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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김장모습(매년 김장은 축제다)팔순엄마는 김장을 우리집 축제라고 한다. 자식들이 다 내려와 김장을 하고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속 꽃이 너무 좋단다. 팔순엄마가 좋으면 우리 모두 행복하다. ⓒ 김희
'처서가 지나면 모기 입도 비뚤어진다' 계절은 속일 수가 없나 보다. 아침, 저녁으로 다음 계절이 코앞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한 계절이 가고 다음 계절이 올라치면, 이번 계절에 해야 할 일은 뭐가 있나 하고 달력을 넘겨보게 된다. 두세 장 넘기면서 번뜩이는 행사는 바로 김장이다. '그래, 올해가 가기 전에 축제가 남았구나' 우리 집은 아직 집에서 김장한다.
바닷물을 퍼와 배추를 절이고, 절인 배추를 하루가 지나 서너 차례 씻어 물기를 빼고, 식자재를 다듬어 양념을 만들어 속을 버무리고, 모여앉아 김장을 하고, 오 남매와 엄마집 거기에 통 크게 사돈댁까지 일렬로 줄 서 있는 김치통에 담는 큰 행사다. '김장은 축제야. 너무 신나' 엄마는 일년을 준비하는 김장을 축제라며 팔순의 나이에도 집에서 하는 김장을 고집한다.
그 김장을 위해 열흘 전(31일) 배추 모종을 심고, 무씨를 뿌렸다. 사실 지난해, 배추에 농약을 치지 않고 키워 가족들에게 '올해 김장은 우리 밭에서 나온 친환경 배추로 하겠다'라고 큰소리쳤었다. 밭농사 작물의 대부분이 가족들의 먹거리이기 때문에 농약을 최소한으로 치고 농사를 짓는다. 하지만 농사는 포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배추 농사를 시작했더니 벌레들이 어디서 알고 왔는지 결국 배추를 거의 건지지 못했다. 정성껏 키우기만 했지, 남은 배추가 없는 벌레들의 잔치로 끝난 허무한 경험이 있다. 결국 지난해에는 배추 농사가 망해 배추를 사서 김장을 했다.
배추 모종을 심으며 남편에게 '여보, 잘할 수 있지? 올해는 성공해야 해'라고 당부했다. 모종을 심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배추를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는지 각종 검색 자료를 공유하면서 공부했다. 작년 쓰린 경험을 거울삼아 올해는 일주일 간격으로 방제해야 한다는 것도, 속이 차오르는 결구(배추 맨 안쪽의 속이 말리는 것) 시기가 되면 벌레들이 안으로 숨어서 속에서부터 썩는다는 것도 학습을 철저히 했다. 보이지 않는 벌레와의 싸움, '니들이 이길지, 우리가 이길지 한번 해보자' 계절이 바뀌며 밭에서 벌레들과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지난해 이 계절에 내가 무얼 하고 있었는지 떠올랐다.
잊을 만하면 생각나는 지나간 일들….

▲배추모종8월 31일 배추모종을 심었다. ⓒ 김희
지난해 가을, 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35년 몸담았던 직장에서 퇴직 시기를 고민하며 무거운 돌덩이를 양어깨에 지고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부서의 책임자로 내가 한 결정으로 앞으로 가지고 올 산적한 일들에 치여 늘 긴장해야 했고, 그로 인해 직원들이 감당해야 할 일들에 대한 염려로 밤잠을 설치곤 했다. 거리를 걸으며 바뀌는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만큼 온 정신을 사무실에 두고 다니곤 했다. 지금 내가 밭에서 배추벌레와 씨름하는 이 계절과 지난해 사무실 책상 앞에서 무겁게 버티던 계절은 같은 계절이다. 그러나 내 삶이 느끼는 온도는 너무나 다르다.
퇴직 하고 어느덧 네 번째 계절인 가을이다. 오랜 직장 생활을 뒤로 하고 후련함을 넘어선 평온함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퇴직 전에는 알지 못했다. 알람이 필요하지 않은 아침 시간, 빗발치던 업무 연락 대신 조용한 핸드폰, 늘 긴장하던 몸과 마음에서 기운을 빼기까지,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고 허전했던 그 공허함을 이제는 평온함으로 채워 넣는 중이다. 내게 가을은 늘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습관의 계절이다.지난 일들을 되뇌며 '그때 그 선택이 최선이었을까?''그게 맞는 걸까?''그때 왜 그랬을까? '해묵은 기억과 후회가 발에 걸리는 낙엽처럼 걸리고 거르고 했다.
퇴직이라는 인생의 큰 관문을 넘어선 올해 가을은 그 습관이 좀 더 깊어질 것만 같다. 지나간 직장 생활, 그 안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과 헤어짐,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평온함까지, 지난날들의 흔적을 밭에 심어놓은 배추 모종에 겹쳐보는 가을의 문턱이다.
한 계절이 또 이렇게 바뀌고 있다. 무거웠지만 늘 자랑스러웠던 직함은 내려놓았지만, 쑥쑥 자라는 배추를 돌보며 나 또한 퇴직 이후의 삶이라는 새로운 계절을 단단하고 튼튼하게 키워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12월 첫 주, 내가 키운 배추로 김장할 때쯤이면 나의 첫 퇴직 가을도 지금보다는 좀 더 여물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그동안 수고한 나를 다정하게 토닥인다. 그리고 다시 배추밭에 시선을 멈추어, 알토란같은 배추 수확을 기대해본다.

▲모종을 심은지 열흘 뒤 잘자라고 있는 배추열흘이 지났다. 철저하게 방제하고 매일매일 지켜보고 있다. 잘키워야한다..ㅎㅎ ⓒ 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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