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여름은 무척 덥다. 불 앞에 서는 게 힘들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씨가 연속이었다. 간단하게 건너뛰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해도 어쩌랴.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는데 불 앞에서 여름을 다스리는 게 나의 소임인 것을.
선선한 가을바람을 기다리다가 문득 올여름 우리가 즐겨 먹은 음식은 뭐였을까 생각해 보았다. 39도입네 40도입네 온 세상이 더위에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저녁 찬거리 준비로 마트 안을 두리번거릴 때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바로 우뭇가사리(우무)묵이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바로 이거야. 불도 필요 없고 시간도 절약되는 간편식.'
우무는 도토리묵과 두부 사이에서 얌전하게 쌓여 있었다. 맑고 투명한 얼굴로 손짓하는데 어렸을 적 시골 풍경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외할머니는 햇볕 쨍쨍한 날이면 점심으로 우무묵을 자주 만들었다. 양념간장에 버무릴 때도 있었고, 콩가루를 타서 냉국으로 할 때도 있었다.
우무냉국을 먹으며 땀을 닦던 사람들
뜨거운 뙤약볕을 피해 원두막에 앉아서 우무를 먹고 시원한 수박도 먹었다. 나는 늘 이상했다. 아무 맛도 없는 걸 왜 어른들은 후루룩 소리까지 내며 사발째 들이켜는 건지가. 5일마다 서는 장터에서도 우무냉국을 먹으며 땀을 닦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지금 내 나이가 그때 외할머니의 나이쯤 되었다. 어렸을 적에는 느껴보지 못한 맛이 지금은 어떨까, 한번 맛보고 싶어졌다. 우선 3팩만 사봤다. 채썰기까지 되어 있어 헹구기만 하면 되니 세상 간단했다. 파, 마늘, 고춧가루, 매실청을 섞어 맛있는 양념간장을 만들었다. 예쁜 그릇에 우무를 담고 식탁에 올리면서 간장을 끼얹고 참기름과 통깨를 뿌렸다.
남편은 그릇을 잡아당기며 웬 거냐 물었고, 처음 보는 음식 앞에서 아들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다이어트에 최고라 강조하니 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남편은 고향에서 많이 먹어봤는데 지금도 있었냐며 입맛부터 다셨다. 잠시 후 식탁 위로 후루룩 소리가 기분 좋게 퍼졌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우리 가족은 모두 엄지를 들어 맛의 감상을 표현했다.
가족의 폭발적인 호응에 여름 별미로 우무를 식탁에 자주 올리게 되었다. 반찬이 부실한 날이나 무더위로 지쳤을 때, 특히 안성맞춤이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우무 요리에도 변화를 주었다. 처음에는 간장 양념만 끼얹었다. 다음에는 채 썬 오이와 달걀지단까지 합류했고, 나중에는 콩가루도 조금 섞어보았다. 지금은 양념간장이냐 콩국이냐 두 가지 방식으로 취향을 살리고 있다. 아들은 양념간장을 선호하고, 우리 부부는 콩국에 만 것을 좋아한다.
가족의 입맛은 잡았으니 이제 엄마의 입맛을 잡으러 갈 차례. 엄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보따리에서 우무 팩을 꺼내 놓으면서 수선을 떨었다.
빨간 수박 한 조각을 띄우다

▲우무묵채 요리의 변천우무묵채를 발견한 뒤부터 이번 여름은 조금 더 시원하고 조금 더 편안한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고마운 우리의 만남을 공개하면서 남은 여름도 굳건하게 잘 견뎌내시라는 바람을 담아보았습니다. ⓒ 윤태정
"짜잔, 엄마의 잃어버린 입맛을 찾아드리려고 큰딸이 왔어요."
무슨 요리를 해주려고 호들갑인지 기대에 찬 엄마가 식탁 앞에 앉으셨다.
"오늘의 요리는 우무가 되겠습니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 좋은 우무냉국이 왔어요!"
엄마는 우무를 어디서 구했는지부터 물으셨다. 대한민국에 없는 게 어딨고, 안 되는 게 어딨나. 원하신다면 냉장고에 가득 채워둘 테니 걱정을 마시라 큰소리를 뻥뻥 쳤다.
"양념간장이냐 콩국이냐 두 가지 중에서 택하세요."
엄마는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우무는 옛날부터 콩국에 마는 게 최고지"라 하셨다. 더위에 지쳤는지 엄마가 입맛을 잃어 걱정하던 차였다. 우선 콩국을 진하게 타 놓았다. 재빨리 우무채를 물로 헹구었다. 콩국에 우무를 넣고 빨간 수박 한 조각 띄우니 어쩜 그리 예쁜지. 치아가 부실한데도 금세 한 그릇을 뚝딱 비우셨을 때 내 기분은 하늘을 날았다.
우무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지 누가 알았나. 아들은 살이 빠져 좋다지, 남편은 예전 고향 생각이 나서 좋다지. 게다가 엄마는 치아 신경 쓸 필요 없어 좋다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이제 우무는 우리 집 여름 필수품이 되었다. 내가 없더라도 손쉽게 냉국을 타서 잡수실 수 있도록 엄마 냉장고에도 쟁여 두었다.
도대체 우뭇가사리의 원조는 무엇인지 포털 사이트로 찾아보았다. 머리 풀어 헤친 귀신의 형상을 한 해괴하게 생긴 해조류였다. 맑고 투명한 우무의 원조라 보기에 도무지 연결 고리는 없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야들야들한 젤리 식감을 즐기면 그만이지.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우무 예찬을 하기 시작했다.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칼로리도 낮고 다이어트와 변비 해소에 그만이니 젊은 사람에게도 좋다.
매일 반복되는 밥상 차리기에 지칠 법도 한 요즘이다. 하지만 시원한 우무 한 그릇에 웃음 짓는 가족들을 보면 없던 힘도 불끈 솟는다. 할머니의 손맛에서 나의 손맛으로, 다시 엄마와 딸의 미각으로 이어졌다. 우무야말로 더운 여름 우리 집 입맛을 지탱해 준 별미 음식이다. 오늘도 냉장고 문을 연 내 손이 스르르 우무 팩 쪽으로 다가간다. 삼시 세끼 우리 집 밥상에 구원 투수로 올라와 주어 고맙다. 우무 덕분에 이번 여름도 무탈하게 잘 건너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처서가 지나도 연일 계속되는 무더위, 아마 우무 요리를 조금 더 즐겨보라는 뜻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