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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취헌 박은 묘소(처인구 양지읍 식금리 산6-1번지) ⓒ 용인시민신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읍 식금리 마을회관 인근에 조선 최고의 요절 시인으로 꼽히는 읍취헌(挹翠軒) 박은(朴誾, 1479~1504)을 기리는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정작 그의 묘소로 가는 길에는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전혀 없어, 주민의 도움 없이는 위치를 찾기 어려운 상태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손꼽히는 문장가의 유적치고는 관리와 홍보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식금리 마을회관 근처에는 '읍취헌 박은'이 새겨진 시비가 서 있다. 국문학자 홍순석 교수가 그의 한시를 우리말로 옮겨 새긴 것으로, "봄날은 흐려 비 올 듯 말 듯, 새들은 서로 지저귀며, 노수를 홀로 어루만지네"로 시작해 "만사가 견딜 수 없어 한바탕 웃음거리로 붙이나니, 청산은 오직 세상의 먼지만 지켜볼 뿐이라네"로 이어지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읍취헌 박은관련 연구서적 ⓒ 용인시민신문
화려한 수식 없이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시구는 후대의 왕과 문사들이 그를 "조선 제일의 시인"이라 불렀던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시비 뒷면에는 그의 생애와 인품을 소개하는 긴 비문이 함께 새겨져 있고, 받침돌에는 건립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이 촘촘히 나열돼 있다.
열다섯에 문장 이루고, 스무 살에 파직당하다
박은은 성종 10년인 1479년 한성부판관을 지낸 박담손과 제용감직장 이이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명문가 자제로 어려서부터 글솜씨가 남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문헌은 그가 글뿐 아니라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해 문무를 겸비한 인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열다섯 무렵 이미 학문과 문장에 막힘이 없었다는 기록도 그의 비범함을 뒷받침한다.
관직 진출 역시 남달리 빨랐다. 연산군 원년인 1495년 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식년문과 병과에 급제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섰다.
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사가독서의 특전을 받았으며, 승문원 권지를 거쳐 홍문관 수찬과 경연관을 지내며 임금 곁에서 경전을 강론할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다. 당대 최고의 대제학이었던 신용개가 그를 사위로 맞았다는 사실은 그의 인품과 재능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의 곧은 성품은 권력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무오사화 무렵인 1498년, 스무 살의 젊은 관료였던 박은은 권신 유자광의 간사함과 이에 아첨하던 정승 성준의 행태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시비를 가려야 할 언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다한 것이었으나, 현실에서는 정의보다 권력이 강했다. 그는 도리어 모함과 보복을 당해 파직됐다. 이 사건은 훗날 그에게 닥칠 더 큰 비극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짧은 생애, 깊고 긴 울림을 남기다

▲읍취헌 시비(양지읍 식금리) ⓒ 용인시민신문
파직 이후에도 그의 문학적 성취는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박은은 절친했던 이행, 그리고 홍언충·정희량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혀 '시가사걸(詩家四傑)'이라 불렸다. 이들은 송나라 강서시파의 시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조선 고유의 정서를 녹여낸 해동강서파의 중심 인물로 평가받는다.
박은의 창작 활동은 1495년부터 아내 신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인 1503년까지, 채 10년이 되지 않는 짧은 시기에 집중돼 있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화려한 수사보다 인간이 마주하는 근원적 고뇌를 담고 있어 조선 한시사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정치적 좌절과 가까운 이들의 잇단 죽음 속에서 그는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했다. 하지만 허무주의에 주저앉지 않고 현실의 고뇌로부터 벗어나 정신적 자유를 찾으려는 치열한 극복의 태도를 시 전편에 담아냈다는 평가다.
그의 시문은 후대에 <전마잠두록> <전마록> <잠두전후록> 등으로 엮였고, 벗 이행이 유고를 모아 펴낸 <읍취헌유고> 덕분에 오늘날에도 그의 문학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문인들은 <연려실기술> <대동시선> 등에서 그를 조선 500년을 통틀어 손꼽히는 한시인으로 기록했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 조정은 그를 지제교에 다시 불렀으나 이미 혼탁해진 관직에 나아갈 뜻이 그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해 연산군 생모의 폐비 사건을 계기로 갑자사화의 광풍이 조정을 휩쓸었다. 올곧은 소리를 내던 선비들은 이 뒤틀린 권력 앞에서 살아남지 못했고, 박은 역시 이 화에 연루돼 동래로 유배됐다가 끝내 스물여섯 꽃다운 나이에 처형됐다.
훗날 문예를 지극히 사랑한 정조는 옛 문집을 살피다 박은의 시를 접하고 깊이 감동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재전서>에는 정조가 그의 문재를 아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치적 희생으로 스러진 젊은 문인의 이름이 300년 가까운 세월을 건너뛰어 군주의 붓끝에서 다시 불려 나온 셈이다.
이정표 하나 없는 묘소

▲읍취헌 유고 어제본 ⓒ 용인시민신문
시비를 확인한 뒤 마을 주민의 안내를 받아 묘소를 직접 찾았다. 마을 어디에도 안내판이나 이정표가 없어, 주민의 도움 없이는 산자락 아래 자리한 묘역을 찾기 어려운 상태였다.
묘역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유명조선국화취헌박선생지묘'라 새긴 묘비와 정경부인 고령신씨를 부좌한 표석, 후대에 세운 신도비가 나란히 자리해 있었다.
문인석은 오랜 세월 이끼로 뒤덮여 이목구비가 뭉개진 상태였고, 신도비에는 수백 자의 한문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 글자들을 보며 권력에는 무릎 꿇지 않았으나 역사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혀 가는 한 문인의 처지가 겹쳐 보였다.
남겨진 과제
박은의 삶은 짧았지만, 그가 남긴 물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불의 앞에서 굽히지 않았던 청년 관료의 기개, 정치적 좌절과 개인적 슬픔을 문학적 승화로 이끌어낸 예술적 태도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도 무거운 화두를 던진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정신적 빈곤과 맹목적인 권력 추종이 여전한 오늘, 눈앞의 이익보다 올바른 가치를 좇았던 스물여섯 청년의 삶이 하나의 귀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고, 별도의 문화재 지정 없이 후손들의 손길로만 관리돼 온 탓에 묘역까지 이어지는 진입로에는 차량이나 도보로 접근할 수 있는 표지판조차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다.
용인에는 이미 많은 문화유산이 있지만, 읍취헌 박은처럼 아직 조명받지 못한 인물이 얼마나 더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우려가 있다. 또 갑자사화의 비극과 지식인의 책무, 그리고 문학이 정치보다 오래간다는 사실을 청소년들에게 전할 교육의 현장으로 식금리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제언도 나온다.
스물여섯 청년의 붓은 500년 전에 멈추었지만, 그가 남긴 시 한 구절은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지자체와 문화 당국이 나서 최소한의 안내 표지 설치만이라도 서둘러 잊혀 가는 문인의 자취를 후손들에게 올바른 정신적 귀감으로 남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역사회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해당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용인문화원 역사문화해설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