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내데스크에서 무선헤드셋을 나눠주며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 이규승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
지난 3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 상영 시작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았지만 대형 스크린에서는 이날 상영될 작품과 앞으로 이어질 프로그램의 예고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로니에공원을 지나던 사람들이 음악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중 어르신 두 명이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 안내데스크로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헤드셋과 팝콘을 나눠주던 직원이 잠시 후 이곳에서 뮤지컬 공연 실황을 무료로 상영한다고 설명하자 두 사람은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어르신들이 자리를 잡은 뒤 비슷한 질문이 이어졌다. "그냥 앉아서 보면 되는 거예요?" 지나가다 예고 영상 앞에 멈춘 시민들이 하나둘 안내데스크로 다가왔고, 직원들은 공연 실황 상영회라는 설명과 함께 무선 헤드셋과 팝콘을 건넸다. 공연을 보기 위해 일부러 찾아온 사람과 저녁 산책을 하다 우연히 멈춘 사람이 그렇게 같은 객석에 섞이기 시작했다.
스크린 앞 초록색 인조잔디에는 빨간색과 회색 캠핑 의자 70석이 놓여 있었다. 의자 사이 작은 테이블에는 랜턴이 켜졌고, 머리 위로 이어진 전구들도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또렷해졌다. 오후 7시 30분이 가까워지자 준비된 70개의 캠핑 의자에는 빈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이게 뭐예요?"라고 묻던 시민들이 이제는 초록빛이 들어오는 헤드셋을 쓰고 같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오후 7시 30분, 창작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 시작됐다. 무대도 없고 눈앞에서 연기하는 배우도 없었지만 붉은 벽돌의 아르코예술극장과 대형 스크린, 캠핑의자에 빼곡하게 앉은 관객을 한눈에 보고 있으면 이곳 역시 하나의 극장이었다. 연인과 나란히 앉은 젊은 관객부터 중년 관객, 혼자 찾아온 시민까지 팝콘과 음료를 곁에 두고 캠핑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현장사진 ⓒ 이규승
여든 살 '가시나들', 대학로의 밤을 채우다
첫날 작품인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경북 칠곡에서 일흔, 여든이 넘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할머니들의 실제 삶에서 출발한다. 어린 시절 여러 이유로 글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쓰고, 마음속 이야기를 글로 옮기고, 시를 쓴다.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 담긴 이야기가 뮤지컬로 옮겨졌고, 실제 문해학교 할머니들이 쓴 20여 편의 시도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여든을 앞두거나 넘긴 사람들이 뒤늦게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이야기가 대학로의 대형 스크린을 채웠다.
이 작품의 매력은 할머니들의 삶을 그저 안쓰럽거나 감동적인 이야기로 바라보지 않는 데 있다. 나이가 들어도 사랑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오는 동안 그런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을 뿐이다. 화면 속 경상도 사투리와 유쾌한 대화에 웃다가도 어느 순간 그들이 지나온 긴 시간과, 늦게라도 자신만의 언어를 갖게 된 삶을 생각하게 된다.
야외에서 이 작품을 보는 경험은 공연장에서 직접 뮤지컬을 보는 것과는 분명 달랐다. 극장 안에서는 객석의 불이 꺼지면 무대와 배우에게 시선이 집중되지만 이곳에서는 스크린뿐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다른 관객의 얼굴과 그 뒤로 자리한 아르코예술극장, 머리 위 조명까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다. '공연 실황 상영'이라는 말보다 '도심 속 공연예술 피크닉'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세상에 나온 뒤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극본상·연출상을 받았다. 이미 공연계에서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창작뮤지컬이지만 이날 객석에는 작품을 처음 만난 사람도 적지 않아 보였다.
좋은 작품을 만드는 일과 좋은 작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무대에서 태어난 작품이 영상이 돼 다시 극장 밖으로 나오는 과정은 한 작품의 생명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라는 공연예술의 오래된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무엇보다 이날 눈여겨볼 대목은 '누가 이 객석에 앉았느냐'였다. 일반적인 공연이라면 관객이 작품을 검색하고 티켓을 구입한 뒤 정해진 시간에 극장을 찾아간다. 하지만 이날은 공연이 시민보다 먼저 밖으로 나와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화면을 발견하고 "이게 뭐예요?"라고 묻고, 헤드셋을 받아 캠핑의자에 앉는 순간 공연예술과 새로운 관객의 첫 만남이 시작됐다.

▲현장사진 ⓒ 이규승
"시식해봐야 선택할 수 있듯"… 극장 문턱 낮추기의 실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이 행사를 마련한 목적도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지난해 <예술극_장 시네마>는 2주 동안 진행됐고, 현장에서 나눠준 팝콘 수를 기준으로 약 600명의 관객이 찾은 것으로 집계됐다. 올해는 한 주 동안 세 차례로 기간이 줄었지만 지난해와 같은 600명 정도가 찾아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캠핑형 객석과 대형 스크린 등 기본적인 현장 구성도 지난해와 크게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공연을 직접 올리는 대신 '상영'이라는 방식을 선택했을까. 공연예술의 가장 큰 매력 가운데 하나는 배우와 관객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호흡하는 현장성이다. 주최 측 역시 아무리 잘 촬영한 공연 실황 영상이라도 공연장에서 느끼는 분위기와 출연진의 에너지, 생생한 감동까지 완벽하게 전달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관계자는 이를 일종의 '시식 코너'에 비유했다. 음식을 한번 맛봐야 자신의 취향인지 알 수 있듯 공연 역시 경험해봐야 다음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공연장이 낯선 사람에게 부담 없이 작품을 먼저 경험하게 하고, 그 경험이 극장과 공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취지다.
이날 현장에서는 그 말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오후 7시까지만 해도 앞마당을 지나며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라고 묻던 시민들이 30분 뒤에는 헤드셋을 쓰고 객석에 앉아 있었다. 공연예술의 새로운 관객을 만드는 출발점이 반드시 거창한 관객개발 프로그램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장사진 ⓒ 이규승
특히 공연이나 문화생활을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시민에게 별도의 비용이나 사전 예약 없이 작품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은 이 행사의 분명한 장점이다. 반대로 평소 공연장을 자주 찾는 관객에게도 가을밤 야외에서 캠핑의자에 몸을 기대고 헤드셋으로 공연을 듣는 경험은 익숙한 극장과는 다른 즐거움이다. 90분 가까운 공연을 모두 보지 않더라도 한 곡의 노래나 한 장면이 마음에 남을 수 있다. 그렇게 작품의 이름을 기억한 사람이 언젠가 실제 극장으로 향한다면 야외 상영은 새로운 관객과 공연 사이에 첫 번째 다리를 놓은 셈이 된다.
공공의 예술지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대목이 있다. 좋은 작품을 발굴하고 제작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만큼 이미 만들어진 작품이 몇 번의 공연으로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관객을 계속 만나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공연 예술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이 지나면 같은 작품을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은 장르다. 공연 실황 영상은 무대의 현장성을 완벽하게 옮길 수는 없지만 좋은 작품의 생명을 조금 더 연장하고 관객과 만나는 접점을 넓힐 수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머리 위 전구와 관객들이 쓴 헤드셋의 초록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붉은 벽돌의 아르코예술극장과 커다란 스크린, 70개의 캠핑 의자와 작은 랜턴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대학로 한복판에는 잠시 또 하나의 극장이 만들어졌다. 화면 속에서는 여든을 넘긴 할머니들이 늦은 나이에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있었다. 화면 밖에서는 누군가가 이날 처음 공연예술이라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공연장의 문턱을 낮춘다는 것은 단순히 입장료를 낮추거나 극장 문을 열어두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공연이 먼저 극장 밖으로 걸어 나와 시민이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9월 3일 대학로에서 "여기서 뭐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만남은 30분 뒤 빈자리 없는 야외 객석으로 이어졌다. <예술극_장(場) 시네마>는 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앞마당에서 계속된다.

▲관람하는 현장사진 ⓒ 이규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