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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태국미술명품전 전시장 입구 ⓒ 오순미
작년 8월, 몽골에 다녀온 팀이 올 12월엔 태국으로 출발한다. 매체를 통해 접하긴 했어도 처음 가는 나라라 설레는 마음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 이번 일정엔 국립공원 두 곳과 아유타야의 마하탓 사원(나무뿌리 속 불두로 유명), 방콕 시내가 포함될 예정이다.
태국의 12월 날씨와 국립공원을 검색하다 '태국 미술 명품전'이 눈에 띄었다. 하나라도 더 알고 간다는 것은 여행지를 바라보는 눈 하나가 더 생겼단 의미와 같다. 무턱대고 가면 사원은 사원이고 음식은 음식에 불과할 뿐이다. 역사나 종교, 생활 방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들의 문화를 그들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많이 알고 갈 필요까진 없을 듯하다. 솔직히 공부하고 떠나는 여행이 이젠 버겁다. 역사 하나, 종교 하나, 인물 하나, 음식 하나 정도만 알아도 여행 풍경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니까. 태국의 삶을 읽고 조금 더 느끼기 위한 사전 준비로 미술전에 가보 는 것도 좋을 듯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로 향했다. 서양미술은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전시됐으나 동남아 미술은 처음인 듯해 어떤 다름이 놓여 있을지 궁금했다.
내가 갔던 지난 22일, 토요일엔 보라색 옷차림의 관람자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날이었다. 요일별 옷차림(참고-월:노랑, 화: 분홍, 수: 초록, 목: 주황, 금: 하늘/파랑, 토: 보라, 일: 빨강)에 따라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단다. 내 티셔츠가 완전한 보랏빛도 아니었는데 너그럽게 인정해 주었다. 대수롭잖은 일일 수도 있으나 모르고 찾아간 관람객에게 10% 할인은 특별했다. 태국이 먼저 내민 손길 같아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태국을 피워올린 3개의 공간
내부는 세 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태국 미술의 토대가 된 약 50만 년 전 선사시대의 삶과 문화를 선보이는 1관 . 태국 고전 문화의 기틀을 다진 13세기 무렵의 수코타이(1238~1438), 란나 (1292~1775), 아유타야(1351~1767) 왕국으로 이어지는 타이족의 삶을 다룬 2관 .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라따나꼬신(방콕) 시대의 왕실과 불교가 이룩한 태국 문화가 3관으로 갈렸다. 태국을 만든 시간과 사람을 조각, 회화, 공예, 실내 분위기로 한껏 펼쳐 놓았다.
타이족 왕국이 등장하기 전 시대인 1관에서 재밌는 비석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사위성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기적을 묘사한 비석-방콕국립박물관>이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다. 망고나무 아래서 설법하는 부처의 왼쪽을 보면 배가 볼록한 인물이 뒤로 넘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불교를 믿지 않는 그가 부처의 신통력에 놀라는 모습이다. 기적의 장면이 묘사된 비석은 초기 태국 불교미술의 걸작이란다. 신성한 권위에 답하는 깨알 같은 유머가 슬며시 웃음을 품게 했다. 외에는 로마식 등잔, 인도식 장신구, 법륜 등을 볼 수 있다.

▲<사위성에서 일어난 신비로운 기적을 묘사한 비석>-드바라바티 문화권에서 종종 발견 ⓒ 오순미
우리 전통 건축의 장식 기와 '치미'를 떠올리게 하는 <상상의 동물 마카라-람캄행국립박물관> 도자기가 2관에 전시돼 있었다. 예상 대로 사원 지붕의 처마 끝이나 계단 난간을 장식하던 건축 부재였다. 크기는 치미에 비해 훨씬 작았지만 도자기로 만든 건축 부재라는 데서 독특함이 엿보였다. 사원의 경계를 지키는 종교적 상징물이란다. 외에도 보리수 석상, 동적이며 섬세한 걷는 부처상에 시선이 꽂혔다.

▲<상상의 동물 마카라>-인도 신화에서 유래한 여러 동물의 특징이 어우러진 상상의 동물 ⓒ 오순미
3관에선 향로로 짐작되는 은제품이 찬란한 광채를 뽐냈다. 설명을 보니 '띠압'이라 부르며 귀족 또는 고위 관리직을 대접할 때 음식이나 공물을 담는 그릇이란다. <연꽃 봉오리 모양 띠압-방콕국립박물관> 앞에 선 관람객들은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몸체부터 뚜껑 손잡이까지 하나의 연꽃 봉오리로 제작된 것도 아름다운데 꽃잎마다 '천신 테파놈'을 정교하게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태국 장인의 세련된 금속공예 기술을 한껏 자랑할 만한 작품이다. 보관을 쓴 불상과 에메랄드 사원의 옛 중문 등, 낯설면서도 경이로운 작품까지 만날 수 있다.

▲<연꽃 봉오리 모양 띠압>-은판을 두드려 도드라진 꽃잎을 표현-타출기법 ⓒ 오순미
유연성으로 이룬 태국 미술
청동으로 제작한 불상들은 허리가 잘록한 데다 건반에 어울릴 만한 가늘고 긴 손가락, 우아한 손짓, 화려한 보관과 장신구, 갸름한 얼굴선에서 여성성을 떠올리게 했다. 반면 넓은 어깨, 큰 발, 깨달음을 향해 나가는 걸음걸이에선 남성미가 차올랐다. 중생의 모습이 담긴 석가의 희미한 미소 속엔 관람자를 달래는 위로가 비치는 듯했다. 태국만의 정서가 풍기는 인상이었다.

▲<아유타야 시기의 초기 보관불>과 <걷는 부처> ⓒ 오순미
지리와 문화에 따라 남·북·서·동북·중부로 나뉘었던 지역, 그 지역에 자리 잡은 서로 다른 민족, 그들은 인도에서 온 종교를 독창적으로 해석한 드바라바티 문화, 해상 왕국 스리비자야 문화, 크메르 영향을 받은 롭부리 문화를 형성하며 각각의 개성을 꽃피웠다. 다양한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해 태국만의 문화유산으로 빚어낸 그들에게서 특유의 유연성을 느낄 수 있었다. 탁월한 유연성으로 이뤄낸 태국 미술이야말로 그들만의 고유한 빛깔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0여 점의 작품은 황금사원, 똠얌꿍, 스콜, 무에타이 정도로 띄엄띄엄 알았던 태국을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한 나라로 안내했다. 선사시대부터 라따나꼬신(방콕) 왕조에 이르기까지 태국을 만든 수려하고 섬세한 미술 전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라 하니 태국 여행을 준비 중인 분이라면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 태국의 삶과 문화, 종교를 이해하는 밑거름으로 충분할 것이다.
태국의 정치와 예술을 이끈 왕실, 태국민의 삶과 한 몸인 불교. 두 축이 일군 오늘의 태국 문화와 그 뿌리를 살펴볼 '어메이징 타일랜드'. '타이족의 땅'이란 이름에 담긴 그들의 정체성과 개인의 수행을 강조하는 그들의 태도가 깊이 있게 다가올 전시다. 9월 6일이면 전시가 끝나므로 궁금하다면 서둘러야 한다. 수·토엔 오후 9시까지 연장하니 퇴근 후도 노려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