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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다. (AI생성 이미지) ⓒ 오마이뉴스
나는 발달장애(자폐 스펙트럼)를 가진 일곱 살 아들을 양육하는 워킹맘이다. 2020년, 코로나19의 혼돈 속에 태어난 아이에게 두 돌 무렵부터 마스크를 씌워가며 언어치료와 감각통합 등 온갖 재활치료실을 전전했다. 수많은 검사 끝에 마주한 진단명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였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아들의 장애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회는 부모가 겪어낸 그 치열한 시간과 눈물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는 듯 여전히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놀이터에서 아이가 낯선 소리를 내거나 반향어를 읊조릴 때, 상동행동을 반복할 때 슬그머니 거리를 두는 또래들의 모습은 엄마를 움츠러들게 한다.
하지만 나를 진정 송곳처럼 찌르는 것은 아이들의 서툰 반응이 아니다. 독특한 억양으로 건넨 아들의 인사를 무시하는 아이 뒤에서, 내 아이를 마치 위험한 이물질 보듯 쳐다보는 어른들의 차가운 눈빛이다.
눈에 띄는 지체장애는 아이들에게 양보와 배려를 가르치기라도 쉽다. 그러나 겉모습은 멀쩡해 보이는 신경다양성과 뇌신경 발달장애에 대한 사회적 이해는 여전히 바닥에 머물러 있다.
힘겨운 터널을 지나며 맞벌이 가정인 우리 집은 올해부터 비로소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 역시 장애아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사회에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제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를 지탱해 줄 공적 시스템이 절실했다.
다행히 활동지원 서비스는 팍팍한 일상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그러던 중 보건복지부가 지난 10일 발표한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책임제' 정책 추진 소식을 마주했다. 정부는 생애주기별 맞춤형 돌봄 강화와 일상 속 자립과 사회참여 확대라는 두 가지 큰 틀 안에서 여러 세부 방안들을 제시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피터팬 아빠' 고 전경철님의 비극이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덕분인지, 기존 평일 위주이던 최중증 발달장애인 돌봄이 주말까지 단계적으로 확대된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전체 발달장애인의 70%가 성인이라는 현실을 반영해 주간활동서비스 대상을 넓혀 고립을 막겠다는 취지도 눈에 띄었다.
'선의'에 기대는 돌봄, 시혜적 지원

▲정은경 보건복지부 장관이 10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 발달장애인 돌봄 국가 책임제 추진방안을 브리핑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러나 제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깊은 한숨이 나온다. 신체적·감정적 소모가 극심한 최중증 장애인 케어 현장에서, 전담 인력에 대한 처우 개선이나 위험수당, 전문 교육 시스템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이번에 활동지원 인력을 구하며 뼈저리게 느꼈다. 신체 건강하고 활동량이 많으며 돌발행동 가능성이 있는 자폐 남아는 활동지원사 매칭 시장에서 기피 대상 1순위다. 수당과 안전망이 없는 선의에 기대는 돌봄은 필연적으로 현장의 '극심한 구인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책의 시선이 여전히 '가족의 숨통을 잠깐 틔워주는 돌봄 시간 때우기'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정부 문서에는 그럴듯하게 '자립 지원'과 '사회 참여'가 적혀 있다. 그러나 실상을 뜯어보면 대부분 복지관 안에서 단순 프로그램을 돌리며 낮 시간을 흘려보내는 구조다.
비장애인 청년에게는 취업 지원과 경제적 독립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으면서, 발달장애인에게는 최저임금 적용 제외 사업장이나 단순 임가공 외에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일할 수 있는 맞춤형 공공 일자리 하나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는다. 정책의 초점이 "발달장애인이 어떻게 사회의 일원으로 자립할 것인가"가 아니라, "보호자가 쉴 수 있게 낮 동안 아이를 어디에 안전하게 가둬둘 것인가"라는 '보호자 중심 케어'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저출생 대책과 비교하면 그 박탈감은 더욱 뼈아프다. '국가 소멸 위기'라는 명분 아래 다자녀 가구에는 주택 특별공급, 파격적인 저리 대출, 세제 감면, 부모급여가 전방위적으로 쏟아진다. 다자녀 가정은 '애국자'로 칭송받으며, 아이가 건강한 생산 인구로 자립할 수 있도록 생애 전반의 기반을 닦아준다.
반면 장애인 정책은 여전히 '보건복지부의 시혜성 사업'에 머문다. 비극적인 가족 참사가 터져야만 마지못해 땜질식 예산이 배정된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국가가 키운다"던 호언장담은 장애아 앞에서는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만 18세를 넘기는 순간, 공교육의 울타리마저 걷히며 평생의 부양 책임은 고스란히 늙어가는 부모의 등 위로 쏟아진다. 진정한 자립과 사회 통합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국가책임제는 결국 '위기 가정 파탄을 막기 위한 응급 처방'이라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바우처 몇 시간만으로 삶이 나아질 순 없다
나는 과거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했던 간호사였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의 정책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명확해진다.
눈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중환자실에서 신규 간호사들이 울며 줄줄이 사직할 때, 그들에게 단순히 근무 시간을 1~2시간 줄여주거나 프리셉터(사수)를 며칠 더 붙여준다고 해서 자립할 역량이 생기던가? 결코 아니다.
신규 간호사의 서투른 실수를 기다려주는 환자와 보호자의 너그러운 태도, 훈련을 위해 투자하는 체계적인 교육 시간, 과중하지 않게 감당 가능한 환자 수를 배정하는 인력 구조, 그리고 곁에서 손발을 맞춰주는 다양한 의료보조 인력이라는 '입체적인 생태계'가 갖춰졌을 때 비로소 그 간호사는 사수로부터 독립해 당당한 1인분의 몫을 해낼 수 있었다.
발달장애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돌봄 바우처 몇 시간을 더 쥐여준다고 해서 그들이 지역사회에 홀로 설 수는 없다. 낯선 행동을 위험으로 단정 짓지 않고 너그럽게 품어줄 수 있는 사회적 인식의 성숙, 실수하더라도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게 돕는 지역사회 연대, 그리고 이 가족들이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국가적 시스템이 맞물려야만 '자립'이라는 기적이 시작된다. 사회의 냉소 어린 시선이 그대로라면, 국가가 보내주는 지원 시간 몇 시간은 그저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잠시 몸을 숨기는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피터팬 아빠'로 알려진 고 전경철씨(오른쪽)와 아들 제원씨. ⓒ MBC 실화탐사대 갈무리
저출생 극복을 위해 새로운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투자 만큼이나, 이미 태어나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을 국가가 끝까지 책임지는 것 역시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고 숭고한 책무다.
발달장애인 국가책임제가 단순한 '돌봄 시간 연장'을 넘어, 장애 가정의 존엄을 지키고 우리 아이들이 한 사람의 당당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사회의 공기를 바꾸는 진정한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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