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고 허범욱 감독 추모 상영제가 열렸던 한국영상자료원 현장. ⓒ 인디스토리
"우리는 언젠가 이 작은 땅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이 너무 외롭고 고단해서 마치 끊어진 다리 앞에 선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중략) 당시 끊어진 다리를 바라보며 비관하던 누구와 달리 직접 외나무다리를 놓아 그 위를 맨몸으로 건넜습니다. 다리 건너편에 도달한 다음엔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계속 동아줄을 던졌습니다. '여기, 여기 있다고'. 그렇게 손 흔들고 있는 당신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는 그런 당신을 참 좋아했습니다."
박재범 감독이 추모사를 읽어 내려가자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지난 6월 화재 사고로 치료받던 중 7월 28일 세상을 떠난 고 허범욱 감독. 이날 추모 상영회에는 유가족과 동료, 선후배들이 모여 저마다 고인과의 기억을 꺼내놓았다. 허 감독은 첫 장편 애니메이션 <창백한 얼굴들>(2014) 이후 10년 만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아래 <구살돼지>)의 극장 개봉을 앞두고 사고를 당했다.
허 감독의 추모 상영회가 열린 지난 12일 오후 4시, 서울 상암동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 1관에는 250여 명이 모였다. 고인의 단편 데뷔작 <평범한 식사>(2009)와 유작 <구살돼지>(2024) 상영을 앞두고, 상영관 앞에 마련된 허 감독 관련 전시 공간도 관객들로 북적였다.
이날 고인과 한국영화아카데미 동문인 박재범 감독, 두 편의 장편 작업을 함께한 이한수 디자이너, 멘토 교수였던 오승욱 감독이 차례로 추도사를 낭독했다.
"아낀 칭찬, 다음 작품에서 천천히 하려 했는데..."

▲지난 13일 고 허범욱 감독 추모 상영제가 열렸던 한국영상자료원 현장. ⓒ 인디스토리
추모 영상 직후 단상에 오른 이한수 디자이너는 <구살돼지>의 캐릭터와 배경 디자인, 포스터 작업을 맡은 오랜 동료다. 이 디자이너는 "형은 그렇게 전설 속으로 걸어간 사람, 그저 더 큰 이야기가 되었다고 생각하겠다"며 "남은 저희는 열심히 그리고 열심히 만들겠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오승욱 감독은 "<구살돼지>를 보는 내내 기뻤다"며 "그는 여전히 분노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그 분노가 세상의 힘없고 약한 이들이 겪는 억울함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명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했고, 연출 또한 놀랍게 발전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 감독은 "<창백한 얼굴들>을 봤던 당시 그에게 칭찬을 다 전하지 않았다. 다음 영화에서 더욱 아름다운 자신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라 믿었기에, 그때 천천히 이야기 하리라 생각했다"며 "비극적인 사고로 이제 그의 다음 영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나는 그를 세상의 힘없고 약한 것들의 억울함을 강렬 분노로 아름답게 표현해내는 차분하고 고요한 감독으로 최선을 다해 기억하겠다"고 다짐을 드러냈다.
세 사람의 추도사가 끝난 뒤 허 감독의 친누나 허보연씨가 유가족을 대표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허씨는 "동료분들, 선후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사람 허범욱, 감독 허범욱을 참 많이 알게 되었다"며 "그 아이가 현장에서 얼마나 열정적이고 따뜻한 동료였는지를 들으며 가족으로서 그 무게를 진작 더 알아주지 못한 미안함에 너무 마음이 아팠고, 그 삶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지 다시금 깨달았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 소외된 존재 오래 바라본 사람

▲지난 13일 고 허범욱 감독 추모 상영제가 열렸던 한국영상자료원 현장. ⓒ 인디스토리
유작을 공동 제작한 크리에이티브 섬 조혜승 대표는 상영에 앞서 "허범욱이라는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했다.
조 대표는 이번 작품 내용에 대해서만큼은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애니메이션은 영화나 소설이나 그림보다도 더 창작자가 보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장르"라며 "다음 작품은 아마 더 큰 투자를 받아 상업적 작품을 할 수도 있기에 이번 작품만큼은 마음 가는 대로 원 없이 해보시라 했다. 제작자로서 간섭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만, 이 작품에 대해선 전적으로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조 대표는 "허 감독이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 관객석 어딘가에 앉아 있을 것만 같다"며 "아쉽게 일찍 떠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빠르게 돌아온다고 생각을 한다. 어떤 곳에서 또 만날 날을 기약하고 싶다"는 말로 눈시울을 붉혔다.
이날 추모 상영회 진행은 <구살돼지>에서 1인 30역의 목소리와 모션 캡처 연기를 소화한 배우 한우진이 맡았다.
그는 "단편 데뷔작부터 우리 사회의 소외된 존재들을 오래 바라보신 분"이라고 허 감독을 소개하며 "창작은 작은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터널을 두 다리만 믿고 걷는 일과 같다"는 고인이 생전 자주 했던 말도 전했다.
한편 <구살돼지>는 2024년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부문 특별언급을 받았다. 같은 해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는 애니메이션 작품 최초로 본선 장편경쟁 최우수작품상을, 제20회 서울인디애니페스트에서는 미리내로 관객상을 받으며 평단과 관객의 고른 지지를 얻었다. 일본에선 이미 지난 5월 29일 개봉, 도쿄·오사카·교토·고베·나고야 등 총 11개 주요 도시에서 상영된 바 있다.
배급사 인디스토리는 당초 8월 5일이었던 개봉일을 연기하고, 오는 10월 21일 작품을 정식 개봉할 예정이다. 개봉 전까지 고인을 기리는 릴레이 상영도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