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2일부터 31일까지 튀르키예를 여행했다. 목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답사다. 이번 여행기를 통해 튀르키예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살펴보려고 한다.

▲콘야에 있는 셀주크시대 알랏딘 사원 ⓒ 이상기
셀주크튀르크 전성기 때 사원을 찾아
콘야는 1134년부터 셀주크튀르크의 수도였다. 셀주크튀르크는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초반까지 영토를 넓혔고, 카이쿠바드(Alā ad-Dīn Kayqubād) 1세(1220~1237)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가 통치 하는 동안 궁전과 사원이 지어지고, 이슬람 신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는 콘야의 왕궁을 증축하고 성을 쌓았다. 그리고 왕궁 근처에 왕실 사원인 알랏딘 모스크를 완성했다.
알랏딘 사원이 있는 언덕은 그리스 시대 아크로폴리스로 신전이 있었다. 그곳에 비잔틴 시대 바실리카 양식 교회가 들어섰고, 1155년부터 이슬람 사원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신전과 교회의 기둥과 같은 건축 자재가 재활용되었고, 1219년부터 대대적인 재건축이 이루어져 1235년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사원이 궁전과 마주 보고 있어서 입구가 북쪽에 있었다.

▲알랏딘 사원 내부 ⓒ 이상기
그러나 오스만튀르크 시대 이후 사원의 입구가 동쪽으로 바뀌었다. 동쪽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면 42개 기둥으로 이루어진 아주 넓은 방이 나온다. 이들 기둥은 모양이 가지각색인데, 그것은 그리스 로마 시대 건축 자재를 재활용했기 때문이다.
방의 남동쪽으로 비취색 타일로 장식한 미흐랍과 흑단나무로 만든 민바르가 눈에 확 들어온다. 미흐랍을 감싸고 있는 비취색 타일 사이사이로 검은색 글씨와 문양이 빽빽하다. 글씨체와 기하학 문양이 조화를 이뤄 신성한 느낌을 준다.
민바르는 양각과 음각으로 글씨와 문양을 새겨 입체감을 부여했다. 안내문에 따르면 글씨는 전통적인 쿠파체와 당시 새롭게 만들어진 톨트체가 사용되었다. 글은 유일신 알라의 전지전능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왕을 찬양하는 내용도 일부 있다고 한다. 쿠란에 나오는 문양은 아라베스크와 루미 문양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민바르가 1155년 9월에 만들어졌다고 하니 대단한 유물이다. 알랏딘 사원에는 셀주크튀르크 왕 8명이 묻혀 있는 영묘(Mausoleum)가 있다.

▲셀주크투르크시대 알랏딘 사원 내부에 있는 미흐랍과 민바르 ⓒ 이상기
카이쿠바드 1세는 또한 콘야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베이셰히르(Beyşehir) 호숫가에 여름 궁전을 짓기도 했다. 안탈랴(Antalya) 동쪽 133km 지점에 만든 알란야(Alanya) 궁전과 탑 그리고 이슬람 사원은 지금도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카이세리(Kayseri) 북서쪽에도 궁전을 지었는데, 그곳에서 카이쿠바드 1세는 아들 카이후스로(Kaykhusraw) 2세에 의해 독살되었다. 지난 회에 연재한 술탄한 카라반사라이도 그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다(관련 기사 :
실크로드의 쉼터, 이런 거까지 있다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찾으십시오"

▲1981년부터 1994년까지 튀르키예 5000리라 지폐에 나오는 루미와 그의 영묘 메블라나 사원 ⓒ Public domain
다음으로 찾아갈 곳은 메블라나 박물관이다. 그곳에 위대한 시인 잘랄라딘 루미(Mevlana Celaleddini Rumi : 1207~1273)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1273년 12월 17일 콘야에서 세상을 떠나 1274년 청록색 타일로 치장한 영묘에 묻혔고, 무슬림이 찾는 성소가 되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자 영성가답게 기가 막힌 묘비명을 남겼다.
"우리가 죽으면 땅에서 무덤을 찾지 말고,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찾으십시오."
우리가 이 세상에 남길 것은 넋(魄)이 아니라 혼(魂)이라는 것이다. 정신적인 삶을 강조한 메블라나(Mevlana) 교단의 창시자다운 문장이다.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가 그의 묘비명을 인용하며 메블라나 박물관을 가지 않겠다고 한다. 여행 계획표 상에 외관을 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여행을 하면서 늘 가이드와 밀고 당기는 신경전을 벌이게 되는데, 꼭 봐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 않은 게 잘못이다.

▲콘야의 성 바울교회 ⓒ 이상기
그 대신 찾아간 곳이 성 바울 교회다. 알랏딘 언덕 남쪽, 메드레세 공원 북쪽 주택 사이에 협소하게 자리 잡고 있다. 종탑을 포함해서 3층으로 지어진 고딕식 건물이다. 로마 교황청의 지원으로 근래에 지어졌고,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축성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3층 박공 위에 설치된 십자가가 라틴십자가다. 이곳은 미사가 있는 일요일에만 열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루미의 삶 이야기
루미는 1207년 타지키스탄의 상투다(Sangtuda)에서 수피즘을 신봉하는 페르시아계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설교자이자 율법학자인 아버지 왈라드(Baha ud-Din Walad)로부터 쿠란을 공부하며 자랐다. 당시 이곳은 박트리아 지역으로 수피즘의 중요 거점인 발흐(Balkh)의 문화적 영향권에 있었다. 1212년 아버지를 따라 사마르칸트로 이주했고, 1219년 몽골족이 침입하면서 호라산 지역의 니샤푸르,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거쳐 메카를 순례했다.
그리고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거쳐 아나톨리아 지방의 카이세리, 니데를 지나 카라만(Karaman)에 7년간 정착했다. 이곳에서 1225년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1228년 5월에는 셀주크의 왕 카이쿠바드 1세의 초청으로 수도인 콘야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는 이슬람 학교인 메드레세 교장 바하웃딘(Baha ud-Din)의 제자가 되어 9년 동안 수피즘에 대해 공부했다. 그리고 그가 죽자 성직자, 교사, 율법학자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루미의 시가 들어간 13세기 도자기 ⓒ 이상기
1240년부터 루미는 율법학자로 판결을 내리고, 사원에서 설교하며, 이슬람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공적인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에 파견되어 4년 동안 살고 돌아왔다. 1244년 11월 루미는 콘야에서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로 안내할 스승을 만난다. 그가 타브리즈 출신의 수피즘 수도자이자 시인인 샴스(Shams)다. <샴스 타브리즈의 담론((Discourse of Shams-i Tabrizi)>에 나오는 명문이 루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샴스는 1248년 12월까지 루미의 영적인 스승이 되어 루미에게 올바르고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떠난다. 루미는 그의 영향을 받아 페르시아 가잘 형식으로 쓴 <샴스 타브리즈 시집(Divan of Shams Tabrizi)>을 썼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6권으로 된 시집 <마스나비(Masnavi)>를 냈다. <마스나비>는 문학 작품이지만 페르시아로 쓴 쿠란이라 불릴 정도로 튀르키예와 이란에서 신성하게 여겨진다. 영어로 번역된 그의 시집은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나는 평생 <쿠란>의 종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선택 받은 자 무함마드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이 내 말에서 <쿠란> 이외의 것을 인용한다면,
나는 분개해 그를 떠날 것이다."
루미는 시와 음악과 춤을 통해 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음악과 춤이 신성한 상태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고, 영혼의 부활을 가능케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수행과 의식의 방법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회전)춤을 추고, 시를 낭송 하거나 노래하며 기도하는 세마(Sema) 의식을 장려했다. 2005년 튀르키예 정부는 메블라나 세마 의식을 유네스코 인류 무형유산으로 등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