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면동 성당 신자들과 송동마을·식유촌 주민들이 만든 '서리풀2지구 아카이브' 홈페이지 ⓒ 서리풀 2지구 아카이브
서울 서초구 우면동의 송동마을과 식유촌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400년 넘게 대를 이어 살아온 주민들의 터전과 우면동 성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서리풀2지구 공공주택 개발에 포함되면서 존폐의 기로에 선 것이다. 주민들은 개발 자체를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전체 사업지의 일부에 해당하는 마을과 성당을 존치하는 '경계조정형·상생형 개발'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서울의 주택 문제는 절박하다. 청년과 서민을 위한 공공주택 공급 역시 중요한 공익이다. 그러나 이 사안을 보며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이미 누군가가 수백 년 동안 살아온 '집'을 반드시 없애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집은 건물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나고 자라고 이웃과 관계를 맺으며 기억을 쌓아온 삶의 터전이다. 이런 집은 돈으로 보상한다고 해서 그대로 옮겨갈 수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은 오래전부터 '지문(地文), landscript'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해 왔다. 지문은 단순한 지형이 아니다. 한 장소에 오랫동안 새겨진 자연의 결, 사람들의 발자국, 길과 기억, 생활방식과 공동체의 흔적이다. 건축은 백지 위에 새것을 마음대로 그리는 일이 아니라, 이미 땅에 쓰여 있는 문장을 먼저 읽고 그 위에 새로운 문장을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일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승효상이 자주 말하는 '터무니'도 이와 통한다. '터무니'란 본래 터의 무늬, 곧 땅이 오랫동안 품어온 결이나 흔적을 뜻한다. 그래서 '터무니없다'는 말은 단지 황당하다는 뜻을 넘어, 그 땅의 역사와 삶의 결을 무시한 채 맥락 없이 덧씌우는 상태를 떠올리게 한다. 개발 역시 터무니가 있어야 한다. 사람과 땅이 쌓아온 시간을 지우는 개발이 아니라, 그 터의 무늬를 읽고 삶의 결을 이어가는 개발이어야 한다.
그의 '빈자의 미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빈자의 미학은 가난을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크게 짓고 더 빠르게 소비하려는 욕망에서 한 걸음 물러나 비움과 절제, 관계와 공공성을 되찾자는 건축철학이다. 오늘의 도시는 끊임없이 채워지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이 머물고 만나고 쉬며 서로를 돌볼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들고 있다. 공간은 풍요로워졌지만 삶은 빈곤해지는 역설이다.
서리풀2지구와 노원 백사마을

▲철거 작업 진행 중인 백사마을지난 2025년 5월 15일 철거가 진행 중인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의 모습. ⓒ 연합뉴스
서리풀2지구를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서울 노원구의 백사마을이 떠오른다. 백사마을은 기존의 골목과 필지, 지형과 주민들의 생활방식을 가능한 한 존중하면서 주거환경을 개선해 보려 했던 중요한 도시재생 실험이었다. 그러나 여러 현실적 조건과 갈등 속에서 처음의 철학이 충분히 구현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 경험을 실패라고만 부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무엇을 놓쳤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려주는 귀중한 시행착오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개발을 이야기할 때 흔히 '보존이냐 개발이냐'라는 양자택일에 빠진다. 그러나 좋은 도시계획은 바로 그 사이에서 시작될 수 있다. 오래된 골목과 마을의 핵심을 살리면서 필요한 기반시설은 개선하고, 기존 주민이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하면서 새로운 주민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오래된 마을과 새 아파트 사이에 광장과 숲, 돌봄시설과 도서관 같은 공유공간을 배치해 서로를 연결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면동 성당 역시 개발의 장애물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를 잇는 거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기존 주민과 새로 입주하는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문화·돌봄·공동체 공간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모두 철거한 뒤 새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이미 무엇이 살아 있는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문을 읽고 터무니를 살피는 개발이다.
삶을 밀어내는 개발이 아니라 삶을 살리는 개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발하지 않는 도시가 아니라 다르게 개발하는 도시다. 주민과 행정, LH, 건축가와 도시계획가, 생태전문가가 함께 앉아 주택 공급량과 사업성뿐 아니라 기존 주민의 재정착, 공동체 보존, 생태환경, 문화적 기억까지 함께 고려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주민들이 제안한 '상생형 개발'은 바로 그런 새로운 감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백사마을에서 충분히 완성하지 못했던 실험을 서리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수는 없을까. 오래된 것을 모두 지우지 않고도 새로운 것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주택 공급과 공동체 보존이 반드시 서로 충돌하는 가치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말이다. 터무니없는 개발이 아니라 터무니 있는 개발, 삶을 밀어내는 개발이 아니라 삶을 살리는 개발. 먼저 땅의 지문을 읽고, 그 위에 다음 문장을 함께 써 내려가는 그런 새로운 개발의 모델이 서리풀2지구에서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