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3일 토요일, 그동안 '반값여행'을 하며 경상도 인근을 지날 때마다 꼭 한 번 들르고 싶었던 경남 함양 서암정사를 찾았다. 아내와 내가 서암정사에 가고 싶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경주 불국사와 함께 떠올리는 석굴암처럼 이곳에도 석굴 법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을 타고 전라도를 지나 경상도 함양에 접어드니 신선한 가을바람이 먼저 맞아주었다. 그렇게 서암정사를 향해 차를 몰았다. 하지만 산길을 오르면서부터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산세가 꽤나 험했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우리 앞을 막아선 것은 경찰들이었다.

'어라? 절 입구에서 무슨 검문이지?'

창문을 내리자 경찰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순간 서암정사라는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아 얼떨결에 "관광하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찰은 주차를 안내하며, 넓은 주차장임에도 다른 차량을 위해 바짝 붙여 주차해 달라고 당부했다. 조금은 생소하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벽송사의 ‘무문관’ 완공 낙성법회가 열리던 지난 13일, 경찰과 스님들이 직접 교통 정리
▲벽송사의 ‘무문관’ 완공 낙성법회가 열리던 지난 13일, 경찰과 스님들이 직접 교통 정리 ⓒ 최호림

차를 세운 곳에서 우리가 가려던 목적지까지는 약 1km 이상을 더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그 길의 경사가 보통이 아니었다. 멀리 함양까지 왔건만 순간 '그냥 돌아갈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SUV 한 대가 다가오더니 차 안의 스님 두 분이 우리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AD
"같이 올라가시죠."

뜻밖의 호의에 감사하며 기꺼이 차에 올랐다. 차량은 4륜구동이었지만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일이 쉽지 않아 보였다. 엔진 소리가 거칠어지고 차량도 힘겹게 경사를 타고 올랐다. 그러자 보조석에 앉아 있던 스님이 운전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산세가 너무 가파른데, 4륜이라도 이게 버틸 수 있겠어요?"

운전하던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잖아도 정비를 한번 받아야 합니다."

가파른 산길에서 오가는 두 스님의 대화가 어쩐지 정겨웠다. 그렇게 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스님은 우리 부부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왔는지 친근하게 물으셨다. 낯선 여행객인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모습이 참 편안하게 느껴졌다.친절한 대화가 오가자 나 역시 궁금했던 점을 여쭈었다.

"스님, 원래 이곳은 자가용으로 올라올 수 없는 곳인가요?"

스님은 오늘 특별한 행사가 있어 통제 중이라며 웃으셨다.

"혹시 행사 있는 것 알고 오신 것 아니에요?"
"아닙니다, 저희는 그냥 관광객입니다."

아내와 나의 대답에 스님은 "참 운수 좋은 분들"이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이날은 조선시대 선불교의 종통을 잇는 지리산 천년고찰 함양 벽송사가 치열한 정진 공간인 '벽송선원 무문관'을 완공하고 낙성법회를 봉행하는 날이었다.

▲엉뚱하게 벽송사에 올라와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마주친 이 기묘하게 서로를 받쳐주고 서 있는 소나무, 벽송사를 지키며 오랜 세월 절의 성쇠를 함께해 온 수령 수백 년의 명목 최호림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차에서 내려 주변을 살피고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토록 보고 싶었던 석굴 법당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됐다. 우리가 가려던 서암정사와 지금 와 있는 벽송사는 엄연히 다른 절이었다. 서암정사에 가려다 엉뚱하게 벽송사까지 더 올라온 것이었다. 결국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야 했지만 가파른 경사길이 까마득했다. 그때 우리 모습을 지켜보던 한 경찰관이 다가왔다.

"서암정사 가시려는 거죠? 자원봉사자 차가 오니 그거 타고 내려가세요."

잠시 후 승합차 한 대가도착했고, 우리는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편안하게 차에 올랐다. 운전을 맡은 봉사자분은 입담이 좋아 이동하는 내내 분위기를 편하게 풀어주셨다.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궁금증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경찰관분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 계세요?"

질문을 받은 봉사자분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올해 나이가 69세라는 그는 '이런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주차 문제 때문에 평생 먹을 욕을 다 먹는다'며 속내를 털어놓았다. 절까지 차량을 타고 올라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를 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고, 심지어 봉사자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는 이들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혼란과 마찰을 막기 위해 경찰과 스님들이 직접 나와 차량을 통제하고, 걸어서 올라가기 어려운 방문객들을 자신의 차량에 태워 절까지 데려다주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큰 행사가 열린 날, 현장에서 교통 통제 및 주차 안내를 돕는 자원봉사자의 씁쓸한 하소연 최호림

그제야 그동안의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마음 한구석은 씁쓸해졌다. 좋은 마음으로 봉사에 나선 이들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는 모습이라니.

정성껏 준비한 종교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참가자들이 지켜야 할 수칙이 존재하고, 이것이 누군가에게는 일시적인 불편함을 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불편함을 이유로 현장의 봉사자들에게 화를 내고 폭언을 퍼붓는 것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다. 타인의 선의와 온정을 너무나 쉽게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의 씁쓸한 단면을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자원봉사자의 도움으로 우여곡절 끝에 서암정사에 도착했다. 봉사자는 베테랑 가이드 못지않게 사찰과 법당에 대한 생생한 설명을 곁들여 주었다. 덕분에 사전 지식을 품고 오랫동안 고대하던 석굴 법당을 마주하자, 함양의 이국적이고 독특한 매력이 한층 더 깊게 다가왔다.

인구 감소를 겪는 지역이라 알려져 있지만 이처럼 훌륭한 문화·관광 자원을 잘 활용한다면 조금 더 관광 친화적인 도시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마하대법왕', '조어삼천계'라는 한자가 새겨진 대형 석주를 지나 웅장한 암벽 길로 이어지는 함양 서암정사 입구 최호림

석굴 법당 내부는 영상 및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눈으로민 담고, 법당 외부에 붙은 설명문의 사진만 카메라에 남겼다. 때로는 사진보다 눈과 마음으로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랫동안 궁금했던 멋진 석굴 법당의 잔상보다 69세 자원봉사자의 말이 더 깊게 마음에 남았다.

어쩌면 우리는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고, 운전을 하고, 길을 안내하는 일은 결코 당연한 권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선의와 봉사를 마치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처럼 착각하곤 한다. 행사 현장에서 주차가 불편하고, 차를 원하는 곳까지 가져가지 못해 답답할 수는 있다. 물론 우리 부부도 그랬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 역시 처음에는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가 시간을 잘못 맞춰 온 것이었다. 이런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이라면 어느 정도의 불편은 감수하고, 오히려 행사를 위해 기꺼이 협조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모든 차량의 출입이 일률적으로 통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차량이 올라갈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었다. 꼭 필요한 사람에게는 예외를 두고, 나머지는 함께 불편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게다가 벽송사의 주차장이 수용 한계를 넘어서자, 혼잡을 막기 위해 스님들까지 직접 차를 끌고 아래로 내려와 방문객 수송에 힘을 보태고 있었다. 험한 산길을 마다치 않고 방문객의 편의를 돕는 이들의 노고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약간의 불편함을 이유로 봉사자와 종교인들에게 폭언을 내뱉는 모습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다.

그래도 부디 우리 사회가 누군가가 베푸는 온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각박한 곳만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 친절을 베풀면 "고맙습니다"라고 답하고, 봉사자를 만나면 "수고하십니다"라는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는 사회. 그 작은 말 한마디만으로도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서암정사 굴법당(굴법당 내부)은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안내판에 실린 사진을 찍었다
▲서암정사 굴법당(굴법당 내부)은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 안내판에 실린 사진을 찍었다 ⓒ 최호림

서암정사에 가려다 엉뚱하게 벽송사까지 올라갔던 하루. 돌이켜보면 그날의 작은 '길 잃음' 덕분에 오히려 더 많은 감사함을 배울 수 있었다. 이날 내가 본 가장 웅장한 풍경은 서암정사의 석굴 법당이었지만, 가슴속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이름 모를 이들이 보여준 따뜻한 선의와 부처님을 닮은 그 마음들이었다.

#함양여행#서암정사#벽송사#자원봉사#감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
최호림 (cromwell) 내방

Every Life is News | 전) TBN 교통방송 & KTV 한국정책방송원 | 사상계(思想界) 객원기자





독자의견0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