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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옛날에도 불도저가 있었어요?"
요즘 다섯 살 손자 로리의 관심은 온통 '옛날'에 머물러 있다. 로리가 말하는 옛날은 엄마와 아빠가 어렸던 때나 할머니가 젊었던 시절이 아니다.
동화책 속 호랑이가 팥죽 할머니와 말을 나누거나,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사람들이 커다란 기와집이나 대궐에 들어가는 그 시절을 말하는 거다. 지금 거리에서는 볼 수 없는 집과 옷차림, 물건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며 로리는 그 세계에도 자신이 아는 것들이 있었는지 궁금해한다.
"옛날에도 자동차가 있었어요?"
"옛날 사람들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어요?"
"도로를 만들 때 로드롤러가 일했어요?"
로리에게 옛날은 흘러가 버린 과거라기보다 미지의 세계다. 공룡 시대나 우주를 향한 호기심처럼 동화책 속에서 발견한 신비로운 공간. 자기가 사는 지금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좋아하는 자동차와 중장비도 그곳에 존재했는지 확인하려는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게 아이는 지금과 옛날 사이에 부지런히 작은 다리를 놓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서울에 볼일이 있는 며느리를 따라 나섰다. 손자와 나는 예술의전당 근처에서 내려 국립국악원 바로 옆 국악박물관으로 향했다. 옛날을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 옛사람들이 다루던 악기와 소리를 보여주고 싶었다. 옛날로 들어가는 문이 꼭 오래된 집이나 물건으로만 열리는 것은 아니니까.
개관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고요한 박물관 앞을 서성였다. 아이는 광장을 신나게 뛰어다녔다. 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문이 열리자, 아이는 기다리던 세계를 만난 듯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첫 번째 관람객이었다.
발끝에서 깨어난 궁궐의 소리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1층, 제 1 전시실인 '국악뜰'이었다. 어두운 바닥 위로 오리와 용, 호랑이, 봉황 등 여러 문양이 빛으로 떠올랐다. 로리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문양 하나를 찾아 발을 올려놓자, 정면에 펼쳐진 화면의 궁궐 뜰안으로 악기 하나가 나타나 자리 잡더니 연주자가 나온다.
울림 있는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악기 위쪽에는 '방향'이라는 낯선 악기 이름이 또렷이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전시실 안에 있는 '방향'이라는 악기에 빛이 비추어진다.
연주가 끝나자 로리는 다시 바닥을 살폈다. 이번에는 다른 문양을 향해 달려가 두 발을 모아 섰다. 그러자 화면 속 궁궐 뜰에 또 하나의 악기가 나타나고, '편종'이라는 이름과 함께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그 공간 안에 있는 실제 편종에도 빛이 비춰졌다.
빛을 발견하면 달려가 밟고, 악기와 연주자가 나타나면 고개를 들어 화면을 바라보았다. 한 악기의 연주가 끝날 때까지 지켜본 뒤에는 다시 다음 문양을 찾아 움직였다. 단순히 화려한 영상 앞에서 뛰노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발끝에서 어떤 악기와 소리가 깨어나는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이곳은 박물관에서 제작한 신기술융합콘텐츠를 경험해볼 수 있는 전시실이었다.
발로 문을 열고, 눈으로 악기를 담으며, 귀로 울림을 받아들이는 시간. 낯선 국악기의 소리가 하나의 놀이가 되어 아이에게 다가갔다. 소리를 통해 비로소 옛날과 만난 순간이었다. 동화책 속 옛사람들도 기쁜 날에는 노래하고, 함께 모여 악기를 연주하며 장단을 맞췄을 터. 그림 속에 머물던 존재들이 소리를 품은 생명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 몸집만 한 북 앞에 서다

▲체험실여러 악기를 체험 중인 로리 ⓒ 신혜솔
위층에는 악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비슷비슷한 악기들이 많았지만 악기 체험 공간으로 들어가자 관람은 더욱 생기를 띠었다. 로리는 가야금 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뜯어보고, 채를 들어 편종을 두드려도 보았다. 악기마다 손을 대는 방법이 달랐고, 손끝에서 태어나는 소리도 달랐다.
크기가 제각각인 북이 모인 곳에서는 북마다 다른 소리를 차례로 확인했다. 아이의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제 몸집만 한 커다란 북이었다. 다리를 벌려 단단히 버텨 선 뒤, 북채를 높이 들어 북의 한가운데를 힘껏 내리쳤다.
둥―.
묵직한 울림이 퍼지며 아이의 작은 몸도 진동을 받아 안았다.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북채를 다시 들어 몇 번이고 두드렸다. 북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거대한 소리를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즐거운 모양이었다. 관람을 마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로리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처음에 큰 북을 친 느낌이 너무 좋았어요."
'북소리가 좋았다'가 아니라 '북을 친 느낌이 좋았다'는 말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북채가 가죽에 닿는 순간의 반동, 손에서 팔로, 온몸으로 퍼져나가던 울림을 기억한 것이다. 아이는 북소리를 귀로만 들은 것이 아니라 몸 전체로 감각하고 있었다.
집까지 이어진 울림
집에 도착해서도 국악을 향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로리는 옛날 노래를 듣고 싶다고 했다. 며느리가 국립국악원 누리집에서 국악동요를 틀어주자, 흥겹고 찰진 장단이 방 안을 채웠다.
국악동요는 생각보다 신났다. 가락에는 우리말의 맛이 살아 있었고, 장단은 몸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로리의 어깨가 들썩이고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을 느끼면 수줍은 듯 동작을 줄이다가도, 이내 음악에 마음을 빼앗겨 온몸으로 장단을 탔다.
그저 순수한 즐거움이었다. 북을 쳤을 때 온몸으로 번지던 진동, 가야금 줄을 뜯던 손끝의 감각, 빛나는 문양을 밟을 때마다 깨어나던 음악 소리가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악기의 이름과 역사는 그 즐거움을 따라 천천히 스며들어도 좋다.
국악박물관은 결코 지루한 공간이 아니었다. 예로부터 내려온 전통이지만, 지금도 숨 쉬며 쓰이는 악기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아이와 함께 옛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참 좋은 시간이다. 주말마다 아이와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꼭 한번 국악박물관에 가서 신나게 놀아 보라 권하고 싶다. 월요일 휴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