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땅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인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아이, 그 아이를 불안정한 체류자격으로 키우고 있는 외국인 엄마. ‘이상한 나라의 문완나’ 이야기입니다.

▲한국 남성이 필리핀에서 현지 여성의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코피노’ 문제와 한국 남성이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과 혼외 관계로 아이를 낳고 떠나는 ‘한국판 코피노(K-코피노)’ 문제를 AI 이미지로 구현한 것. ⓒ AI 생성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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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아들 다 크면 떠나야 하는 엄마, 이상한 나라 한국이 미뤄온 숙제'에서 계속 https://omn.kr/2jnau)
문완나씨가 한국에서 겪은 어떤 현실은
필리핀의 어느 과거와 닮아 있었다.
1990년대 필리핀에선 한국 남성이 현지 여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고 도망치는 일이 숱했다.
무책임한 한국인 아빠와 현지에 남은 필리핀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혼혈아는 '코피노(한국계 필리핀인)'라고 불렸다. '코리안(한국인)'과 '필리피노(필리핀인)'를 결합한 이 단어를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최대 5만 명까지 추산되지만, 이들에 대한 양국 차원의 실태조사는 없다.
2026년 한국에도 코피노와 유사한 아이들이 산다. 한국 남성이 한국에 온 외국인 여성과 혼외 관계로 아이를 낳고 떠나는 일이 반복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출생등록과 국적취득은 물론 복지제도에서도 제외된다. 이른바 '한국판 코피노', 그 대표적 사례가 <오마이뉴스> 연재 '이상한 나라의 문완나' 주인공 완나씨의 아들 다니엘이다.
'한국판 코피노' 개념을 처음 제시한 건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이다. 그는 완나씨 사례를 두고 "한국 남성이 이주여성에게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제재 받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국가가 준 결과"라고 진단했다. 이 문제를 공론화하려면 우선 이해를 도울 언어가 필요했고, 한국판 코피노는 그렇게 탄생한 개념이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낙태를 강요하고, 아이가 태어난 후엔 아버지로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문제가 한국판 코피노의 핵심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났는데 등록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존재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다? 이건 코피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죠. 한국 사회에서 누가 배제되고 있는지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이들만큼 취약한 자들이 또 있을까요?"
캄보디아 비혼 이주여성 완나씨는 결혼을 약속했던 한국 남자에게 이별을 강요 당한 뒤, 홀로 다니엘을 낳고 키우며 수많은 제도적 문턱과 마주했다. 다니엘이 태어나고 '한국인 자격'을 얻기 위한 인지·출생·친권신고, 국적취득, 주민번호 부여까지 2년이 걸렸다. <오마이뉴스>는 완나씨가 사회보험 일부를 못 받는 등 불안정한 체류자격을 개선하기 위해 국회의원을 만나는 일정에 동행하며 '이상한 나라의 문완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지난달 12일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허민숙 조사관을 만난 것도 그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허 조사관으로부터 한국판 코피노에 대한 문제의식, 완나씨가 한국에서 겪은 제도적 문턱을 낮출 입법적 해법을 들었다.
한계 분명한 법무부 대책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이 지난 8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입법조사처 회의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출산한 외국인 여성이 법률혼에 이르지 못해 겪는 출생등록, 복지 지원, 체류 자격 등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완나씨 같은 분들은 아메리칸드림처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한국에 오는 것이지, 앞으로의 인생이 가시밭길이라거나 고초와 수난을 겪을 거라고 예상하진 않잖아요. 분명 본인만의 계획과 꿈을 갖고 한국에 왔을 텐데,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인생 경로가 펼쳐진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 분들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국가가 어떻게 받아 안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하는 거죠."
허민숙 조사관은 완나씨 사례를 들며 "한국 남성과 혼외 관계로 자녀를 출산한 외국인 여성의 경우
법률혼이 아닌 탓에 출생등록·국적취득·체류자격 등 다양한 제도적 지원에서 배제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친부의 비협조로 F-6-2(자녀양육) 비자를 받지 못할 경우 허용되는
체류자격은 F-1(방문동거)인데, 원칙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해 안정적으로 자녀를 양육하기에 매우 불리하다"고 설명했다.
완나씨는 F-1 중에서도 취업·사회보험이 제한적인 F-1-1(방문동거)을 받고 있다. 완나씨 같은 외국인의 "안정적 체류와 자녀 양육을 지원"하기 위해
법무부는 올해 초부터 F-1-4(국민인 혼외자 양육) 체류자격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허 조사관은 문제를 제기했다.
한계가 분명한 구제책이라는 것이다.
"F-1-4를 받으면 '(체류자격 외 활동허가로) 모든 분야의 취업이 가능하다'는 게 법무부 얘기인데, 이건 법률에 명시된 게 아니라 행정부 지침이에요. 출입국관리법 등에 명시돼야 단단한 법적 근거가 있는 건데, 그냥 고시 수준인 거죠. 그러다 보니 실무자들도 모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F-1-4라는 체류자격을 임시로 만들어 취업은 허가해 주겠다? 여전히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이 안 된다는 문제가 있는데, 사각지대에 방치하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거죠."
무엇이 한국 위한 일인가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이 지난 8월 1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도서관 입법조사처 회의실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한국 남성과의 사이에서 자녀를 출산한 외국인 여성이 법률혼에 이르지 못해 겪는 출생등록, 복지 지원, 체류 자격 등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유성호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허 조사관은 '국민의 양육자' 개념 도입을 제안했다. 현재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국민의 배우자(F-6 결혼이민)' 체류자격이 있다면, 완나씨처럼
한국 국적 혼외 자녀를 양육하는 외국인에게도 혼인 여부와 무관하게 '국민의 배우자'처럼 취업·사회보험 등을 보장하는 별도 체류자격을 신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현행 체류자격 제도엔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외국인 여성만 대우해 주겠다는 어떤 신념이 녹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가령 완나씨처럼 한국인 아이를 키우는데 국민연금·고용보험 대상이 아니라면, 진정한 양육자의 지위가 부여됐다고 볼 수 없잖아요. 자국민과 같은 지위가 주어지는 '국민의 배우자'처럼, 완나씨 같은 외국인도 '국민의 양육자'로서 국민의 배우자와 유사한 수준의 복지서비스를 누릴 수 있어야죠."
한편 국회의 움직임은 더디다.
한국에서 태어난 외국인 아동의 출생등록을 보장하는 법안은 현재 국회에 발의됐으나 계류 중이다. 영유아복지 3법(영유아보육법·유아교육법·아동수당법)도 한국 국적 보유 아동만을 지원 대상으로 하다 보니, 국적취득 단계의 아동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사실 정치인들이 이 사안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국회의원 입장에선 전국적 지명도를 얻고 당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법을 내고 싶지 않겠어요? 한국판 코피노 같은 얘길 하면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도 먹고살기 힘든데 왜 외국인 도와주느라 난리냐', '세금 아깝다'고 항의 받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러다 보니 누가 총대를 메고 가기도 어렵고, 국회에서 이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는 거죠."
허 조사관은 그렇기에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를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언제까지 혼인 여부만을 이유로 비혼 이주여성과 그 자녀를 경계 밖에 방치해 둘 것인지, 이들을 경계 밖에 방치하는 것과 경계 안으로 들이는 것 중 무엇이 정말 한국을 위하는 일인지, 그가 던지는 질문이었다.
"한국판 코피노를 방치할 때 생기는 비용과 이들을 등록시켜 보살필 때 드는 예방 비용을 따져보면, 후자가 사실 사회적 비용을 더 줄이는 일이거든요. 이 아이들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에서 자랄 거고, 한국에서 세금 내며 살아갈 사회 구성원이잖아요. 그리고 이 아이들을 한국인으로 잘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가진 외국인 엄마를 돕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이젠 국가가 나서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들을 돌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