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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책 한 권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독서에 안성맞춤인 멀쩡한 장소를 놔두고 왜 하필? 휴대전화, 노트북 등 정신 산란하게 만드는 요소가 없는 유일한 곳 아닌가. 고요함만 존재할 뿐, 거추장스러운 게 없으니 집중하기에 딱 좋다. 아마 겪어본 이들은 내 마음을 잘 알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를 짚고 있는데 어디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릴 정도로 미세한 소리였다. '똑' 하는 소리가 난 뒤 한참 만에야 다시 '똑' 하는 소리로 이어졌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분명한 것 같은데 간격이 아주 길었다. 샤워기를 쳐다봐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수도꼭지를 한번 꽉 잠그고 다시 책을 폈다. 여전히 물방울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책을 덮고 소리의 주범을 찾기 시작했다. 벽에 붙은 샤워기 수전을 꼼꼼히 들여다봐도 이상한 부분이 없었다. 수도꼭지를 들었다 놨다 점검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급기야 머리를 거꾸로 하고 나서야 샤워기 수전 밑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했다. 나사 이음새에 아주 작은 물방울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하마터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뻔할 정도로 아주 작았다.
주범을 찾았으니 이제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문제였다. 책상 앞에서 뭔가 하고 있는 남편을 불렀다.
"어떡하지? 수도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데."
태생이 문과 출신인 우리 남편은 사대부 가문 선비처럼 살아온 사람이다. 지금까지 전등 한 번 직접 갈아본 적 없는 철저한 '선비 스타일'이다. 며칠 전 거실 LED 등을 교체할 때도 어김없이 전문가를 정중하게 모셨다. 전등 값에 출장비까지 꽤 많은 돈을 지출했다. 이런 일은 공대 출신들이나 가능한 일로 여기는 남편이 답답하기도 하지만 문과생인 나도 같은 처지라 난 체할 수가 없다.
전기야 흐릿한 채로 버틸 수 있다지만, 수도는 급한 상황이었다. 이번에는 전등 교체보다 더 큰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히 또 업체를 불러야 할 참이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소모품 하나를 교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수전을 통째로 바꾼다면 자재비에 출장비까지 만만치 않은 돈이 깨질 터였다.
이번 만큼은 남편이 '공대 출신'인 척 시도라도 해주기를 은근히 바랐다. 하지만 역시 남편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휴대전화부터 냉큼 집어 들었다. 나는 나직하게 "어쩌면 우리도 고칠 수 있을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내 말을 듣고도 못 들은 체하는지 남편은 업체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때 다급하게 남편 손을 붙들었다.
"공대생이 하는 거라면 우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쐐기 박는 소리에 잠시 멈칫한 틈을 타 나는 얼른 공구함부터 뒤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스패너를 남편 손에 쥐어 주고는 큰소리로 격려했다. "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
이사할 때 리모델링하고 들어온 지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내 눈에는 수전 연결 부분의 고무 바킹이 헐거워졌거나 닳았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남편의 난처해 하는 기색을 보자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업체를 부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 기회에 공대 출신만 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신감을 찾는 계기로 만들고 싶었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앞으로 닥쳐올 크고 작은 일에도 두려움 없이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얼른 관리실로 달려가 커다란 전문 스패너를 빌려왔다. 나사는 생각보다 쉽게 풀렸고, 예상대로 고무 바킹이 닳고 닳아 완전 삭아 있었다. 급히 철물점으로 달려간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무바킹만 따로 안 팔고 샤워기 수전 전체를 다 사야 한대."
5만 원에 사온 샤워기 수전 부품을 죄다 늘어놓고 보니 참 단순해 보였다. 미리 겁부터 먹은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우리는 주먹을 서로 맞대고 "할 수 있다"는 구호를 외치며 일에 착수했다.
나는 보조 기사 노릇을 자처하며 밖의 수도 계량기부터 잠갔고, 남편은 본격적인 교체 작업에 들어갔다. 몇 번인가 뚝딱 소리가 나더니 잠시 후, 남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얼굴 가득 만족감이 뚝뚝 떨어졌다. 남들이 보면 아예 목욕탕을 통째로 수리하고 난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해보니 별 것 아니네' 하는 자만감도 함께 보였다.
결혼 생활 수십 년, '문과생 선비'로 살아온 남편이 화장실 샤워기 수전을 교체하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다. 공대 출신들만 하는 줄 알았던 집 수리를 문과생 남편도 이룩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남편이 교체한 샤워기 수전공대 출신만 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수저 교체를 문과 출신 남편도 성공했다. 기존에 있던 묵직한 수전보다 가볍게 보였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양쪽 균형이 약간 맞지 않아서 눈에 거슬렸지만 이것도 그냥 넘어갔다. 이번에는 교체를 성공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목청 높여 칭찬하자고. ⓒ 윤태정
성공의 단맛을 본 남편은 이제 뭐든지 다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소소한 해프닝이지만, 이 사소한 도전이 우리 부부에게 남긴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왜 세상은 공대와 문과로 나눠서 굳이 고정관념을 키우는 걸까.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안 해봐서 못할 뿐이다. 앞으로 두려움 따위가 어디 감히 남편의 자신감 앞에서 맥을 칠 수가 있으려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남편이 다음에는 또 어떤 새로운 도전에 나설지 기대가 된다. 요즘 들어 부쩍 책을 들고 있는 남편을 보며 조용히 상상해본다.
"나도 글쓰기에 도전하겠다."
이렇게 선언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날이야말로 진짜 우리 집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날로 기록될 것이다.
독서에 집중하려다 우연히 물 새는 걸 발견하다니. 가래로 막을 일을 호미로 막았다는 생각에 뿌듯하다. 어떤 방식이든 정신을 하나로 모으려는 시도는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