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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봄부터 오도이촌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금요일 퇴근 후, 주말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시골 쉼터 '느루뜰'로 향합니다. 이 글은 시골 쉼터에서 '사는 이야기'입니다.
"어머나, 세상에!"
퇴근 후 우리 집 현관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가에 미소 주름이 잡히고 입꼬리는 벌써 끝까지 올라갔다. 하얀색 커다란 비닐 가방 밖으로 연분홍, 꽃분홍, 살굿빛 얼굴이 천진하게 웃고 있었다. 제 집을 떠나온 것을 알기나 할까. 호기심 가득한 낯빛으로 두런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꽃들을 얼른 집 안으로 들였다.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 아이들이 우리 집에 온 첫 모습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서.
'부드러운 애정' 같은 꽃 선물
"예쁘기도 해라. 색깔이 어쩜 이리도 고울까."
꽃이란 사람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조그맣고 앙증맞은 생명이 이토록 사람 마음을 환하게 한다.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 집 현관 앞에 곱게 놓여 있던 꽃 선물 ⓒ 이정미
지난 목요일(3일) 저녁이었다. 원예 전문가인 지인이 우리 집 현관에 꽃 선물을 한 보따리 갖다 놓았다. "해가 좋으면 연중 개화"라는 문자와 함께. 꽃이 귀한 가을, 겨울에도 꽃을 보며 더 행복하란다.
꽃보다 언니의 마음이 더 고마워서 나는 또 금세 마음이 따뜻해졌다. 금요일 퇴근 후에 느루뜰에 가는 줄 아는 언니는 일부러 목요일 저녁 무렵에 몰래 방문했다. 저녁 시간에 방해될까 현관 앞에 살짝 두고 갔다.
삶의 기쁨은 이런 사소한 것들 안에 있다. 동료가 건네는 따뜻한 커피 한 잔에, 새 이가 났다고 입안을 보여주며 재잘거리는 아이의 목소리 안에, 더위가 밀려간 파란 하늘과 상쾌하게 방문하는 바람결 한 점에, 그리고 무심한 다정같이 살며시 건네는 배려 안에서 송송송 솟아난다. 이런 소소한 조각들이 일상을 잔잔한 행복으로 채운다고 믿는다.
이 아이들을 하룻밤 잘 재우고, 금요일(4일) 느루뜰로 데려왔다. 평소 같으면 저녁을 먹은 후 천천히 출발하지만 꽃들을 옮겨 심기 위해 서둘렀다. 머릿속으로는 이 아이들을 위한, 해가 너무 강하지 않은 땅을 계산해 두었다. 쉼터와 감나무가 번갈아 가며 그늘을 만들기도 하는 곳이다.
해가 뉘엿 눕는 시간에 느루뜰에 도착했다. 언제 폭염이었냐는 듯 바람이 시원했다. 지난 비로 풀들도 많이 자랐다. 어두워지기 전에 꽃들을 옮겨 심어야 했다. 남편과 나는 꽃들을 앉힐 땅에 웃자란 풀을 뽑고 돌을 골라냈다. 뿌리가 잘 내릴 수 있도록 덩이진 흙을 손바닥으로 잘게 부수었다. 자라면서 더 번질 것을 고려하며 적당한 간격을 두고 옮겨 심었다. 물도 듬뿍 뿌려 주었다.
가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을 땐 한가득 해 보였는데 밭에 옮겨 심고 나니 듬성듬성 비어 뭔가 허전한 느낌이었다. 꽃들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다. 아무쪼록 새 땅에 익숙해져서 자기 모습대로 쑥쑥 자라, 본래 제 집인 양 편안하게 밭 한 모퉁이를 차지했으면 좋겠다.
꽃 이름 이야기
발코니에 앉아 꽃들을 내려다 보았다. 원예 전문가 언니가 보내준 카카오톡 문자 생각이 났다. 언니의 문자 안에는 꽃들의 사진과 이름이 친절하게 적혀 있었다. 사진과 실물을 선긋기하며 이름을 불러 보았다. 내 밭에 와서 내 식구가 되고 보니 꽃들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졌다.

▲(위) 분홍안개꽃, (아래) 겹장미봉선화 ⓒ 이정미
조그만 팝콘 같은 꽃은 '분홍안개꽃'이다. 안개꽃 종류인데 분홍빛이 돌아서 붙여진 이름인 것 같았다. 안개꽃 키가 이처럼 낮은 줄 몰랐다. 기는 줄기처럼 땅에 붙어 자란다. 흔히 꽃집에서 보았던 안개꽃처럼 줄기가 가늘게 위로 자랄지 두고봐야 할 것 같다.
'분홍안개꽃'은 사랑의 온기, 설렘, 부드러운 애정을 상징한단다. 작고 보들보들 꽃송이를 가만가만 바라보면 알 수 없는 설렘, 온기가 가늘게 마음 안으로 찾아드는 것 같다. '부드러운 애정'. 이 말이 참 좋다. 애정은 부드러울 때 서로에게 닿는다. 뒤틀린 애정은 상처를 남긴다. 나는 애정이라면, 이 작고 여린 꽃송이처럼 수수하고 조용하고 은은한 모양이 더 오래가고 아름답다고 여긴다. 느리더라도 충만하게 차올라 결국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며칠 전 이웃 아주머니와 아파트 화단에 핀 봉선화를 두고 "색이 참 곱다"며 맞장구쳤던 꽃이 '겹장미봉선화'였다. 색이 하도 고와서 '이런 색을 무슨 색이라고 해야 하지?' 생각했다. 분홍으로 퉁치기엔 모자란다. 그렇다고 연분홍이나 연지색이라고 하기에도 여전히 부족하다. 지금껏 생각한 것으로는 '고운 신부색' 정도다. (이런 색을 무슨 색이라고 하지요?)
장미처럼 꽃잎이 겹겹이 겹쳐 있어 여느 봉선화보다 화려하다. 겹꽃은 수술의 자리를 꽃잎으로 변형시킨 형태라고 한다. 꽃은 화려하지만 씨앗을 맺는 힘은 줄어든다고 하니,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인가 보다.

▲자금성(세시초) (위), 안젤로니아(아래) 모습 ⓒ 이정미
'자금성'도 처음 본다. 긴 줄기 끝에 꽃이 하늘하늘 달려 있다. 자세히 보면 작은 꽃잎 속에 암술과 수술이 빼곡하게 차 있다. 붉고 자줏빛이 도는 열매와 꽃의 색감이 중국의 궁궐인 자금성처럼 화려하고 고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꽃 이름을 볼 때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가 잦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모양을 두고 엄청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는 '자금성'을 떠올리다니.
언니의 문자에는 "사가에서는 세시초, 3시에 핀다고" 라고 했다. 나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재미있고 쉽고 꽃의 특징을 잘 포착했다. 더 찾아보니, 오후 세 시 전후로 꽃잎을 활짝 열고 저녁이 되면 다물기 때문에 '세시화'라고도 한단다. 아침에 일어나서 살펴보니 꽃잎을 꼭꼭 다물고 있었다. 마치 작은 '자수정' 같았다. 바짝 다가가야 꽃모양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꽃분홍빛 별처럼 핀 듯 안 핀 듯 조용히 말을 거는 것 같다.
'안젤로니아'는 지난 7월 중순에 원예전문가 언니가 우리 농막 마을에 놀러 왔을 때 가져왔다. 낮달맞이 옆에 옮겨 심었었다. 그 후로 폭염이 계속되어 제대로 뿌리를 내릴지 걱정했다. 여름꽃답게 폭염에도 씩씩하게 잘 자라 요즘 보랏빛 꽃이 한창이다. 해가 좋으면 10월 말까지 꽃을 피운다니 서늘한 날 위로가 될 효자꽃이다.
자연의 풍경 속에서 우리 자신을 재발견하고 유쾌한 전율을 느낄 때가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분신(分身) 현상이다. 그런 느낌을 받는 사람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 <니체와 함께 산책을> 중에서
니체는 산책하며 자연과 합일하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씨앗을 뿌린 가을 채소는 아직 무소식이다. 아주 가는 당근 싹이 보일듯 말듯 고개를 내밀었다. 기다리는 동안 꽃들이 고마운 친구가 되어 주고 있다. 아니 '재발견', '유쾌한 전율', '아름다운 분신'이라고 했던 니체의 문장 언저리를 거닐게 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