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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아침 공기가 선선해진 요즘에도 낮이 되면 가을이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름을 처음 겪는 아이의 침실에서는 온습도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자장가를 부르며 아이를 토닥이고 있노라면 겨우 60% 언저리로 낮춰놓은 습도가 70% 중반으로 훌쩍 올라갔다. 인간 가습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빠의 온몸에서 습기가 분출되기 때문이었다.
아기 또한 아빠와 똑 닮은 체질이어서 둘이 내뿜는 훈김의 양은 더하기가 아니라 곱하기가 되었다. 잠들락 말락 눈꺼풀을 파르르 떨다가 눈을 감는 순간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체온이 더 오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열이 없는 엄마로 품을 바꾸어야 겨우 진정되는 날이 지속됐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했다. 여행지, 특히 숲으로 둘러싸인 곳에서는 비교적 아이가 잘 잤다. 인공적으로 조절하는 온도는 급격하게 변하지만, 깊은 산 중턱의 숙소에서 창문을 열어놓으면 오랜 시간에 걸쳐 서서히 시원해지니 눈꺼풀 저편의 세상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듯했다. 새벽의 습기조차 포근한 냉감이불처럼 우리를 덮어주었던 것 같다.
또한 자연 속에서는 도시에서보다 훨씬 안전하고 재미있게 산책을 할 수 있어서 아기띠에 앉은 아이의 볼이 발게질 정도로 오래 걷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열치열의 효과가 발생하여 낮에는 에너지를 쏟아 놀고 밤에는 잠으로 충전하는 선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인생 최초로 계곡에 몸을 담그다

▲뱀사골 계곡기상청 누리집 상의 기온은 34도였으나 서늘한 기운이 가득했던 곳 ⓒ 안사을
그동안 벼르고 별렀던 피서지가 있었다. 뱀사골 계곡이었다. 국립공원 내 계곡이라 원칙적으로 입수 불가이지만 여름철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구간이 있다. 영아기 아이가 몸을 담그기에 충분한 수준의 수질이 담보되면서도 합법적으로 물놀이가 가능한 곳이니 인생 첫 계곡 물놀이로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8월 초순, 휴가철인 데다가 8개월짜리 아이를 동반해야 하니 숙소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계곡과 가까운 곳은 행락객으로 밤늦게까지 소음이 있을 수 있어서 애초에 배제했다. 서로 민폐를 주지 않기 위해 독채 펜션을 물색했는데 마침 빈방이 하나 있었다. 계곡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외딴 마을 속의 아담한 숙소였다.
짐을 풀고 순조롭게 아이를 재우고 있는데 바깥에 있는 개수대에서 아내의 비명이 들렸다. 강도라도 만난 수준의 날카롭고 큰 소리였다. 막 잠들어가던 아이도 화들짝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알고 보니 젖병을 씻던 아내의 얼굴 앞으로 커다란 나방이 돌진했기 때문이었다.
나방과의 전쟁은 내가 하는 것으로 하고 아내가 들어와 다시 아이를 토닥였다. 집에서는 이렇게 갑자기 깨면 다시 재우는 것에 큰 애를 먹거니와 그 여파가 밤새 가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는 금세 다시 잠들었다. 창 밖의 신선한 공기와 더불어 풀벌레 소리, 간간이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 등 자연의 소리도 한몫 한 듯했다.
여행 둘째 날과 셋째 날 연달아 찾은 뱀사골 계곡은 역시 딴 세상이었다. 도롯가는 30도를 웃도는 폭염 속이었지만 탐방로와 계곡에서는 서늘한 골바람이 흘렀다. 조심스럽게 아이의 발을 계곡에 담가 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느리게 물을 저어보던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특유의 탄성 소리와 함께 물장구를 쳤다.

▲계곡에서시원한 계곡물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아이 ⓒ 안사을
그 모습에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이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이런 산골짜기에서 아기를 볼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아이에게 축복과 찬사를 아낌없이 보내주셨다.
2박 3일 동안 근처에 있는 명승지도 몇 군데 들렀다. 주로 사찰이었다. 여정 중 더위와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밥때가 되면 마을 정자를 찾아 이유식을 먹이는 것도 고행이라면 고행이었다. 아이는 뒤통수가 땀에 흥건히 젖어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풍경을 열심히 관찰했다.
오감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 최고의 경험

▲벽송사에서마천에 있는 벽송사에 가면 눈 앞으로 많은 산 능선들이 겹쳐 있다. ⓒ 안사을
8월 중순에는 함양 대봉산 자락에 자리한 '대봉 캠핑랜드'를 숙소로 잡았다. 공립 자연휴양림이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고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쉼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놀이터 계의 에버랜드'라는 별칭이 붙어있을 만큼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매우 훌륭하다고 했다.
직접 와 보니 그 별명이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자면, 신나게 놀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산 능선들이 발아래 놓여있는 것이 마치 천국에서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것 같았다. 8개월 아기는 영문을 모르니 막상 흥분한 것은 엄마와 아빠였다. 격앙된 어투로, 몇 년 후 꼭 다시 와서 신나게 놀자고 아이에게 약속의 말을 했다.
이튿날 아침엔 그림 같은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눈부신 운해였다. 비 온 뒤 뚝 떨어진 아침 기온은 산 아랫동네에 하얀 안개를 꾹꾹 눌러 놓았다. 아이는 풍경을 보고서 그랬는지, 신이 난 아빠의 모습에 그랬는지 먼 곳과 아빠를 번갈아 바라보며 양 볼에 말간 미소를 지었다.

▲아침 운해놀이터와 숙소 건물 뒤로 운해가 깔린 풍경이 보인다. ⓒ 안사을

▲풍경 감상차갑지만 싱그러웠던 아침 공기 속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 아이 ⓒ 안사을
낮에는 주로 상림을 걸었다. 특히 셋째 날 내린 비가 참 좋았다. 연잎 위에 맺힌 물방울들이 갑자기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여럿이 되어 후드득 떨어지는 장면이랄지, 코앞에 자신의 얼굴 만한 연꽃잎이 연분홍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 등을 아이는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온 세상과 세월에 대한 공부 거리를 자꾸만 작은 디지털 화면 안에 욱여넣으려고 하는 요즘, 이럴 때일수록 더욱 감각을 통한 직접 경험이 대단히 필요하다. 콧잔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채로 얇은 꽃잎을 조심스레 만져보는 아이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때로는 작은 위기 속에서 커 가는 아이

▲자연 학습 중보슬비에 젖은 꽃잎을 만져보는 아이 ⓒ 안사을
마지막 피서지는 덕유산이었다. 조성된 지 오래되어 나무가 크고 숲이 깊은 덕유산 자연휴양림에 숙소를 잡고 하루는 휴양림을, 하루는 구천동 어사길을 걸을 예정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짐이 차로 하나 가득했다. 특히 이제 아이가 자면서 굴러다니고, 깨어 있을 때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이리저리 기어 다니는 통에 매트에 이어 휴대용 베이비룸까지 챙겨서 다녀야 하는 상황이다. 오후 5시쯤 휴양림에 도착하여 경사로를 왔다 갔다 하며 겨우 짐을 풀고 나니 옷이 흥건하게 젖었다.
식재료를 다듬기 전에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물 샤워를 먼저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물에 엷은 황톳빛이 비쳤다. 냄새를 맡아보니 녹물은 아닌 듯했다. 관리사무소에 문의하니 너무 가물어서 상수원으로 쓰는 물을 끌어 올릴 때 흙이 조금 섞이는 상황이라고 했다.
어떤 곳은 홍수가, 어떤 곳은 가뭄이 찾아오는 기후 위기. 덕유산 물이 마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곳 휴양림이 수돗물을 쓰지 않고 상수원 물을 그대로 쓰고 있었다는 것은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기후와 환경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새도 없이 눈앞의 위기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더 급박했다.
어른이야 흙이 조금 섞인 물로 대충 씻고 요리는 정수기 물로 하면 된다고 하지만(객실 내에 정수기가 비치되어 있음), 아기는 사리 분별을 못 하니 이 물로 씻겼다가는 소독되지 않은 흙탕물을 쪽쪽 빨아먹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저녁 6시가 다 된 시간, 우여곡절 끝에 겨우 숙소를 새로 구했다. 서둘러 짐을 다시 꾸렸다. 아무리 늦어도 7시 반에는 아이의 저녁을 먹이고, 9시 전에는 우리의 식사와 세면까지 모두 마친 뒤 아이를 재워야 했다. 무엇보다도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이동하는 동안 울부짖을 아이가 미리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아이는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침착하고 의연하게 있어 주었다. 차 속에서나 숙소에서나, 엄마는 거듭해서 아이를 쓰다듬으며 "고마워, 이렇게 잘 참아줘서 참 고마워"라는 말을 해 주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밤을 보내고 이튿날과 마지막 날 계획했던 대로 숲길을 걸었다. 잠깐이었지만 함께 어려움을 겪고, 당황과 짜증보다는 격려와 칭찬이 오고 가서인지 아이의 눈빛이 한층 어른스러워 보였다. 고슴도치 부모의 시선일 수 있겠으나, 그것이야말로 아이를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영양분이 아닐까.

▲엄마와 아들덕유산 자연휴양림 숲길에서 ⓒ 안사을
2026년 여름, 아이는 땀도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 옆을 지키던 엄마와 아빠의 시간도 쉽지는 않았다. 함께 겪은 고생과 인내는 곧 우리를 단단히 엮는 아교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슬슬 가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난생처음 여름을 겪은 아이가 이제는 생애 처음으로 오색빛깔 숲과 산을 누빌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