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2027년도 예산안으로 820조 9000억원을 내놨다. 올해 본예산보다 93조 원, 12.8% 늘어난 역대 최대 규모다. 사진은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 등이 예산안을 설명하고 있다. ⓒ 기획예산처
오늘(2일) 아침 내년 예산 편성 뉴스를 보고 답답하고 참담한 심경에 이 글을 쓴다. 정부가 2027년도 총지출 예산을 올해보다 12.8% 증가한 820조 9000억 원이라는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했다고 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늘어난 세수를 바탕으로 162조 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을 만들고, 인공지능(AI)과 청년 지원에 집중적으로 투자한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나라의 정체성을 수호하는 국가유산 분야의 처지를 들여다보면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간판만 바꾼 '국가유산청'의 냉혹한 현실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문화·체육·관광 분야 전체 예산은 11조 6100억 원이다. 세부적으로 문화예술 분야에 5조 9372억 원, 체육에 1조 8333억 원, 관광에 1조 7580억 원이 투입된다. '관광 보국'을 외치며 김대중 대통령 시절 겨우 1조 원을 넘겼던 문체부 예산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문체부 소속인 국가유산청의 내년 예산은 1조 6645억 원에 불과하다. 820조 원이 넘는 국가 전체 예산의 고작 0.2% 수준이며, 500분의 1을 간신히 넘기는 턱없이 부족한 수치다. 과거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반짝 쏟아지던 관심을 제외하면, 문화 유산에 대한 정부의 예산 편성이 수십 년째 철저한 사각지대에 놓여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최근 문화재청이 '국가유산청'으로 새롭게 출범했다. 이는 단순한 간판 교체가 아니다. 과거 재화(財) 중심의 '문화재'라는 낡은 개념을 뛰어 넘어, 국제 기준에 맞춰 포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가유산(Heritage)' 관리 체계로 전면 전환한 것이다. 이제 국가유산청이 관리해야 할 유산은 10만 점을 훌쩍 넘고, 동산 유산까지 합하면 50만 점이 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의 범위와 그 철학적 무게는 폭발적으로 커졌는데, 이를 뒷받침할 예산은 왜 늘 제자리걸음인가.
현장의 현실은 더욱 냉혹하다. 그나마 국가 지정 유산은 국비 지원율이 70%라도 되지만, 시·도지정 유산은 지자체 사정에 따라 50% 수준에 머물며, 기초자치단체인 시·군 단위 유산은 아예 국비 지원조차 없다. 인구가 줄어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시대라지만, 우리가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문화유산은 오히려 늘어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토 곳곳에 방치된 유산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무분별한 공사 현장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유산이 매일같이 발생하고 있다.
어느 지역이든 그곳의 볼거리를 물으면 대다수가 지역의 문화유산을 꼽는다. 안동에서 고택이 모두 사라지고, 경주에서 왕릉이 사라진다면, 그곳의 정체성은 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지역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이야말로 그 지역을 설명하는 결정적 정체성이다.
무관심을 뚫고 지켜낸 낡은 한옥 한 채... 가장 확실한 '미래 투자'

▲문경새재와 교귀정문경새재 1관문에서 2관문 사이에 있는 경상도 관찰사 업무교대 장소인 교귀정이다. 저 공간에 교귀정과 소나무가 없다면 문경새재의 역사의 일부분은 그저 잊힌 과거일 뿐이다. ⓒ 엄원식
국가유산활용학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뼈저리게 느끼는 바가 있다. 문화유산은 고립되고 박제된 과거의 흔적이 아니다.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누려야 할 '복지 문화'이며, 제대로 관리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 비로소 그 수명이 오래가고 생명력을 얻는다.
하지만 정작 국가유산청조차 보존에 쫓겨 문화유산의 '활용'에는 여력이 없는 모습이다. 문화유산을 활용하여 닫혀 있던 공간을 열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일이야말로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올릴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투자라 할 수 있다.
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전국의 수많은 학예사들은 고통과 외로움을 묵묵히 견디며 문화유산을 지켜내고 있다. 돌이켜 보면 25년 전, 철거 위기에 처한 문경 '변동식 가옥'을 지키고자 무관심한 행정을 설득해 문화재로 지정 받았던 치열한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낡은 집 한 채에 스며든 지역의 역사와 혼을 지켜내는 사명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의 지방 박물관과 일선 지자체의 학예사들은 이처럼 이름 없는 유산 하나를 살려내려 묵묵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예산은 곧 그 나라의 우선순위이자 철학이다. 정부가 야심 차게 조성한다는 162조 원 규모의 '미래대응기금' 중 극히 일부만이라도 소멸해 가는 지역 문화유산의 보존과 적극적인 활용 그리고 이를 지키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쓴다면 그것이야말로 국가의 뿌리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미래 투자가 될 것이다.
예산을 편성하는 위정자들, 각 지자체 단체장들 그리고 대통령께서도 부디 이 글을 보았으면 좋겠다. 820조라는 화려한 숫자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예산의 짙은 그늘 속에서 비바람을 견디며 침묵하고 있는 우리 땅의 오래된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달라. 제발 나라 정체성의 근간인 국가유산을 홀대하지 말라. 그리고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그 근간을 수호하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결코 외면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