.
미국과 달리 가해자 신상을 다루는 한국의 법에 관해 설명하려다 말고, 왜 내게 이런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는지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내가 리(Lee)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한국에는 리(Lee)와 김(Kim)이라는 성이 흔하다. 아니면 우리 한국인이 그를 감춘다고 생각하는 거냐?"
중년 부인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아니다, 아직도 (그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놀라워서, 그냥 함께 연대 하자는 뜻"이라고 얼버무렸다.
코넬 대학은 뉴욕주가 무상으로 제공한 드넓은 부지 위에 에즈라 코넬(Ezra Cornell)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학교다. 이 독특한 상생 관계 덕분에 명문 사립이면서도 뉴욕 주민에게는 공립대처럼 학비 혜택이 주어진다. 이 때문에 뉴욕에 거주하는 한국계 학생들도 많이 진학한다. 한인 사회에서도 코넬 동문회와 코넬 가족이 제법 크다는 얘기다.
난 그 중년 부인에게 미국의 한인 사회도 충분히 화가 나있고, 항의 서신과 서명 운동도 열심히 하며 이미 연대 중이니 걱정 말라고 말해 주었다.
십여 년 전인 2015년 무렵, 같은 코넬대에서 한인 유학생의 범죄가 드러난 적이 있다. 여학생 기숙사 화장실에 설치된 불법 촬영 카메라가 발각되고 수사에 들어갔다. 범인은 한인 유학생(당시 34세)으로 밝혀졌다. 지역 신문 <이타카 타임스>(IthacaTimes, 2017년 2월)는 범인이 밝혀졌어도 이미 한국으로 귀국해 버려 수배만 되고 처벌은 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당시에도 '한국인은 범죄를 저지른 후 군대로 도망한다'는 말이 한동안 돌았다고 한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범죄와 관련된 한국인이 군대와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한없이 씁쓸했다. 한인 사회에서는 인물 사진과 영어명이 기소장에 공개되었고, 출신 국제학교까지 공개된 마당에 한국 언론이 이 사건을 다루지 않고 잠잠한 이유를 궁금해 한다.

▲뉴욕 주립대와 코넬대학의 협업코넬 대학은 명문 사립대학교이지만, 뉴욕주가 넓은 부지를 무상 제공하면서 독특한 상생을 하게 되었다. 코넬대는 농업생명과학대나 인간생태연구대학 등 공익을 위한 특수대학을 설립하고, 뉴욕 주민에 한해 공립대와 같은 다양한 학비 혜택도 제공한다. 또한 맨해튼과 인근 뉴욕 주립대와 협업하거나 연구기관을 두고 활발히 활동하는 중이다. 우리 가족이 살고있는 롱아일랜드에 뉴욕주립대(SUNY)의 한 캠퍼스에 노사관계학(ILR)으로 유명한 코넬대 연구소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 장소영
대학 사교 클럽, 개선될 수 있을까
미국 대학 내 학생 사교 클럽과 관련한 일탈 사건은 사실 매년 빈번하게 일어난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카이 파이(Chi Phi) 클럽처럼, 이들 사교 클럽은 전통적으로 그리스 문자로 이름을 짓고 내부 인맥을 든든히 구축한다. 표면적으로는 학문 추구나 봉사 활동, 리더십 함양을 목적으로 하지만 클럽만의 비밀 입단식이나 사교 파티 등이 범죄의 온상이 되곤 했다.
남학생 사교 클럽(Fraternity, 프레터니티)과 여학생 사교 클럽(Sorority, 소로리티)은 클럽 간에 협력 관계를 맺고 활동하기도 한다. 전국구 대학에 조직을 둔 거대한 클럽도 있으며, 미국 대학 초창기 역사와 함께 시작하여 200년 가까이 된 클럽도 있다.

▲신입생 입학 기간이자 홈커밍데이 주간을 맞아 인근 대학에 걸린 사교 클럽 베너들. 클럽들은 전통적으로 그리스 문자를 가져와 이름을 짓는다. 사진 속 베너를 보면 알파 파이 알파 클럽이 코넬대학 흑인 남성 클럽, 나머지 네 개의 클럽은 흑인 명문대 하워드 대학에서 시작된 남학생과 여학생 클럽의 베너로 현재 이 대학에 아프리카계 학생의 수가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장소영
위 사진 속 베너 중 알파 파이 알파(ΑΦΑ) 클럽은 1906년 코넬대학교에서 시작한 아프리카계 남학생 사교 클럽으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도 회원이었다. 오메가 파이 파이(ΩΨΦ) 클럽은 흑인 명문 하워드 대학에서 시작한 남학생 클럽으로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도 이 클럽 멤버였다.
전문가들은 이 사건이 전국적인 주목을 받는 이유는 그동안 이들 사교 클럽의 일탈을 보며 쌓여왔던 분노가 임계점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한 사건 자체가 개인 범죄가 아니라는 점도 화를 키웠다. 피해 여학생은 강제로 음주와 약물에 노출된 후 7시간 동안 7명에게 피해를(성폭력을) 당했다.
주동자는 평소 친구로 지냈던 남학생이었다. 그는 카이 파이 그룹 채팅방을 통해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여성을 입에 담기 어려운 말로 표현하며 다른 회원들을 여성이 있는 방으로 유도했다.
대중의 분노는 가해자 7명 뿐 아니라, 그 사실을 알고도 외면했던 클럽 멤버들에게도 향하고 있다. 리더십을 강조하는 명문대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선한 양심이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사후 조치를 취했어야 할 '어른', 즉 학교 당국에 대한 비난도 거세다. 이번 일 뿐 아니라 어른들의 방관과 솜방망이 처벌이 사교 클럽의 범법 행위를 수십 년 동안 키워왔다는 것이다. 이타카 시장은 성명을 통해 시의 경찰력을 배제하고 사건을 축소한 코넬대 측에 유감을 표했다.
지역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대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도 많다. 더 어린 중고교 운동 클럽, 사교 파티와 모임, 단톡방에서 이미 범죄의 싹이 될 만한 언행이 돌고 있는데도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가볍게 넘기는 학부모와 코치, 지도 교사의 태도가 지적을 받고 있다. 문제 제기를 하는 학생과 학부모가 내부 고발자가 되어 겪는 왕따 문제도 심각하다고 한다. 하루에 몇 건씩, 문제를 제기 했다가 되려 '문제 학부모'가 되어 전학을 하거나 팀을 옮겨야 했던 사연들이 게시판에 올라온다.
우리 가족이 속한 교육구는 주변의 명문 학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익명의 한 학부모는 학부모 게시판에 "가족적인 분위기의 작은 학군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라며 "비록 디비전 2(대학 진학이 가능한 운동 역량 레벨)는 놓쳤지만 아이의 행복은 찾았다"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격려 댓글 중에 "미래의 엡스타인(미국의 기업인으로 성범죄로 투옥된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 편집자 주)이 길러지지 않도록 우리 모두가 더 노력해야 한다"라는 글이 유독 눈에 띄었다.
과거 한국 대학의 지나친 음주 문화처럼, 미국 대학의 사교 클럽 문화 역시 갈무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뉴욕타임스> 28일 자에 따르면, 코넬대에서는 카이파이 클럽을 폐쇄했으며, 2년 전과 달리 사건에 여성 고위 검사가 배정되었다고 한다. 코넬 세븐 전원이 기소되었으며 추가 혐의도 검토될 예정이다. 따라서 재학생 신분인 한국인 학생 리도 이번 소송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성범죄에 대해서는 자비가 없는 미국에서 7명의 학생들에게 어떤 판결이 내려질지, 또 이를 통해 미국의 대학 클럽 문화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지 미국 사회가 주목하고 있다.

▲코넬 대학을 조롱하는 밈카이 파이(Chi Phi)는 200년이나 된 학생 사교 클럽이다. 미국 대학에는 그리스 문자로 이름을 만든 다양한 사교 클럽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인맥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범죄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명문 코넬대를 명예의 전당이 아닌, 강간 클럽의 전당이라고 조롱하는 밈이 돌고 있다. ⓒ 인터넷 갈무리
2014년, 맨해튼 소재 명문 컬럼비아 대학 캠퍼스에서 진기한 장면이 포착되었다. 한 여학생이 매트리스를 들고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 캠퍼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졸업식에도 매트리스를 들고 나타났다. 재학생이었던 엠마 설코비치는 자신의 기숙사 방에 들어와 성폭력을 한 가해자에 대해 무죄가 선고되고 학교측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항의의 의미로 매트리스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엠마는 미국 미투(Me, too) 운동과 용감한 피해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10년도 더 지났지만 피해자는 여전히 고통 받고, 가해자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코넬대 가해자들의 단톡방에는 '내가 이래서 우리 클럽을 좋아한다'(I F* love Chi Phi')라는 메시지가 남아 있다. 파괴된 일상과 부끄러움은 가해자의 몫이어야 한다. 200년간 어떠한 일탈 행위도 무심히 감춰준 클럽과 인맥이 더이상 가해자의 기댈 언덕이 되어서는 안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