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2일 오후, 전북 무주를 방문했다. 사실 내게 무주 하면 떠오르는 기억은 무주구천동의 서늘함과 리조트에서 스키나 썰매를 타던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한국을 찾았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애정을 가지고 있던 도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무주는 내가 아내를 만나 연애했던 곳이기도 하다. 아내는 대학생 시절 무주리조트 스키장에서 핫도그를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한 손님이 가격에 놀라 "무슨 핫도그에 금테 둘렀어요?"라고 말했다는데, 그가 배우 최민식씨였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지금도 우리 가족에게는 유명한 일화다.

그런 무주를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다시 찾았다. 마침 이날은 무주반딧불축제 마지막 날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지역 축제야 뭐 거기서 거기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도착해 보니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교통 혼잡이 빚어질 정도로 인파가 몰려 있었다. 겨울 시즌과 리조트를 빼면 비교적 한산한 도시라고 생각했던 무주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주반딧불축제 현장에서 붉은 관복과 깃발을 갖춘 전통 취타대 행렬이 지나고있다. 최호림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요즘 입소문을 타면서 한창 유명세를 얻고 있다는 곳이 있었다. 바로 태권브이 테마파크다. 아직 정식 개장 전이지만 반딧불축제를 기념해 이벤트성으로 한시 선공개된 테마파크에 들어서자 수많은 인파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12m 높이의 거대한 태권브이를 마주하는 순간, 묘하게 가슴이 울컥했다.

건담 능가하는 퍼포먼스, 20톤 태권브이의 위력

AD
이는 일본 도쿄와 요코하마에 설치된 거대 건담을 보고 부러워했던 지난날의 아쉬움을 완전히 씻어내고도 남을 만한 광경이었다. 세상에, 어린 시절 김청기 감독이 만들어낸 태권브이가 마침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니.

더구나 전날인 11일에는 원작자인 김청기 감독도 초청돼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하루 차이로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이 묘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함께 간 아내도 그랬고, 현장을 찾은 나와 연배가 비슷한 관광객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 왔다는 한 관광객은 태권브이를 보는 순간 놀랍고 감격스러워 어린아이를 안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스리랑카에서 왔다는 한 관광객 역시 연신 "멋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은근한 자긍심이 들었다.

20톤에 달하는 거대한 로봇이 자연스럽게 태권도 동작을 연출하는 모습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수많은 관람객이 스마트폰을 들어 태권도 동작을 선보이는 12m 대형 태권브이 로봇의 시연 모습을 담고 있다 최호림

그러나 이곳에 대한 평가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이 테마파크의 타깃층을 잘못 잡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언제 적 태권브이냐", "요즘 어린아이들이나 젊은 세대가 태권브이를 알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다. 이 역시 충분히 수긍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우려 섞인 목소리를 뒤로하고 이 거대한 태권브이를 바라보자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내게 꿈과 희망을 주었던 태권브이는 한때 일본 마징가 Z를 표절했다는 논란으로 외면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논란이 어린 시절 태권브이가 우리에게 안겨준 꿈과 희망까지 거짓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태권브이는 태권도라는 이미지를 입은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는 콘텐츠

그렇게 갖은 풍파와 구설을 이겨낸 태권브이는 우리 70년대생들에게 그만큼 특별한 존재다. 그 아이들이 자라 어느덧 40대와 50대가 되었고, 이제는 자신의 아이들 손을 잡고 다시 태권브이를 찾아오고 있다.

해외에서 1970년대 록밴드 퀸(Queen)의 음악을 할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듣고, 21세기를 사는 손자까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이야기하며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40~50대 역시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했던 문화를 자녀들에게 이어주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날 현장에도 할아버지와 딸,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이가 함께 온 3대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눈에 띄었다.

한편에서는 "왜 하필 무주에 뜬금없이 태권브이를 만들었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러 지자체를 다니다 보면 관광객의 눈길을 끌고 지역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만든 대형 조형물들을 종종 보게 된다. 좋은 의미를 담고 있는 데다 완성도까지 높다면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로는 지역의 고유한 정체성과 동떨어진 조형물도 있다. 그럴 때면 취지는 이해하면서도 과연 이 많은 예산을 들일 만큼 꼭 필요한 사업이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곤 했다.

 인파로 붐비는 태권브이 테마파크 건물 전경 무주반딧불축제 기간 선공개된 태권브이 테마파크
▲인파로 붐비는 태권브이 테마파크 건물 전경 무주반딧불축제 기간 선공개된 태권브이 테마파크 ⓒ 최호림

그런 점에서 무주와 태권브이의 만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주는 태권도원이 자리한 태권도의 도시이고, 태권브이는 1970년대 탄생해 오랫동안 사랑받아 온 로봇 캐릭터다. 무주의 상징인 태권도와 문화 아이콘 태권브이가 만나면서 태권도의 정체성을 친근하게 전달하는 문화 콘텐츠가 탄생한 셈이다.

그렇게 연신 관중들의 탄성을 자아내던 태권브이가 움직임을 멈추자 모든 것이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쇼는 다시 시작됐다. 전주대학교 태권도 시범단 '싸울아비'가 등장해 화려한 태권도 시범을 선보였다. 우리가 어린 시절 태권도장에서 배우던 딱딱한 시범과는 달랐다.

'싸울아비'는 2024년 영국의 오디션 프로그램 <브리튼즈 갓 탤런트> 시즌 17에 참가해 골든 버저를 받고 준결승에 진출한 팀이다. 고난도 격파와 깃발 퍼포먼스, 창작 품새 등을 선보이며 현장에서도 화려한 무대를 이어갔다.

실제 오디션에 참여했던 전주대학교 3학년 박진우 학생은 태권도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현장에서 만난 그는 패기가 넘치면서도 겸손한 태권도인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시범을 선보이던 전주대학교 2학년 노현경 학생에게 태권브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제가 태어나기 전에 나온 캐릭터인데 부모님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큰 태권브이 앞에서 직접 시범을 보일 수 있어 뿌듯하다"고 말했다.

거대한 태권브이 로봇 앞에서 전주대학교 태권도 시범단 '싸울아비' 소속이자 태권도 인플루언서인 박진우 학생 최호림
 거대 태권브이 앞에서 펼쳐진 싸울아비의 리허설 현장 (무주 태권브이 테마파크 무대)
▲거대 태권브이 앞에서 펼쳐진 싸울아비의 리허설 현장 (무주 태권브이 테마파크 무대) ⓒ 최호림

그 말을 듣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추억하는 태권브이를 누군가는 부모에게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이제는 그 앞에서 자신의 꿈과 실력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공연 내내 이 무대를 묵묵히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무주군청 관광과 관계자들이었다. 아직 정식 개장을 앞둔 만큼 자칫 태권브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소비되거나 다른 시선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의식한 듯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태권브이 테마파크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그저 화려한 볼거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기획과 문화 향유 정책을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물론 다른 시선도 있을 수 있다. 수익 창출을 위해서는 다양한 상업적 이벤트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무주만의 자생력을 갖춘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태권브이 피규어를 판매하고 있었고, 다양한 IT 기술을 활용한 VR 체험과 태권도 송판 격파 등 아이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었다.

 태권도 체험 존에서 아이들과 소통하는 현장(무주 태권브이 테마파크 내부 체험 공간)
▲태권도 체험 존에서 아이들과 소통하는 현장(무주 태권브이 테마파크 내부 체험 공간) ⓒ 최호림

단순히 거대한 로봇 하나를 세워놓은 데 그치지 않고, 추억의 콘텐츠를 현재의 체험 문화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곳이 앞으로 상업적으로도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태권브이 피규어나 프라모델 하나쯤은 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태권브이 무대가 모두 끝나고 테마파크를 빠져나오니 이번에는 90년대 레트로 공연이 폐막 이벤트로 열린다는 안내가 들려왔다. 그 순간 한 가지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바로 가수 최호섭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호섭은 1976년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 V>의 주제가를 부르며 음악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태권브이 테마파크에서는 계속 '날아라 날아 태권브이'라는 주제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자리에 없었다. 레트로 가요제까지 열린다는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아쉬움이자 희망 사항이다.

날아라 날아 4050

어쩌면 그 만화 주제가 가사는 태권브이에만 날아오르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보니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어린 시절의 꿈과 추억만큼은 우리 마음속에서 다시 날려 보내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이날 무주에서 거대한 태권브이 앞에 모인 아이들과 부모들, 그리고 나 역시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을 것이다. 누군가는 처음 만난 태권브이를 바라봤고, 누군가는 아주 오래전 TV 앞에 앉아 있던 어린 시절 소년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역동적인 태권도 동작을 선보이는 태권브이 제28회 무주반딧불축제 현장에서 12m 높이의 거대한 태권브이 로봇이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느리지만 묵직하게 발차기와 태권도 동작을 연출하고 있다 최호림

요즘 TV를 켜면 4050 세대가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유머와 음악이 넘쳐난다. 세상은 참 빠르게 변했고, 우리가 익숙했던 문화는 어느새 오래된 기억이 되어버렸다. 그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주에서 다시 만난 태권브이는 단순한 거대한 로봇이 아니었다.

한 세대가 사랑했던 것을 다음 세대에게 억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함께 바라보고 함께 웃으며 자연스럽게 기억을 나누는 것. 어쩌면 그것이 문화가 세대를 이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무주반딧불축제#싸울아비#전주대학교#로보트태권V#최민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최호림 (cromwell) 내방

Every Life is News | 전) TBN 교통방송 & KTV 한국정책방송원 | 사상계(思想界) 객원기자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