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로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허공을 떠돌며 나무 사이를 오간다. 그 모습은 마치 다람쥐를 연상케 한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와 나무의 움직임을 읽으며 능숙하게 나무를 살핀다. 때로는 가지 사이를 옮겨 다니고, 때로는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른다. 아래에서는 아찔해 보이는 순간에도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단순히 나무의 겉모습이 아니다. 가지 하나의 상태와 나무의 균형, 상처와 병든 부위까지 세심하게 살핀다. 나무 위에 올라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는 그 높이에서 나무의 생명과 안전을 함께 살피고 있다.

그에게 나무는 단순한 작업 대상이 아니다. 나무의 생명을 이해하고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일이다.

AD
그가 국내 1세대 아보리스트의 길을 걸어온 세월은 어느덧 50년에 가깝다.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잡은 로프는 암벽과 빙벽으로 이어졌고, 미국에서 만난 아보리스트는 그에게 나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열어줬다.

인생의 굴곡 속에서 다시 나무에 오른 그는 이제 자신의 경험과 기술을 후배들에게 건네고 있다.
마치 다람쥐처럼 나무를 오르내리는 김병모(66) 씨를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본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움직임까지 살피며 나무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아보리스트 김병모 씨.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의 움직임까지 살피며 나무의 상태를 점검하고 있는 아보리스트 김병모 씨. ⓒ 김병모

설악산에서 시작된 빨간 로프

김 씨가 처음 로프를 만난 것은 '아보리스트'라는 말을 알기도 훨씬 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친구들과 손을 잡고 장난을 치며 비룡폭포를 향해 걷던 중 산에서 내려오는 낯선 사람들을 만났다. 특이한 복장과 장비, 배낭에 둘러멘 빨간 로프가 눈에 들어왔다. 어린 김병모에게 그 모습은 낯설면서도 강렬했다.

"그때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빨간 로프를 배낭에 둘러멘 모습이 어린 제 눈에는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아마 그때의 모습이 제 마음속에 깊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의 강렬한 인상은 산으로 향하는 계기가 됐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로프를 다루기 시작했고, 암벽과 빙벽을 오르며 산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베링해협을 스키로 횡단하고 미국 요세미티 하프돔 등 여러 곳을 등반했다. 1985년에는 설악산 물난리에서 하루 종일 로프 구조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제가 산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바친 것이 나중에 어떤 의미가 될지 몰랐습니다. 그냥 산이 좋았고, 로프를 잡고 올라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익힌 기술과 경험이 훗날 아보리스트가 되는 데 중요한 밑바탕이 됐습니다."

젊은 시절 산은 그에게 도전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산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삶의 방향을 잃었을 때 다시 그를 품었고, 로프와 함께 새로운 길을 찾게 했다.

그가 평생 산에서 익힌 로프는 결국 나무와 만나게 됐다. 그리고 그 순간, 어린 시절 설악산에서 보았던 빨간 로프는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길이 됐다.

 광림수목원에서 아보리스트 시연하는 김병모씨
광림수목원에서 아보리스트 시연하는 김병모씨 ⓒ 김병모

미국에서 만난 나무 위의 사람들

김 씨가 나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2000년 미국 출장길에서였다. 우연히 만난 아보리스트들이 로프와 장비를 이용해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관리하고, 필요한 경우 나무를 안전하게 제거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였다.

"처음에는 나무 하나 자르는 데 왜 저렇게 많은 장비가 필요한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미국의 아보리스트들은 나무를 단순히 베어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살피고, 가능한 한 살리는 방법을 먼저 찾았다. 제거할 때도 로프를 이용해 가지와 줄기를 통제하며 주변 피해를 최소화했다.

산을 오르며 오랫동안 로프를 다뤄온 김 씨는 호기심이 생겨 현장의 아보리스트에게 일을 배울 수 있는지 물었고, 약 일주일간 나무 위에서 작업을 익혔다.

"바위는 가만히 있지만 나무는 살아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가지마다 다릅니다. 나무를 오르는 것은 암벽 등반과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크게 달라졌다. 로프 기술이 새로운 직업으로 연결됐고, 나무를 단순한 자연물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였다.

 미국 출장 당시 로프와 장비를 이용해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관리하는 아보리스트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새로운 수목 관리 기술을 접한 김병모 씨.
미국 출장 당시 로프와 장비를 이용해 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관리하는 아보리스트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새로운 수목 관리 기술을 접한 김병모 씨. ⓒ 김병모

무너진 삶에서 다시 오른 나무

그러나 미국에서 배운 아보리스트 기술이 곧바로 그의 직업이 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넘어야 할 삶의 벽이 있었다. 20년 가까이 CF 감독으로 활동하며 살아온 그의 삶은 회사 부도로 한순간에 흔들렸다. 오랫동안 쌓아온 경력인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때는 정말 막막했습니다. 오대산 자락으로 들어왔을 때는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시기였습니다. 그래도 숲에 들어가면 마음이 조금 편해졌습니다."

그는 도시를 떠나 강릉 부연동 골짜기 숲으로 내려왔다. 처음부터 아보리스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숲을 거닐고 나무를 정리하며 지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나무를 가까이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직접 나무를 정리하다 문제가 생겼다. 베어낸 참나무가 인근 소나무에 걸린 것이다. 땅에서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배웠던 나무 작업이 떠올랐다. 로프를 이용해 나무에 올라가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필요한 장비를 마련해 나무 위로 올라갔고, 로프를 이용해 걸려 있던 나무를 조금씩 움직였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 경험은 그에게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때 '내가 산에서 배운 로프 기술을 나무에도 사용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벽과 빙벽을 오르며 익힌 로프 기술이 살아 있는 나무를 관리하는 새로운 기술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미국에서 스쳐 지나가듯 배웠던 아보리스트 기술이 비로소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무너진 삶을 피해 숲으로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그는 오히려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길의 시작에는 나무 한 그루와 로프 한 줄이 있었다.

 사업 실패 후 삶의 방향을 잃은 김병모 씨는 오대산 깊은 숲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사업 실패 후 삶의 방향을 잃은 김병모 씨는 오대산 깊은 숲으로 들어와 새로운 삶을 모색했다. ⓒ 진재중

나무를 타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를 이해하는 사람

김 씨는 아보리스트를 단순히 '나무를 잘 타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을 경계한다. 나무에 오르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나무를 제대로 살피고 관리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아보리스트는 나무에 오르기 전부터 수종과 수세, 수형은 물론 뿌리와 줄기의 상태를 살핀다. 공동이나 부후(썩음), 병해충, 고사지와 갈라진 가지처럼 위험 요소가 없는지도 확인한다. 주변의 전선과 건축물, 사람과 작업자에게 미칠 위험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한 뒤 작업 방법을 결정한다.

나무에 올라간 뒤에는 지상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수관 내부를 다시 살핀다. 어떤 가지를 제거해야 하는지, 어떤 가지를 남겨야 나무의 균형과 생육을 유지할 수 있는지 판단한다. 가지를 자를 때도 단순히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상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까지 고려한다.

"전문 아보리스트는 무조건 나무를 타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무의 상태와 작업 목적, 주변 환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가장 안전하면서 나무에 부담을 적게 주는 방법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보리스트의 가지치기는 단순한 절단 작업과 다르다. 가지 하나를 제거했을 때 나무의 하중과 균형, 바람의 흐름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이후 나무가 어떻게 자랄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때로는 가지를 자르지 않는 것이 가장 올바른 판단일 수도 있다.

김 씨가 생각하는 아보리스트의 전문성은 얼마나 높이 올라가느냐에 있지 않다. 나무 위에 올라가 무엇을 보고, 나무를 위해 어떤 판단을 내리느냐에 있다.

 나무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세심하게 살피며, 나무에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안전한 작업 방법을 판단하는 김병모 씨.
나무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세심하게 살피며, 나무에 부담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안전한 작업 방법을 판단하는 김병모 씨. ⓒ 김병모

푸른 숲에서 건강한 숲으로

그의 시선은 한 그루의 나무를 넘어 숲 전체로 넓어졌다. 우리나라 국토의 약 65%가 산림이다. 어디에서든 푸른 산을 쉽게 볼 수 있지만, 김 씨는 겉으로 울창해 보이는 숲이 반드시 건강한 숲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숲의 면적이나 겉으로 보이는 색깔만 볼 게 아니라, 그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건강 상태와 숲 내부의 구조를 살펴야 합니다."

실제로 숲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나무가 지나치게 빽빽하게 자라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거나, 햇빛을 찾아 가늘고 길게 웃자란 나무도 있다. 뿌리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나무는 가뭄이나 강풍에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병해충에 취약한 나무도 생긴다.

과거에는 헐벗은 산을 푸르게 만드는 것이 산림정책의 중요한 목표였다. 나무를 심고 숲을 늘리는 데 집중했고, 우리나라는 성공적으로 녹화를 이뤄냈다. 하지만 이제는 숲을 바라보는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김 씨의 생각이다.

"이제는 얼마나 많이 심었느냐보다 그 나무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숲은 단순히 지도 위에 표시된 녹색 면적이 아니다. 서로 다른 수종과 나이, 크기와 생육 상태를 가진 나무들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하나의 생태계다. 그가 한 그루의 나무를 살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건강한 숲은 결국 건강한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강릉 오대산 부연동 훈련장에서 로프를 이용해 나무에 오르며 아보리스트 기술을 익히고 있는 김병모 씨.
강릉 오대산 부연동 훈련장에서 로프를 이용해 나무에 오르며 아보리스트 기술을 익히고 있는 김병모 씨. ⓒ 김병모

나무를 살린다는 이름으로 나무를 해치지 않도록

김 씨는 우리나라 수목관리의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산림기술사와 나무의사, 아보리스트는 서로 경쟁하는 직업이 아니라 각자의 영역과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다.

산림기술사가 숲과 임분을 중심으로 산림을 관리한다면, 나무의사는 개별 수목의 병해충과 생리적 이상을 진단하고 치료 방법을 찾는다. 아보리스트는 한 그루의 나무를 가까이에서 살피면서 구조적 안전성과 위험 요소를 판단하고, 가지치기와 보전, 실제 작업까지 수행한다.

김 씨가 문제로 지적하는 것은 여전히 남아 있는 과거의 수목관리 방식이다. 부후 부위를 필요 이상으로 제거하거나 나무의 공동을 인위적으로 메우는 작업, 가로수의 모양을 일정하게 만들기 위해 가지를 일괄적으로 잘라내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장비와 작업환경은 현대화됐지만 나무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리 방식은 아직 과거의 외과수술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나무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나무가 가진 자연적인 방어 능력을 훼손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많이 자르는 기술'이 아니다. 나무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뒤 꼭 필요한 만큼만 개입하고, 나머지는 나무 스스로 회복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무엇을 자를 것인가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 잘라야 하는지,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그리고 지금의 작업이 10년 뒤 나무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아보리스트의 역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무를 대상으로 작업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무가 오래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방법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김 씨의 생각이다.

 김병모 씨가 나무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며, 과도한 가지치기보다 나무의 생육과 자연적인 회복을 고려한 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병모 씨가 나무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며, 과도한 가지치기보다 나무의 생육과 자연적인 회복을 고려한 관리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 김병모

전력선 주변 나무, 이제는 통합 관리해야

김 씨가 특히 중요하게 보는 분야는 전력선 주변의 수목관리다. 기후변화로 고온과 가뭄, 강풍이 잦아지면서 산불과 대형 재난의 위험도 커지고 있다. 전력선 주변의 나무는 단순히 정전을 막기 위해 관리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나뭇가지가 전선에 닿거나 나무가 쓰러지면서 전선을 건드릴 경우 산불과 정전으로 이어질 수 있고, 통신과 교통, 산업시설 등 사회기반시설의 피해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전선에 닿을 수 있는 가지를 잘라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무가 쓰러졌을 때 전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목을 미리 찾아내고, 수종과 생장 특성, 나무의 구조적 결함과 부후, 뿌리 상태, 강풍에 대한 취약성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한다. 김 씨가 제안하는 해법은 '통합식생관리'​다.

"전력선과 주변 나무의 접촉으로 불이 나면 산림이나 주택 피해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규모 정전은 물론 통신과 교통 장애, 산업시설과 국가 기반시설의 마비로 이어지는 복합 재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통합식생관리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가지를 잘라내는 방식과 다르다. 현장을 조사해 나무의 상태와 주변 환경을 평가하고, 보존할 나무와 우선적으로 관리해야 할 위험목을 구분해 장기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김 씨는 전력선 주변 수목 관리를 단순한 벌목이나 가지치기 작업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전기안전과 수목생물학, 위험평가, 산불예방을 함께 고려하는 전문적인 관리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무를 얼마나 많이 잘라내느냐가 아니라, 어떤 나무를 남기고 어떤 위험을 사전에 줄일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다.

 김병모 씨가 아보리스트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수목 관리 현장을 점검하며 안전한 작업 방법과 기술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병모 씨가 아보리스트협회 관계자들과 함께 수목 관리 현장을 점검하며 안전한 작업 방법과 기술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 김병모

후배들의 로프를 받쳐주는 사람

50년 가까이 로프를 잡아 온 김 씨에게 로프는 이제 단순한 작업 도구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다음 세대에게 경험을 건네는 상징이 됐다.

그는 로프의 움직이는 부분인 '워킹 엔드(작업자가 잡고 당기거나 매듭을 만드는 로프 끝)'를 자신의 젊은 시절에 비유한다. 직접 나무에 오르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며 아보리스트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이제는 후배들이 새로운 워킹 엔드가 되어 더 멀리 나아가야 하고, 자신은 뒤에서 그들을 지탱하는 '스탠딩 파트 (작업 중 상대적으로 고정된 로프의 본체 부분)'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로프가 제대로 힘을 받으려면 매듭이 필요하다. 김 씨에게 그 매듭은 작업윤리다.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원칙이 없다면 사람과 나무 모두에게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네가 오늘 작업한 나무를 나중에 네 아들이나 손주에게 보여주면서 '이 나무는 아빠가, 할아버지가 관리한 나무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후배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것도 기술보다 책임감이다. 작업자의 편의를 위해 나무를 함부로 훼손하지 말고, 작업이 끝난 뒤에도 나무가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전문성이란 결국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순간에도 원칙을 지키는 데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동시에 이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즐거움과 반복적인 훈련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무 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성취감, 동료와 호흡을 맞추는 즐거움, 작업을 마친 뒤 건강해진 나무를 바라보는 보람이 있어야 한다. 로프와 구조기술 역시 위급한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도록 반복해서 익혀야 한다. 김 씨가 후배들에게 건네려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사람을 지키고 나무를 살리는 기술, 그리고 그 기술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책임까지 함께 물려주는 것​이다.

 다람쥐처럼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능숙하게 작업하는 아보리스트 김병모 씨.
다람쥐처럼 나무 사이를 자유롭게 오르내리며 능숙하게 작업하는 아보리스트 김병모 씨. ⓒ 김병모

로프가 이어준 삶, 다시 나무 위에서

어린 시절 설악산에서 처음 마주했던 빨간 로프.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손에 익힌 로프는 암벽과 빙벽을 거쳐 미국의 나무 위로 이어졌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었던 순간, 다시 그를 나무 위로 이끌었다. 김병모 씨에게 로프는 이제 단순한 작업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이어온 끈이자 사람과 나무를 연결하는 매개이고, 자신이 쌓아온 경험을 다음 세대에 건네는 길이다.

그는 평생 높은 곳을 올랐다. 그러나 나무 위에서 배운 것은 단순히 더 높이 오르는 기술이 아니었다. 나무의 상태를 살피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판단하며, 자신의 작업이 나무의 미래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를 생각하는 법이었다.

"나무에 올라가 보니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나무를 자르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결국 나무와 사람이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일이더군요."

나무는 그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 그는 그 길에서 배운 기술과 경험을 후배들에게 건네고 있다.

로프 하나로 나무에 올랐지만, 그가 남기려는 길은 나무 위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길, 그리고 한 세대의 경험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길이다.

김병모 씨는 오늘도 다시 나무 위에 오른다. 이번에는 자신의 다음 길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그 길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무 위에서 작업하며 수목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김병모 씨. 그는 나무를 단순히 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아보리스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나무 위에서 작업하며 수목의 상태를 살피고 있는 김병모 씨. 그는 나무를 단순히 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는 것이 아보리스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 김병모



#김병모#아보리스트#부연동#강릉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진재중의 '100인, 100색'





독자의견1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