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에서 기획한 '시로 읽는 오늘'을 연재합니다. 시로 아침을 시작한다면, 수많은 갈등과 전쟁도 줄어들 것입니다. 독자들은 힘 있는 언어를 익혀 튼튼한 내면을 가꿀 수 있고, 다양한 시를 통해 새로운 시민의 감수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의 첨예한 문제를 시인의 예민한 감각으로 길어 올린 한국시를 매주 두 편씩 선정하여, 추천 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식물의 밤
- 이승희
피가 붉어지는 밤
발등을 문지르며
참 멀리도 왔다는 생각
목젖이 자라고 있다
커다란 식물이 사는 방에서
같이 잤다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난 밤이 쌓이면
등을 만지는 손가락이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해안이 조금씩 길어지는 이야기였나
멀어져서
걸어가야 할 곳이 더 많아진다는
식물들과
그런 대화를 한다
그냥 죽기로 작정한 식물들에게
책을 읽어준다
잠들지 마
우리의 독서는
목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어 부르는
또다른 망명지 같아서
날마다 허기로 가득한 기후가 되는 곳
그건 누군가
일생을 다해 만든 슬픔
아무 데도 가지 마
출처_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 2024
시인_ 이승희 : 199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가 있다.

▲커다란 식물이 밤의 등을 만진다. ⓒ 박유하 시인(디지털 포엠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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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 여름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긴 폭염을 잘 견뎌낸 것일까요. 저는 잎이 노랗게 변한 아프리카에서 온 작은 넝쿨 식물을 지켜보며 이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소노라에라고 불리는 이 식물은 죽어가는 연약한 존재들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줄기를 키워내고 있습니다. 걸어가야 할 곳이 더 많아진다는 것은 머무르지 못하는 자의 슬픔 때문일까요, 아니면 슬픔 가득한 망명지가 계속 늘어나서 일까요. 삶은 도착지도 없이 보이지 않는 힘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드는 잠처럼, 우리는 때때로 무력해집니다.
목젖이 자라고 다른 목소리가 생겼습니다. 우리의 몸은 침식되는 해안처럼 조금씩 닳고 있지만, 허기로 가득한 몸을 채우던 관(管)이 붉어지는 슬픔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겠지요. 이 이상한 연대기는 끝나지 않을 테니. 아무 일 없이 지난밤이 쌓이면 누군가의 등을 어루만지는 손가락이 되기를. 그러니 "아무 데도 가지 마"라고 하나의 목소리로 속삭여 봅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정미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